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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 그리스도의 신성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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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2-19 조회수649 추천수2 신고

 

-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

 

 

 

현대주의자의 간계

 

이 문제는 이쯤 해 두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 적어도 한마디 덧붙여야 될 것

예수를 그저 위대한 사회 개혁자, 즉 하느님이 아니고 하나의 고상한 도덕

가로 여기는 학파가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다.

 

 이 학파는-이 학파의 초기 대표자는 르낭(Renan)인데, 요즈음도 프로테스탄

트 목사가 점점 더 많이 이에 가담하고 있다-예수를 소크라테스보다는 좀 더

현명하고 솔로몬보다 조금 더 위대한 입법가로, 또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보다

조금 더 고상한 도덕가로 묘사한다. 그들은 예수의 자비와 동정심을 최상급의  

형용사로 칭찬한다. 그의 겸손과 상냥함을 찬양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에 혀를 내두른다. 그를 모든 사람들 중에

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착한 분으로 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예수를

인간과 하느님과의 틈바구니를 건너지르는 바로 직전에 남겨 두고 하느님이라

고 부르기를 조심스럽게 삼가고 있다.

 

 두드러진 성공회 신부 패리쉬(Herbert Parish) 박사의 말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일반 현대주의자와 목사들이 이르는 것처럼, 예수를 아름다운 인간으로

묘사하되 하느님으로서의 영광을 드리기는 기를 쓰고 억누르고 있는 본보기이

다.

 

 "시간과 공간의 광막한 영원 속에 인간은 모든 볼 수 있는 피조물 중에서

산꼭대기에 서 있다. 그의 앞에는 그리스도라는 의미심장한 모습이 나타난다.

어떠한 인생도 이 갈릴래아의 젊은 스승의 빛나는 경력에 비길 만한 자는 없

다. 공자나 석가보다 위대하고 플라톤의 사상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보다

박력 있는 그의 말은 알렉산더 대왕의 거창한 짐꾼이나 카이사르의 정복보다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민족사상 가장 유명한 인사라도 그의 앞에는 무

색하다.

 그의 기적적 탄생이라든지 부활 등 허무 맹랑한 이야기-이 때문에 당시의 지

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이교(異敎)의 미스터리(密議: 일종의 광신 행위)의 반

신(半神)과 동일시되었다-는 제쳐놓고, 또 교리나 법령이나 공의회의 결정이

나 신학자들의 사소한  것을 가리고 따지는 정의(定義)따위는 무시하고-이런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신성과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한답시고 그리스도를 일

종의 제 2의 신으로 여기게 했다-다만 그의 인간성과 그의 가르침만을 고려해

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이 때에 인간으로서의 그는 세계의 놀라움

이요 감탄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될 것은 현대주의의 대표자라 할 패리쉬 박사는 예수로부터

신적(神的)인 것은 일체 배제하면서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윤리 수준까지 높이

는 것, 이를테면 니체식의 초인(超人)으로 들어 높이기에 남다른 열성을 부리

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긴다. 그리스도가 성부와 일

체이며 하느님이심을 스스로 거듭 선언하였음은 왜 그런 것인가? 가야파 앞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여 골고타의 십자가를 자원(自願)해서 짊어진

그 선언은 어떻게 된 일인가?  패리쉬 박사는 ’이 놀라운 에고이즘’에 대해서

잘라 말한다.

 

 "예수는 정신 복합 의식(複合意識)-일종의 과대 망상증-에 걸렸었다. 그의

괴상 야릇한 환상의 원인이 밝혀진 이상 모든 신비는 깨끗이 꺼져 버린다."

 

 

복합 의식(複合意識)의 발견

 

 패리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가르침은 심원하고 투철하다. 도덕면과

영성면에 있어서는 참으로 그를 당할 사람이 없다. 그는 어떠한 전통적 근거를

끌어내고 그 옛스러운 지혜에 다채롭게 간단 명료하고 묘한 솜씨를 나타냈다.

그렇지만 그가 자기의 내적 생명에 내재하고 있는 신(神)으로 말미암아 비추임

을 받고 있다고 확신하였다는 그것이 현대 정신 분석학자들이 이르는 복합의식

(複合意識) -과대 망상증 또는 허세 망상증- 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의 에고이즘은 가장 놀라운 종류의 것이라는 결론을 현대 비평가들이 내리는 것

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성부와 일체였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과는 달리 이의

비추임을 받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흔히 볼 수 있는 발명가나 발견

가나 예술가나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기도와 명상에 잠기고 꾸준히 준

비한 결과 가장 빼어난 이 천재의 맑은 지성에 천상의 빛이 흘러 들어왔던 것이

다."

