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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은 왜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가? - (2)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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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2-25 조회수3,779 추천수4 신고

 

-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하느님의 어머니에게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신앙이 이토록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

거의 명확해졌다고 본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성모 마리아에 의

해서이다. 가톨릭 신앙에서 성모 마리아가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

다. 그리고 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면서 그 어머

니 마리아를 말살하여 버린 프로테스탄티즘은 너무나 부자연하다. 성모에 대한

반동적인 편견(偏見)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반항교(反抗敎)

이다. 즉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反抗者)로서, 스스로의 독특한 근거를 가

진 주의도 주장도 아님은 물론이다. 존재의 유일한 이유를 반항의 대상인 가톨릭

의 존재에서 얻고 있는 2차적인 것은 명백하다.

 

 루터는 가능하면 로마 교회를 쓰러뜨리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설사 쓰러진다면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같이 쓰러지게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

던 것 같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만이 아니라 모든 적극적 내용을 가지지 않는

주의 주장의 운명이다. 프로테스탄트가 가진 모든 적극적 요소는 보다 풍부하게

그리고 완전히 가톨릭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의 적극성을 가진 경건한 신

자가 다행히도 그 편견을 버릴 수 있는 기회에 접하면 흔히 가톨릭으로 돌아오는

이유이다. 앞서 글에서 기술했듯이 영국 성공회의 천재 학자 헨리 뉴먼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던 ’옥스퍼드 운동’ - 초대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결

국 참여자 모두 로마의 품에 안기게 되었던 기념비적인 운동)- 과 영국과 미국의

걸출한 석학과 대문호들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로마로 돌아오고 있는 사실은 좋

은 실례(實例)이다.

 

 이에 반하여 부정적 경향으로 철저하게 나가는 개신교 신자는 무신앙이 되든가

좌경 운동에 몸을 던지게 되는 것을 흔히 본다.

 

예컨대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 일본의 유명한 개신교 지도자로 무교회주의를

주장했으며 한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개인

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영이 거하기에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필요없다고 해서 무

교회주의를 주장했던 故 함석헌 목사가 있으며 그보다 덜 유명하지만 김교신(金

敎信)이라는 목사도 있다) 문하의 우경파(右傾派)에서 가톨릭이 나오고 좌경파

(左傾派)에서 "이단자"가 배출된 것은 그 명확한 논리이다.

 

전자는 우치무라 씨의 권위 대신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

들은 레싱의 Anti-Goeze에 있는 것처럼 "작은 교황은 그만두고 큰 교황으로

바꾸었다."로 하면 되는 데 반하여 후자는 우치무라 씨로부터 시작하여 반발적

으로 모든 권위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단지 그 중간에서 방황하는 온순한 군

자(君子)나 의지나 지능 면에서 철저히 밀고 나가지 못하는 무리들이 우치무라

씨의 강렬한 인격에 끌려간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라고 칭하여 복음적이라고 자

부할지 모르나 실은 반항적(反抗的)기분을 빼고서는 작은 교황에 의해 통솔된 사

이비(似而非) 가톨릭 교회이다. 참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자기의 종교적 경험

을 내세워 권력으로써 회중(會衆)에 군림하는 교황은 있을 수 없다.   

 

 

 

루터의 성모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모순은 성모에 대한 신앙에 관하여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

나 있다.  이 견지에서 루터의 성모관은 가장 흥미 있는 것이다. 1521년경 그가

바르트부르크 체재 중에 기초한 마니피캇 주석(Auslegung  des Lobgesanges Mari

as Magnificat)은 로마 교회의 마리아 공경에 대한 종론서(宗論書)이면서도 "지

극히 축복받은 동정" "주님의 다정한 어머니"의  찬양, 특히 마리아의 신앙(물론

루터적  의미에서)과 겸손에 대한 찬미의 우아한 말을 늘어놓아 그가 후에 배척

한 전구(轉求)도 반대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사도 신경에 따라 그리스도 탄생

후 마리아의 동정을 인정하고 1522년에 출판한 기도서 중에는 성모송을 보전하였

을 뿐 아니라 파계 이전에 그가 속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전통을 지

켜 1527년경까지는 (당시 아직 교회의 도그마로서 선포되지 않았다.) "성모의 무

염시태(無染始胎)"도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가톨릭적 신앙은 "마리아는 영험(靈驗)이 뚜렷한 여신이 아니다

(Keine helfende Gottin)." 라는 등 조롱하는 말로 상처를 주고 있다. 아름다운

성모에 대한 존경은 단지 로마 교회의 특징이라는 이유로 해서 "개혁된 교회"로

부터 쫓아냈다.

