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129]추가 답변- 진리와 관용의 정신에 대해서 | 카테고리 | 천주교 | ||
---|---|---|---|---|
이전글 | [127답]참나무는 신탁나무 |1| | |||
다음글 | [질문]로마서와 관련된 의화의 의미를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 |||
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2-26 | 조회수1,476 | 추천수2 | 신고 |
안젤로입니다.
아래 승근배님이 답변을 신경써서 잘 해주셔서 저로서는 더 이상 덧붙일 내용 은 없습니다. 대순진리회니 증산교니 하는 우리 나라의 자생적인 민족 종교에 대해서 저는 그 속사정이나 역사적인 부분에 대해 승근배님께서 이야기하신 것만큼 잘 알지 는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제가 말씀드릴 것은 가톨릭 신자 중에서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한 이들 가운데 유독 그런 사이비 종교 내지는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승근배 님이 언급하신 내용 중에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어서 정중히 말씀드립니다.
’모든 종교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 또는 모든 좋은 종교는 진리와 영적 힘이 있 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듯해도 그 말 속에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지 고 있습니다. 종교 진리도 다른 과학적, 수학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과학과 수학의 자연 법칙에만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고 종교 진리는 제 각기 다른 종교마다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할 그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 다. 각 종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다 선하지도 모두 다 악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부인 못할 엄연한 사실이며 가톨릭이라고 해서 신자들 모두가 선하다든지 아니면 인간적 결함에서 해방된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의 진리를 놓고 본다 면 오직 한 가지의 종교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을 뿐 나머지 종교에는 진리란 없 습니다. 진리로 위장한 허위와 오류가 있을 뿐입니다. 물론 제 2차 바티칸 공의 회의 정신이 타종교에 대한 상호 이해와 관용의 정신을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가톨릭 신자가 자꾸 혼동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다른 종교를 보는 관점은 타 종교의 좋은 일면을 보자는 것이지 그 종교가 진리 를 갖고 있다거나 가톨릭도 인간이 만든 종교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다원주의적 견해는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지금의 교황이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지적하신 바 있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신자들의 영적 생활과 선교 활동에 많은 혼란을 초래한 점을 우리는 명심 해야 할 것입니다. 타종교가 진리가 아니어도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들도 하느 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우리도 형제애적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고 그들과 상호 이해를 도모하겠다는 것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 본 정신입니다. 가톨릭이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기에 타종교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 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가톨릭 신자가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 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 밖에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만이 유일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종교인을 인격적으로 비난하거나 힐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교사가 질문에 옳게 대답한 학생만 사랑하고 틀린 대답을 한 학생을 미워한다면 그 교사는 어딘가 모자라는 사 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종교가 비록 오류라는 것 을 인정하고서 그들을 대하더라도 그들을 비난하거나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그들의 무지와 편견일 뿐 그들의 인격이 아니라는 점을 바티칸 공의회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그 현상적인 결과는 신자들의 신심 약화와 더불어 새로운 선교 지역 -아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특히 한국, 중국 등- 의 신자 수의 증가 추세 감소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앞서 저의 글 -종교 무차별론의 허구성 (1), (2)-에서 이미 거듭거듭 말씀드렸거니와 종교 무차별론의 근원 사상 은 바로 루터 그 사람의 사적 자유 해석주의 즉 개인이 생각하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주관주의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철학의 기본 토대가 되었음 은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가톨릭은 여전히 중세로부터의 토마스 데 아퀴노의 방식인 토미즘 -일체의 주관을 배제한 채 오직 객관적 사실에 만 입각해서 지성의 승복을 이끌어 내는 주의- 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 대인에게는 매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객관적 실재의 중요성을 깨닫는 지성인이라 면 누구나 찬탄해 마지 않는 훌륭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신앙에 대해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 자처럼 진리의 빛에 이끌려 교회 안의 제대까지 돌진해 가던지 아니면 진리의 빛 을 스스로 등지고 다른 헛된 길을 찾아 가던지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 인간 없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은 우리 인간의 협력 없이 이 세상을 구 원하시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제 독자들은 반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도 가톨릭이 진리의 종 교이고 다른 종교는 모두 헛소리이고 거짓되다면 어떻게 그 많은 종교가 존재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이 사랑하시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독자께 서는 무어라고 답해주시겠습니까? 