 

 여기에는 근사한 기만이 숨어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도덕과 영

성면의 위대한 스승이라 ’실로 당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편으로는 ’나는 성부와 함께 있다’ 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라고 말한 이 그리스도를 과대 망상광(誇

大妄想狂)이니 허세 망상증에 걸렸느니 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헛소리라 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 꼭대기까지 추켜올렸다

가 동시에 땅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사나이야말로 변

덕이 죽 끓듯 한 본보기가 아닌가?  금방  그리스도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덕과 영적 지도자라 하고는 즉시 그 탈을 찢어 버리고 있다. 그리스도는 정

신 복합 의식에 걸린 미치광이요 ’가장 놀라운 종류의’ 고집쟁이여서 그의 말

은 모두가 기막힌 잠꼬대요 정신병자의 헛소리라고 하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두 가지 모순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슴 속에 그릴

능력이 전혀 없다. 패리쉬 박사의 얼토당토 않은 이 결론에 비해 한 때 의심

을 품었던 토마의 결론은 얼마나 감명 깊은가. 토마는 자기가 없었던 사이에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다른 사도들의 증언을 의심했었다. 후에 "제자들이 다

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

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

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

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했다."    

 

 

 

하느님이냐, 사기꾼이냐?

 

그러므로 예수의 성격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

중에 패리쉬 박사가 대표하는 이 현대주의자의 견해가 내 판단으로써는 가장

이치에 어긋난다. 왜 그런가?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가 그저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곧 그는 하느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이 성부와 일체

이며 스스로 하느님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선언 때문에 골고타에서 못

박혀 죽었다. 그는 이 사실을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이 진리를 세상에 가르치

기 위하여 사도들을 파견했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기는커녕 이 때문에

그 스승과 같이 자원해서 죽었다.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의 권위로 말미

암아 이 진리를 믿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는 악독스런 사기꾼이거나 정신병

자일 것으로, 그의 전인격과 개성은 말라비틀어져 버릴 것이다. 그가 무의식적

으로 정신병에 걸린 자라 하더라도 윤리적인 스승이 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쨋든 그의 전인격은 시들어 버리고, 따라서 앞서 말한 현대주의자나

유리(唯理)주의자들이 하늘 꼭대기까지 추어올린 찬사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인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느님의 가장 큰 원수가 될 것

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만 합당한 전 인류의 찬사를 가로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당신이 하느님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했으니만큼,

그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하늘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리하여 가톨릭의 냉철한 논리는 현대주의자의 죽도 밥도 아닌 멍청한 헛소

리를 내리치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아니라면 사기꾼이라고 단정한다.

각있는 지성인에게는 제 3의 흐리멍텅한 답이 있을 수 없다. 교회의 정신으로

말하면 진리는 경우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진리는  영원  불변한

그  자체로서  하나일  뿐이다. 감정이나 개인적 믿음에 의해 그리고 더욱이 그

잡다한 인조종교(人造宗敎)의 교리에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교회가 주위의 의지 박약한  사람들이 변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끄떡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굳게 지키는 이유이다. 교회는 그리

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도덕률에 권위를 주는 것이 그의 신성(神性)임을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를 참하느님으로 인정하느냐 또는 20세기의 산헤드린(Sanhe

drin: 유다인의 최고 재판소)에서 부정하느냐 하는 것이 구세주께 대해서 무관

심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교회의 기억 속에는 구세주의 또렷한 말씀

이 새겨져 있는 까닭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

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앞에서 그를 모른다

고 하겠다."

 

 

 

똑같은 대답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생활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리히터(Rich

ter)가 극히 아름답게 표현했듯이 "굳센 자 중의 가장 순수한 자, 순수한 자 중

의 가장 굳센 자인 그리스도는 못 구멍 뚫린 그 손으로써 여러 제국을 그 멍에에

서 벗겨 주고 시대의 흐름을 바꾸었다."  감관(感官)을 내세운 루소조차도 가톨

릭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속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성품 속에 신적

(神的)인 것이 있음을 인정하여 다음과 같은 감명 깊은 글을 썼다.

 

 

 

 

 "성서의 장엄함이 나를 찬탄케 하고 복음의 순결함이 내 마음

을 울렸음을 그대에게 고백한다. 우리 철학자들의 저 휘황 찬란

한 작품들을 정독해 보라. 그러나 성서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졸

렬하고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이렇듯이 단순하고도 고상한 글

이 단지 인간만의 작품일 수 있을까?  여기에 그 전기가 실려 있

는 저 거룩한 인물이 겨우 하나의 인간일 뿐일 수가 있을까? 그가

공상가 또는 야심이 가득한 자였으리라는 기색이라도 찾을 수 있

는가?

 

 그의 태도의 감미로움, 저 순결함이여! 그의 말 속에는 얼마나 부

드럽고도 마음을 울리면서도 우아한 맛이 가득하였던지! 그의 금언

(金言)이 간직한 숭고한 맛! 담화 속에 머금은 저 통현(通玄)한 슬

기! 그의 대답이 드러내는 저 침착함! 그의 감정을 억누르는 저 자

제력! 누가 있어, 어느 철학자가 있어, 그와 같이 흠없고 그와 같이

순박하게,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자 있으리오?

 

 진실로  진실로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죽음이  성현의  그것이

라면,  예수의 생애와  죽음은  진정  하느님의  그것이다."

 

(에밀 제4권).

 

 

 

 

 

예수가 19세기 전에 바리사이파에게 묻던 그 질문,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

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겠느냐?" 에 대해서 20세기의 가톨릭 교

회는 1세기의 베드로의 고백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 ’The Faith of Millions(억만인의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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