 

 

 

성모 없는 교회와 인류의 고민

 

그러나 예수가 있는 곳에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없어서는 맞지 않는다. 아들을 참

으로 사랑하는 이상 그 어머니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마리아를 찾는 소리는 과

연 공허해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일어났다. 내가 영국 체재 중 이른바 개혁자

가 열심히 파괴한 오래 된 교회의 마리아 상이 새로이 복구된 것을 본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 어머니를 축출한 불효자의 대표적 외침을 번역하여 본다. 이것

은 1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 11월 19일 기도의 날에 마크스 융그니켈이 베를

린 일간지 Die Post에 기고한 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복음 교회는 차가워졌다…. 누가 이것을 따뜻하게 해 줄 것인가…. 우리는 어머

니 마리아를 다시 모셔와야 한다. 이것은 결코  대담한 희망이 아니다. 루터 자

신도 이것을 인정하여 줄 것이다. 그는  바르트부르크에서 마니피캇 주석을 쓰

지 않았던가. 지극히 축복받으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어머니는 파도를  헤쳐

가는 그의 마음의 방주(方舟) 위의 비둘기 같은 것이 아니었더냐.  우리는 어머

니 마리아를 모셔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어머니의  귀향을 축하하자.

그렇다. 어머니는 결국 우리  교회로 돌아오셨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기도하며

노래 부르자. 또 어머니의 거룩하신 결백을 교리 문답 속에도 짜서  넣자….

리에게 빠진 것은 성모 마리아다. 우리는 그녀를 다시 모시기를 원한다. 그리하

여 그녀는 우리 교회의 차가운 돌 속에서  장미꽃과 같이 피어날 것이다.  Ich

grusse dich, holdselige Mutter!

 

 

 

또 하나, 가톨릭 교회 밖에 있었던 사람들의 성모 신앙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일화이기에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몇 년 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쪽의 조용한 자그레스차 광장, 독일

인 묘지로 삼목과 유칼립투스 노목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마침 소아시

아에서 돌아와 그 견문을 들려주던 한 노인과  산책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톨릭

사제가 때때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 때도 그러하였다. 교회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고 막연히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온 이 사나이는 가톨릭 사제에게 그

마음 속을 털어놓아야 할 부득이한 형편이 되었다. 설사 그 사람이 아무리 비참

한 인간적 약점의 소유자라도 그에게 필요한 냉정과 침착한 마음만 있으면 가톨

릭 사제에게는 비신자나 타종파 신도까지도 이상하게 신뢰를 느끼게 하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신성과 품위가 그 신분과 생활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경험을 되풀이한 일이 있다. 또한 같은 사제직에 있는 내 동료들도 여러 가지 경

험에서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저녁에도 이 신뢰에  용기를 얻어 세계를 돌아보고 다닌 범신론자인

그가 나이도 훨씬 아래며 서로 내면적으로는 전혀 교섭이 없는 나에게 마음속을

털어놓아 주었다. 대화 도중에 그는 별안간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믿을

수만 있다면 가톨릭 신자가 되겠소.  왠지 아십니까. 정결한 마리아의 신조 때문

에…." 나는 전연 의외였다. 이것만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어찌하여 정결하신 하

느님의 모친에 관한 도그마가, 이전에 가톨릭 신자였던 경험도 전혀 없고 범신론

자가 되어버린 북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가톨릭 교회의 애호가로 만든 것인가.

내가 노골적으로 놀라움을 나타내자 그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만일 교회의 도그마가 진리를 전한다면 이 신조 때문에 인류에게 일찍이 적어

도 한번은 그리스도처럼 인간이었으며 동시에 하느님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었으며 또한 죄로 더럽히지 않은 한 영(靈)이 현재에도 있다는 것을 확실

히 알 수 있다고 나는 당신에게 단언하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당히 넓

게 세상을 보고 인류의 죄악의 더러운 흐름을 배워 알았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죄악의 탁류에 일찍이 한 방울도 더럽히지 않았던 한 영(靈)이다.우리

는 우러러볼 수 있는 죄 없이 순결한 영(靈)을 가지고 싶다. 인간의 신

뢰를 얻기 위하여 다행히도 믿을 수 있는 순결한 당신네 가톨릭의 성모

를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다."(크레브스 박사, Dogma und Leben, I, SS. 47

7-479).