물론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답해주시지 않 겠습니까? 종교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어느 분이든지 말입니다. 그럼 이번에 는 그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서 묻겠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분 이 왜 이다지도 많은 불행과 고통과 슬픔을 주시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분은 무어라 답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증오가 있어야 하고 행복이 있기 위해서 는 불행이,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슬픔이,환희가 있기 위해서는 고통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이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 국 진리가 진리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외의 것은 모두 오류입니다. 이것은 과학 철학의 기본 상식입니다. 만일 이것을 무시하는 발상으로 우리의 주변에 일어나는 자연을 바라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러한 오묘한 자연의 숨은 법칙을 그분이 한 가 지로 정해 놓으셨음을 보면서도 그분의 작품인 이 우주가 말하는 영원불변의 유일 진리를 말하는 가톨릭의 진리에 대해 그다지도 둔감하고 편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면 온통 진리만이 말해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인간 세계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계신 그곳 하늘 나라에 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주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을 찾아갈 수 있 는 심원한 종교심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에게 이성과 지성을 하느님이 주신 것을 인정한다면 또한 그와 더불어 자유 의지라는 귀중 한 선물도 같이 주신 것을 인정한다면 만일 진리가 하나라고는 해도 하느님이 인간의 선택권을 박탈해서 오직 하나의 종교 즉 가톨릭만 믿게 하고 다른 종교 는 아예 생길 여지도 주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앞서 말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에 대한 제한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도 모순되는 행동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고귀한 자유 의지를 존종하 시는 그분이 또한 진리와 오류를 구분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주신 그분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종교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다만 그분은 우리들이 수많은 헛된 종교에 빠져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하게 되지 않도록 그분만의 참 종교에 다른 종교와는 전혀 다른 인호를 박아넣었던 것입 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가톨릭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앞의 글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있는 종교 중 유일 한 신적 기원(神的起源)의 종교는 가톨릭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이성과 지성의 비추임을 받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 는 참다운 어머니의 품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삼덕을 생각해 봅시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사랑입니다. 그럼 왜 사랑이 제일 중요 하다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 세상과 하늘 나라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이며 우리가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 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주님을 뵙는 순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이제 거울 속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확실히 진리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우리가 영원한 하늘 나라에 있게 되는 그 순간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기에 소망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숱하게 필자가 아는 것 없이 글 을 올렸지만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진리와 오류를 혼동할 때 그것은 사랑도 관용 도 아니며 그저 눈먼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벌써 잊었단 말입니까?
제 이야기가 분명 지금까지 독자들께서 가지고 계신 다원주의적 종교관과는 맞지 않을 것이며 타종교가 그럼 전혀 진리라고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과 가톨릭의 진리라는 게 그 정도로 독선적일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시리라는 것 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진리는 가톨릭 안에만 있으며 그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증하셨기에 우리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로 불안해 하거나 다른 종교에도 진리 로 가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식의 다원주의를 운운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타종교가 진리가 없다고 해서 전부 사이비거나 이단이라고 몰아세울 이유도 그들의 인격적인 면을 깎아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는 우리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비교할진대 오류임에 틀림없다 는 사실입니다. 타종교의 교리 중에 수긍할만한 부분이 아예 없다거나 전부 거 짓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타종교인의 인격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아무런 악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면에 있어서는 수긍할 수 있 는 부분도 있으나 아닌 부분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번 예를 들겠습니다. 