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인(神人) 신앙은 가톨릭 종교 생활의 힘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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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2-24 | 조회수580 | 추천수1 | 신고 |
가톨릭 종교 생활에 대한 오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과 일치 하는 것을 영적 생활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어느 프 로테스탄트 논자(論者)가 초대 그리스도교도의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 한 인격적 신뢰였던 것을 가톨릭 교회가 법적 관계로 타락시켰다고 쓴 것을 보고 나는 아연 실색하였다. 도대체 이러한 논자(論者)는 가톨릭 종교 생활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항상 이 인격적 감화 대신에 성서의 문자를 가지고 논하는 어리석음과 잘못을 주장하고 있는데 말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 성범’의 역자(譯者) 나카야마 씨는 그 서문 중에 "일반 독자는 제4권 ’존엄한 성체 성사에 대하여’는 도저히 인내를 가지고 다 읽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처럼 일면만 보 는 그리스도관에 사로잡힌 현대인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것은 적절한 평이다. 위에 말한 논자(論者)같은 경우는 정확히 나카야마 씨가 지적한 일반 독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평소 개신교의 쟁쟁한 어느 명사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원문 번역을 가지고 와서 "이 책 중 제4권은 가장 중요하며 이것을 도외시하고는 ’준주 성 범’의 진가를 알 수 없다. 요컨대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식으로 읽어서는 알 수 없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비로소 이해된다." 라고 말하여 나에게 크게 용기를 주었다. 개신교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사람의 입에서 이러한 말을 듣고 또 한 그러한 사람에 의하여 번역되어 이와나미 서점에서 출간된다고 하니 사뭇 "천국은 가까워졌다."는 감을 금치 못한다.
신인(神人) 신앙은 종교 생활의 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본체적 일치 결합에 대한 신앙은 모든 종교 생활의 이상인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결합의 살아 있는 전형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이상을 향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모든 진정한 종교 적 요구가 지향하는 것은 사람의 영(靈)과 하느님의 영(靈)의 융합 일치 바로 그것이다. 본체적으로 하느님과 결합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복한 하느님의 직관과 지상 생활 중에 나타난 수난과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한 희생 적 사랑을 통하여 얼마쯤이라도 우리 마음에서 원하는 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현세에만 한정된 인간의 생애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된다. 그러나 이 두 가닥의 실은 서로 엉켜 있어도 고통은 즐거움이 아니며 서로 배제하여 슬픔 을 기쁨으로 바꿀 도리가 없다.
종교 생활은 이 참기 어려운 제한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 에게 "나는 너희를 즐겁게 하여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고 "너희에게 평화를 준 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요한 14, 27)고 덧붙이셨다. 가장 괴로운 희생 생활을 하며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라는 자각에 의하여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평 안이 마음 속에서 우러난다. 고통의 눈물이 변하여 감사의 눈물이 된다. 이리하 여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지복한 생활과 인간의 인내와 생애와의 융 화는 그 제자인 우리도 모방할 수 있는 것이다.
죄로 더럽혀진 인간 중에 우리의 모든 번민을 완전히 이겨 낸 순결한 한 사 람이 있다. 그 사람은 인성과 신성이 일치되어 뗄 수 없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인류 모두는 그 얼마나 영광이며 자랑이겠는가. 절대 완전한 하느님은 사람을 통하여 만드신 세계와 접촉하시며 인성을 통하여 모 든 것을 구원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 다리고 있습니다." (로마 8, 19).
모든 사람이 하나같기를 바라는 마음, 아버지가 자신을 꼭 닮은 자식을 보려 고 하는 마음, 어머니가 아름다운 딸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심정, 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순진한 마음, 나아가서 걸출한 자를 가문의 영광으 로 여기는 관습은 형제 중 장형(長兄)인 그리스도에게 끌어당기는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종교 생활의 이상은 단지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 있는 같은 무리 중 한 사람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고 이는 얼마 나 위로와 힘이 되겠는가.
그리스도 출현 이전에도 고상한 이상이나 교훈은 결코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의 단순한 희구나 추상적 명사에 지나지 않고 그것 을 가르친 사람들조차 애석하게도 이상을 실현하기가 어려움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힘이 그 외 모든 인조(人造) 종교를 능가하는 근본 이유는 그 가르치는 이상이 살아 있는 현실로서 주어지는 점이다. 예수 그리 스도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은 자칫하면 그 도덕은 취하나 도그마(dogma) -교리- 는 필요없다든 가 그 종교적 천재는 인정하나 교회적 신앙은 아무래도 좋다고 말한다. 그리스 도교는 그렇게 마음대로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으 면 그대는 헛되게 껍질을 안고 그 안의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 은 그 좋은 예이다. 그 외의 복음서는 역사적 인물을 종교적 상상이 색칠한 것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색칠로 하여 복음서를 만든 사람들이 주인공 그리스 도 이상의 인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과는 깨닫지 못하는 것 같 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헐뜯을 수 있어도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적 사실을 설명하 기 위하여는 이 외 바꿀 수 있는 다른 위대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어디까지 가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위대함은 어디서 왔는가. 마태오, 루가, 마르코, 요한 혹은 이들의 이름에 의하여 대표되는 많은 사람들 내지는 초대 교회의 신도 전체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신앙은 왜 세계적 가치 전도 운동을 일으킬 정도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 나는 이 의문에 대한 철저한 회답을 앞서 말한 것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듣고 싶다. 그 리스도교는 역사적 사실이다. 누구도 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그 근 원에 신인(神人)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면 모든 것은 쉽게 설명되고 그렇 지 않으면 모두가 알 수 없게 된다. 이 점에 관하여 옛날 성 아우구스티누스 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고 있다.
"만일 그 근원에 기적이 없이 그리스도교가 성립한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가 성립하였다는 것 자체가 모든 기적 이상의 대기적이다."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갈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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