 

 

 

성모 공경은 가톨릭의 힘

 

 종교 생활의 궁극의 이상인  신인 합일(神人合一) 이란 살아  있는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은 그리스도교의 힘이요 생명이다. 이처럼 표현된 아담의

자식들의 마음속에서부터의 소원이 상상에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성모 마리아에

게 실현되었다는 신앙은 가톨릭 교회의 힘이요 오래 된 교회로 하여금 영원히 젊

고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하여 주는 연유이다.  그리스도교로부터 오래 된 교회에

서 길이 번영한 이 성스럽고  정결한 모성애를 내던져 버린 개신  교회는 불쌍한

고아로, 마크스 융그니켈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차가운 돌덩어리가 되어 버렸

다. 그가 부르짖은 대로 성모의 신앙은 이 돌 사이에서 장미꽃처럼 피어나 가엾

은 고아의 마음을 따뜻이 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성모의 집은 옛날처럼 오래 된 교회로서 새 교회는 아니다. 성모를 되돌

아오게 하는 것은 결국 로마 교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독일의 호흐 키

르케(高敎會派, High Church) 운동이 루터에게 돌아간다고 하며 사실은 로마

로 돌아가고 있는 연유이다.

 

 성모 공경은 사람이 된 하느님이신 예수의 전통적 신앙에, 그리하여 하느님이요

인간인 예수의 신앙은 그 친히 세우신 유일 무이의 세계적 교회에 대한 신앙으로

까지 이끌어 가야 한다. 이 3자를 연결하는 불가분의 관계는 앞서 말한 네스토리

우스의 이단 이래, 전통 교회 내에 점점 깊게 인식되어 왔다.  가톨릭 교회는 오

늘도 축복하며 노래 부른다. "당신 혼자 모든 이단을 멸망시키셨다(Tu sola interemisti omnes haereses)."  성모에 관한 신조는 결코 있어도 되고 없어

도 되는 그리스도교의 부가물이 아니라 이것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교는 성립하지

않는 계시의 중요한 일부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근본 신조에 관한 오해는 필

연적으로 성모에 대한 오해가 된다. 이에 반하여 성모 공경의 올바른 이해는 이론

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전체적 파악에까지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

있고서 아들이요 하느님의 아들 있고서 성모이다.

 

 

성모와 일본 가톨릭 교회

 

 이 소식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가톨릭 교회 부활의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

하는 다음의 아름다운 일화에도 나타난다. 우라가와 와사부로(逋川和三郞) 신부는

그의 저서 ’그리스탄(切支丹)의 부활’(가톨릭 간행회 출판) 중에 게이오(慶應) 원

년(1865년) 나가사키(長崎) 천주 교회에서 옛 신도의 후손이 발견된 경위를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3월 17일 금요일 낮 12시 30분경 남녀 노소 14, 15명의 참관자가 천주교회 문 앞

에 서 있었다. 뭔가 달라 보이는 태도는 아무리 보아도 호기심만으로 온 것으로

는 보이지 않는다. 프티 장 신부는 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하여 마음속으로 하느님

의 축복이 그들에게 내리기를 기도하면서 중앙 제단 앞에 무릎꿇었다. 주님의 기

도를 성체 앞에 드리고 "참관자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 있는 말을 할 수

있게 하시어 이들 중에서 주님의 예배자가  나오게 하소서." 하고 열심히 묵도하

고 있었다. 그런데 50에서 60세 정도 되는 부인  세 사람이 신부 옆에 가까이 와

서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그 중 한사람이 가슴에 손을 대고 아주 들릴까 말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인: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신부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신부: "정말입니까?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당신네들은?"

부인: "우리들은 모두 우라가미(浦上) 사람들입니다. 우라가미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와 같은 마음들입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곧 "성 마리아의 성상(聖像)은 어디에 있지요?" 하고 물었

다.