유니테리언 교파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고 일위일체설을 주장합니다. 이슬람교는 마리아를 복되신 이라고 칭송은 하면서 도 그 아들 예수는 하느님이 아닌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립니다. 최후의 위대한 예언자는 오직 마호멧 뿐이라면서 말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어떻습니 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로 흠숭한다면서 그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아예 무시합니다. 유대교는 또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짓 예언 자로 사기꾼으로 치부해버리고 아직도 유대인만의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 다립니다. 또 브라만교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범신론을 주장하면서 이 세상에 아트만과 브라만의 두 가지 존재의 순환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른바 ’내가 곧 절대자다’ 라고 주장합니다. 또 불교는 어떠합니까? 끝없는 윤회의 업보를 이야기하지만 해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 이 무로 끝난다는 것 이것은 듣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참으로 섬칫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적 심판의 개념이 없기에 그러한 상황에서는 도덕적 윤리의 어떤 기준이 성립되기 힘들다는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옥 영벌로 떨어지는 영원한 심판이 없다는 것이 인간의 죄의식 자체를 무디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뉴스 위크 지에서 서구 유럽에 아시아의 새로운 종교 즉 불교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주된 이유가 불교에서 이야기하 는 윤회니 업보니 하는 그 사상보다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인 심판과 죄의 보속에 대해 가슴 조마조마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불교만의 특이한 개 념이 내세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근심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하기에 맘이 아주 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도교처럼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겠습 니까? 20세기가 다 끝나가도 가톨릭을 제외한 그 어떤 종파 즉 성공회를 비롯한 그리스 정교, 프로테스탄트 각 교파들 중 어느 곳에서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성인은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왜 그런 것이겠습니까? 유일하게 기적이 일어나는 종교 그것이 바로 가톨릭입니다. 그런 기적은 그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지워질 수 없게 박아 놓은 인호를 가진 신적 기원의 종교에서만 볼 수 있는 즉 가톨릭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가톨릭의 역사적인 기적을 소개해 드린다면 그 유명한 가톨릭 호교 론의 저자 파스칼의 체험을 들 수 있습니다. 원래가 파스칼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 었습니다. 물론 가톨릭이 국교인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그 자신이 가톨릭에 입교 하지도 않았고 과학적인 견지에서 그는 종교를 비판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던 그 에게 사랑하던 질녀 페리에가 불치의 안질(眼疾)에 걸려 실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 었습니다. 그 당시 내로라하는 의사에게 보였으나 전혀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만 듣고서 파스 칼은 질녀를 요양시킬 생각으로 자기의 누이가 있던 수도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거 기서 수도원에 놓여있던 십자고상의 그리스도의 가시관의 한 모서리에 질녀의 눈이 닿자 즉시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보고 파스칼이 가톨릭으로 개종 해서 쓰기 시작한 가톨릭 호교론이 바로 그 유명한 팡세입니다.
그렇게 많은 종교가 다 진리를 전혀 가지지 않을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이렇 게 아래의 유비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오늘 당장이라도 실험해 보셔도 금방 아실 것입니다. 우주에는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질서 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점점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대법칙으로서 이것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맑은 물을 떠 놓고 검은 색 잉크 한 방울을 아주 조금만 떨어뜨려 보십시오. 그 다음에 그 물을 보고서 색깔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 한 번 보십시 오. 그렇게 미세한 잉크가 들어갔음에도 이젠 그 물은 순수한 물이 아닙니다. 설령 색깔이 많이 변한 게 아니라고 해도 이젠 마실 수 없는 물입니다. 그럼 이제 다시 한번 현실로 돌아와 봅시다. 도대체 순수한 물에 그 한 방울 잉크가 떨어진 것이 순수한 물이 아니라면 그럴싸한 포장 속에 진리의 조각조각을 이 리 저리 붙여 그 사이를 오류라는 접착제로 이어붙인 인조(人造) 종교가 도대체 진리라는 게 있기는 한 것입니까? 진리와 오류를 섞어 놓으면 진리가 오류를 덮어 가리워 줄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괴상한 이야기입니까?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조그마한 오류라도 그것을 진리에 덧붙이는 순간 애매모 호한 반진리(半眞理)로 되며 그것은 곧 오류일 뿐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루 터가 인간의 속은 원죄로 썩어 문드러진 그대로인 채 예수께서 십자가의 공로 로 외투처럼 인간을 감싸 덮어주신다는 이야기와 너무도 비슷하다는 것을 깨 닫지 못하십니까? 진리와 오류를 섞어 놓은 그 잡다한 인조(人造) 종교 백화점 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가장 불행한 곳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 는 기회를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교리는 접어두고 그 열매 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 되기까지 도대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것들의 시초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역사를 살펴보십 시오.