 

"성 마리아!"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말로 옛 신도(200여 년간 박해를 받

았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며 프티 장 신부의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찼다. 5년간 참담하였던 고심도 순간에 잊고 부모와 만났다고 기뻐하는 자녀들에

게 둘러싸여 성모상 앞에 무릎 꿇었다. 모두 다 무릎 꿇고 무엇인가 기도하려고

하였으나 너무나 기뻐서 기도가 되지 않았다.

 

 

부인은 "그래요! 참말로 성모님이십니다. 어머나,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십니다."

라고 말하며 일단 신도임을 밝히고 나서는 마음놓고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하

느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 본다. 특히 어린 아기 예

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보고 그 강생의 축일을 생각해 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짓달 25일 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예수님은 그 날 자정에 마

구간에서 태어나시어 고난 속에서 성장하시고 33세에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

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듣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침 그 수난의 시기입니

다만 신부님도 그것을 지키십니까…" (전편, pp. 225-226).

 

 

 

 

 

200여 년 박해 기간 동안 고통받은 영혼들의 동경의 대상은 실로 이 "예수 아기

를 안은 성모 마리아"였다. 학대받은 그들의 마음속에 은근한 희망은 마리아 관

음(觀音)처럼 나타났다. 이 불교적 형식으로 압제자들의 눈을 속여 겨우 마음의

갈증을 달랜 그들의 심정은 애처로워 눈물겨울 지경이다.

 

 우라가와 신부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로, 오우라(大浦) 천주 교회를 보러 온 우

라가미의 신자 중 어떤 이는 수년  전에 히가시야마테(東山手)의 거류지 내에 세

워진 개신교 교회를 찾아갔었다. 지붕 위에 높이 솟은 십자가는 그들의 탐험심을

돋우었다. 친절한 목사님이 교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성모님이 없

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당에 있어야 할  마돈나가 목사관에 있으니 놀러 오

라고 초대하는 바람에 실망과 놀라움 속에 도망쳐 나왔다(같은 책, pp.330-331 참

조). 그들이 어찌 성모 없는 교회에 돌아올 수 있겠는가. 사면 초가 속에서 긴 긴

세월 고통과 번민 기간을 거쳐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그 눈물을  씻어준 분은

그 자비로우신 어머니가 아니었더냐. 그들의 조상은  그 성스러운 이름을 부르면

서 천국으로 가 자애로운 품안에 안기는 날을 애절히 바라면서 포악 무도한 처형

도 감수하고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아, 그들이 어떻게 어머니 없는 공허한

교회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잠깐 성모 찬미가 ’마니피캇’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를 떠난 프로테스탄트 형

제들의 가엾은 처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성모께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

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약속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루가 1, 42-45)

 

성모와 엘리사벳이 주고받는 인사를 보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먼저 인사하였

다. 주님의 묵계(默啓)를 받은 성녀 엘리사벳은 사촌 동생 마리아가 온 것을 보고

놀라 감격하여 마리아의 믿음을 찬미하며 그를 복되다고  하였다. 또 태중에 계신

아들 예수를 아울러 찬양하자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요한까지 뛰놀았다. 성령을

가득히 받은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께 드린 이 격외(格外)의 존경은 인간의 자연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계시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령

을 가득히 받은 엘리사벳이 손아래인  마리아에게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하는 황송해 하는 태도와 공경의 태도를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은 주시

하라!

 

이 존엄한 예찬을 받으신 성모 마리아는 저 유명한 ’마니피캇’의  노래로 대답하였

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

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루가 1, 46-48)

 

성령께서 마리아의 정결하신 입을 빌을 빌어 장차 온 세상의 사람들이 그를 ’복된

이’라고 할 것임을 예언하셨으며 이는 그가 받을 모든 찬미에 대한 시인이다.

 

 아, 얼마나 과감하고 엄숙한 예언인가! 성서에 기록된 모든 예언 중에서 이보다

더 우리의 흠숭을 자아내는 것은 없다. 멀리 세계 문명의 중심지를 떠난 시골 마

을의 한 정숙한 처녀가 받을 온 세상 사람들의 찬미에 대한 예언 - 하느님의 감도

(感導)로 쓰여진 복음 성서에 엄연히 자리잡은 이 예언의 실현을 의심할 이가 누구

냐. 세계 만방에 밤낮으로 ’마니피캇’이 낭송되는 오늘날 이 예언의 진실성을 의심

할 자가 누구냐. 마리아를 복된 이라고 찬양하여 그 예언을 성취시키고 있는 이는

곧 가톨릭 신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 사랑을 받는 유일한 교도(敎徒)

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가톨릭 교회의 찬미를 비웃으며 혹평한다.