영국의 그 유명한 인권의 기초가 되었던 대헌장 마그나카르타가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인줄 알기만 한다면 그리고 미국과 프랑스의 인권 선언이 누구의 손 에서 만들어진 것인줄 알기만 한다면 그 사상이 도대체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알 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교 없이 현대의 세계는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너무 도 분명하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 현대의 세계가 로마의 이교 세계였을지 아 니면 회교국의 그것과 같은 숨막히는 정교일치의 형태일지 아니면 브라만교나 불 교국에서처럼 무지 몽매한 계급 의식이 판을 치고 있는 세계가 되었을 지는 여러 분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민권이니 인권이니 하는 개념을 내포하는 근대 사회로 향하는 그 첫 출발 시점을 역사학자들 모두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그나카르타는 13세기 영국의 가톨릭 귀족 들이 모여 제정한 것입니다. 그럼 이 헌장의 내용이 그들 귀족만의 순수한 작품이 었다고 보신다면 이것은 너무나 역사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분명 그것은 가톨릭 귀족의 행위였으나 그 뒤에 숨은 사상은 단연코 가톨리시즘 그 자체입니다.
사회 제도는 또 어떻습니까? 사회, 정치, 교육, 문화, 예술, 과학, 기술 그 모 든 방면에 어느 한 군데 가톨릭의 진리가 영향을 안 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법률 문제에서만 보아도 그 법률의 근원은 자연 법과 신법에 기초한 가톨릭의 교회법이었습니다. 교육은 또 어떻습니까? 대학이 라 불리우는 제도도 원래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 교육 기관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문화, 예술, 과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입만 아픈 소리가 되겠기에 넘어가겠습니다. 유엔에서 제정한 세계적 문화재에 도대체 그리스도교 정신이 스며든 문화재가 얼마나 되는 지 한 번 알게 된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기에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가톨릭은 교리상에만 진리가 있는 종교 단체는 아닙니다. 물론 그 안에 있는 신자나 사제들의 인간적 약점까지도 모두 하느님 의 도움으로 완전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 가톨릭의 진리는 틀릴 수 도 없고 틀리게 내버려 두시지도 않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고 지켜 주시기에 다른 여타 인간이 만든 인조(人造)종교와는 그 근본부터 다르며 그것 은 이론적인 문제로만 여기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유엔에서 국가가 아닌 종교단체로서 유일하게 발언권을 갖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무수한 종교 중에서 가톨릭에만 주는 이 특수한 지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 니까?
여러 가지 정황 증거와 역사적 사실 그리고 성서 말씀의 진실성으로 미루어 추 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으며 앞의 글로도 충분하리라 믿습니다만 단지 보 충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져 보잘 것 없는 글을 두서 없이 올리게 된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의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관용에 대해 다시 한번 그 참뜻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관용은 타인에 대하여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사람의 말에 솔깃해서 절에 가고, 내일은 성당에 나가고, 그 다음에는 개신교회에 가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방황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종교심을 진지하게 생각하 지 않는 사람, 아니면 모순을 범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결코 관 용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일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한, 관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의 생각 이 바르고,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 상대방의 생각을 존 중하는 것이 관용의 본질입니다.
아직도 가톨릭 교회 밖은 동짓달 그믐밤입니다. 서로들 자기가 찾은 진리라고 우 겨대지만 그것은 한낱 유한한 인간에 불과한 이들의 자기 기만일 뿐입니다. 오직 진리만을 찾아 어머니 교회의 품에 안겼던 영국의 대문호 체스터턴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상의 상치(相馳)와 진리의 파괴(破壞)는 끝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진리의 알맹이를 보존하고 온갖 진리를 옹호하면서, 모든 오류는 뿌리째 뽑아 버려야 될 의무를 거절한 때부터 비롯한 불행이다. 그 후부터는 몇몇이 패 를 지어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진리를 하나씩 주워 모아 이를 주물럭 거리다가 결국 오류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해 온 것은 움직임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모노마니아(Monomania), 곧 한 가지 일에만 골몰하는 편광자(偏狂者)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하나의 움직임이 아니다. 집합소 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모여 있는곳이다."
이제 2세기의 호교론자 테르툴리아누스의 다음의 말로 필자의 글을 맺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로써 불변(不變)이요, 오류(誤謬)는 잡다(雜多)하여
늘 유동(流動)한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