그들은 마리아를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 부르지 않고, 다만 ’처녀’ 혹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라 부른다. 그들은 마리아의 입을 빌어 하신 주님의 예언, 즉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다"라고 하신 ’온 세상’ 사람의 마리아 찬양 대열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구약의 사라, 레베카, 에스델, 유딧과 신약의 엘리

사벳, 안나, 막달레나, 마르타 같은 부인들은 예배당 안에서 큰소리로 찬미하면서,

구세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에 대하여는 ’마리아 숭배’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부르기를 주저한다. 모순도 모순이려니와 정말 기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은 자녀에게 영예가 된다. 어머니의 얼굴을 둘러싼 빛은 자녀

의 얼굴에 반영되고 어머니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자녀의 영광도 더욱 빛나는 법이

다. 자기 어머니를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가 없는 뭇사람에게도 그렇거늘, 하물며

당신 스스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선택하시고, 당신 어머니의  모든 영광이 곧 당신

자신의 영광이 되도록 마음대로 창조하신 주 예수께 있어서랴.

 

 프로테스탄트 목사들 가운데는 마리아의 성덕을  알지 못하고 그 특별한  지위를

무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성모 공경 행위가 무슨 성자께 욕이나 되는 듯이 성모를

훼방하기를 낙으로 삼고, 무엄하게도 성모를 죄인이라고까지 한다.

 주께서 과연 불명예스러운 죄인을 당신 어머니로 삼으셨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주께 영예스러운 일이 되는가  수치스러운 일이 되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성모를

모욕함으로 성자 예수를 모독함은 매우 심한 독성 행위임을 깊이 깨달으라.

 

 이런 성모 모독자들은, 크리스찬 행세도 별로 하지 않던 시인 올리버 홈즈 -그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의 성모 찬가를 들어보라.

 

 

 

 

그대 이름 마리아런가, 아리따운 아가씨여,

 

거문고 소리처럼 내 귀에 울리나니,

 

인간 중에 가장 어여쁜 이름이여

 

그대밖에 누구에게 그 이름 어울리랴,

 

일찍이 그로써 불리신 아가씨는

 

세상에 태어나신 하늘 나라 사람이었나니.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할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대도(代禱)를 간구

한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천상의  천사들과 성인들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 도와

줄 수 있거늘, 하물며 그들을 초월하신 성모 마리아의 우리를 위한 기도야말로 그

얼마나 힘있는 것이겠는가. 지식도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성덕이 천상  성인들을

초월하신 마리아가 지니신 지식 또한 그들을 초월한 것일 것이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

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사도 7, 55)고 하였다. 바오로 사도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2고린 12, 4)을 들었는데, 하물며 지금

천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마리아께서 우리의 현재 상태와 바램을 밝히 보지

못하실 리 있겠는가. 성인들에게는 하늘에서 지상의 사정을 보거나, 지상에서 하늘

의 사정을 보는 것이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다. 성모 마리아의 대도(代禱)의 힘은

천상의 모든 천사와 성인들과 예언자들의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다. 이는 성모

의 은총 지위가 그들보다 단연 탁월한 까닭이다.

 

 하느님께서 종들의 기도를 그와 같이 인자하게 들어주실 바에야, 아들의 어머니요

가장 사랑하는 딸이신 동정 마리아의 간구를 거절하실 리 있겠는가. 죄인인 우리도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서로 도와 줄 수 있는데, 모태에서부터 천사들의 노래 가운

데 싸여 영광으로 승천하실 때까지 한결같이 결백하신 성모 마리아의 기도의 힘이

야 얼마나 크겠는가.

 

 마리아는 어머니의 권위를 행사하셨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

다.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였다."(루가 2, 51)라는 기록을 보라. 또 가나 마을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신 사실을 보라. 성모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시

자,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다.

 

 마리아께서는 ’예수의 어머니’ 라는 존칭과 권위를 하늘 나라에서도 그냥 지니고

계신다. 그가 하늘 나라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으로 공경하시지만 모자 관계는 그대

로 지속된다. 그러므로 성모의 기도는 예수께서 틀림없이 들어주신다.

 

 하느님의 지고 지엄(至高至嚴)을 알고 자신의 지비지천(至卑至賤)을 아는 우리는

인자하신 성모께 의탁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인인 우리로서 하느님께 직접 기도하

느니보다 성모의 전구(轉求)의 크신 힘에 의탁하는 것이 허락받기 쉬운 길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신자가 아니었던 시인 롱펠로우도 성모의 전구(轉求)에 대하여

이렇게 읊었다.

 

 

 

너무도 너그러운 아버지를

 

너무도 노엽게 한 아이들이

 

너무도 부끄럽고, 뉘우치고, 그러면서도

 

혼자 감히 그 앞에 나아갈 면목 없어서

 

문 앞에서 누나에게 고백하고 부탁하여

 

먼저 가서 빌어 주기를 기다리듯이

 

사람들은 악행을 뉘우치면서도

 

노하신 아버지의 귀에 가까이

 

하소연을 사뢰려 당돌하게 못 나아가

 

마리아께 기도와 고백을 드릴 제

 

하늘의 성모께서 대신 빌어 주시도다              Golden Legend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를 도와 주실 능력은 지니셨겠지만, 과연 우리를 사랑하는

의욕까지 가지고 계실까, 혹은 하늘 나라 영복의 바다에 잠겨 있는 그가 과연 비

천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까 하는 걱정을 품을 만도 하다. 그러나 "여인

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이사 49, 15). 비록 성모께서 하늘 나라의 영

복 속에 계실지라도 결코 우리를 잊으실 리가 없다.

 

성모께서 양자(養子)인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예수께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기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먹고, 마리아가  

지어 준 옷을 입고, 마리아의 품안에서 폭군 헤로데의 칼날을 면하였으며, 십자

가 위에서 운명하신 뒤 다시 마리아의 무릎 위에서 얼굴의 피를 씻기우셨다.

 

 우리는 예수의 형제들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거리낌없이 형제라고 부르신다고

바오로는 말한다.(히브 2, 11 참조). 성모께서도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우리를

’아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성모 마리아는 십자가 위에서 요한 사도를 대표로 온 인류를 당신 아들로 삼으셨

으므로(요한 19, 26 참조) 예수를 사랑하시던 그 지성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위하여 온갖 힘을 다 쓰신다. 성모는 곧 하느님과 한 손발로, 은총으로 우리를 먹

여 기르시고 깨끗이 씻어 주신다.

 

 우리와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인 천사들도 우리를 몹시 동정하며 죄인의 회개를 보

면 기뻐하시는데(루가 15, 7참조), 어찌 같은 조상의 후손이며 같은 혈육을 가지고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고(人間苦)를 다 맛보신 성모 마리아께서, 불쌍한 당신 아들인

우리를 깊은 동정과 자애로 돌보지 않으시랴.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시인 애드거 알렌 포우조차도 하늘의 성모께 기도드리기

를 꺼리지 않았다.

 

 

 

아침에나!  낮에나!  황혼에나!

 

마리아여!  나의 노래를 들으셨나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언찮을 때나

 

천주의 성모시여, 나와 함께 계시옵소서

 

내 시절이 찬란하게 피어 오르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안 가리웠을 제

 

내 영혼이 곧바로 걷기 위하여, 그대 은혜는

 

아드님과 그대께로 나를 인도하셨나니

 

시방 운명의 사나운 비바람이

 

오늘과 어제를 어둠으로 덮을 제도

 

내 앞날을 빛나게 밝혀 주소서

 

그대와 아드님의 따뜻한 희망으로.

 

 

 

"성모께 기도드리는 것은 무익할 뿐 아니라, 피조물을 창조주 하느님과 동등하게

대하는 독성 행위다"라고 하는  이가 있다. 가톨릭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망발도 나오는 법이다. 「천주교 요리문답」을 읽은 신자라면 그 누가 하느님께만

드릴 흠숭지례(欽崇之禮)를 피조물에게 바치겠는가. 우리는 또 마리아를 한 피조물

로 인정하고 마리아가 누리는  모든 특권은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성모께 대한 존경을 분명히 구별하는 이상, 마리아

의 전구(轉求)를 간청하는 행위가 어찌 하느님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가톨릭 교회의 기도문 양식을 보아도 밝혀지는 사실이다.

마리아께 기도할 때는"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라고 한다. 이는 인자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성모께서 ’대도(代禱)’해 주시기를 부탁하는 말이다.

하느님께 기도할 때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한다. 이는 곧

자비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대한 직접 기원이다.          

 

 주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권을 주신 것처럼 나

도 너희에게 왕권을 주겠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옥

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루가 22, 29-30)라고 하

셨다. 또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천사들까지도 심판하게 될 것을 모르십니까"(1고

린 6, 3)라고 하였다. 만약 사도들이 하느님의 권위를 손상하지 아니하면서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다면, 어찌 은총이 충만하신 성모 마리아

께서 하느님의 권위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시면서 우리의 대언자(代言者)로서 주

님 앞에 서지 못하시겠는가. 사도들이 예수의 심판권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열 두

지파를 심판하고, 또 천사들까지도 심판하는 무서운 권위를 지녔다면, 어찌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아들의 지존하신 대언권(代言權)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대

언자(代言者) 노릇을 하실 수 없겠는가.

 

 심판관의 직권은 대언자의 직권보다 더 크다. 주님의 제자들이 심판권을 갖는 것

에는 놀라지 않으면서 마리아가 대언권을 갖는 것에는 시비를 가리려 드니, 대체

무슨 심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성모 마리아의 탁월하신 특권은 우리가 마땅히 공경하여야 하며, 그 거룩하신 전

구(轉求)의 힘에는 사랑으로 매달려야 하며, 그 성덕의 생활은 반드시 힘써 본받아

야 한다.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를 이처럼 찬양하고 공경함은 그가 하느님의 어머

니라는 특권을 지녀서라기보다, 또는 우리를 위한 그의 전구(轉求)의 힘 때문이라

기보다, 차라리 그의 성덕 수범(聖德垂範) 때문이다.

 

 사회나 가정이나 개인 성화의 원동력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온 인류를 선도하

시는 분은, 주 예수 다음에는 성모 마리아뿐이시다. 성모는 특히 온 가톨릭 사회의

자모(慈母)이시다. 보라! 아무리 허술한 성당이라도 성모 마리아의 성상(聖像)이나

그림을 받들지 않는 성당이 어디 있으며, 또 마리아의 성화를 모시지 않은 신자 가

정이 어디 있는가. 성직자든 평신도든 빈부 귀천도 현우(賢愚)도 따질 것 없이 다

성모의 자애로우신 권능과 은덕에 승복한다.

 

 가톨릭의 힘으로 이교(異敎) 세계가 교화(敎化)의 빛을 받게 되자, 부부의 믿음과

사랑, 부녀자의 정덕(貞德)과 여성의 지위가 현저히 향상되었다. 이는 오로지 성모

마리아의 성덕의 힘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 여인을 간택하여 당신 어머

니로 삼으신 놀라운 사실이 일어난 이래, 남자가 여자를 노예처럼 대하는 불의가 없

어졌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여자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에서 이처럼 성모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권장하는 것은 성모께서 아드님의 가

장 완전한 거울이 되시는 까닭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로서

시인 롱펠로우가 성모의 성덕(聖德)을 찬양하며 다음과 같이 읊조렸듯이 다같이

겸손되이 우리의 시(詩)를 읊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곳은 참으로 복된 땅!

 

동정녀요 경애하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땅!

 

모든 마음은 그 이름 앞에 오직 감동되고 부드러워지나니

 

손에 피묻은 산도적이거나

 

사제거나 왕후거나 선비거나 농부거나

 

실행하는 사람이나 꿈을 쫓는 사람이나

 

오직 그를 받들어 섬기도다!

 

 

 

비록 우리의 믿음으로 얻어 가지는 바가

 

온 여인 가운데 모범되시는

 

온순하고 인자하고 굳세고 선하고

 

참을성 있고 평화스럽고 충성스럽고

 

자애와 순결의 본보기이신 그대 한 분뿐일망정

 

예로부터 알려진 모든 신조보다도 더욱 숭고하고

 

진리임을 증거하기에 넉넉하나이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과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의 ’교부들의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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