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은 왜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가? - (3)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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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2-28 | 조회수1,627 | 추천수1 | 신고 |
- 성모 공경에 관한 오해 -
앞서 말한 글의 이 우라가미(浦上) 옛 신도의 마음은 그대로 전 세계 가톨릭 신 자의 마음이다. 우리 생활에서 성모를 빼어 버리는 것은 결국 모든 신앙을 파괴 하여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와쓰지 교수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주신(主神)"으로서 "이 자애 깊은 마리아를 믿는 종교에서는 아버지인 하느님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도 전적으로 뒤로 물러서 있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는 이미 그리스도가 신앙의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까지도 그 부속물로 하는 성모 마리아가 신앙의 중심"이란 것이다. 또한 "가톨릭 교회에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기도보다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가 훨씬 많다. 뿐만 아니라 성모의 신적 탄생(!?)이 가톨릭 교회의 신조 속에까지 적지않이 들어가 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문화사적 의의’, pp. 236-237)는 것은 사실인가. 동정 성 모편에는 저자는 아무런 문헌을 붙이지 않고 있으므로 와쓰지 씨가 단정하는 근 거가 어디 있는지 모르나 이런 주장은 와쓰지 씨의 진실한 연구 결과가 아닌 것 만은 분명하다.
가톨릭 신자 중에는 마리아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예수는 인간이었으나 그냥 인간은 아니다. 거기에 어딘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마리 아는 철두철미 인간이다. 더욱이 자애로운 어머니다. 하느님으로서 그리스도에 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정의로부터 완전히 떠나다만 자애의 눈으로 우리의 모든 약점을 동정하야 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므로 그리도 고마운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모에 대한 느낌의 차이는 간단히 말하면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애정 의 차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진다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가톨릭 신자는 누구도 성모가 자력으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모의 힘은 대변(代辯)하는 힘이다.
귀양살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하와의 자손들이 그녀를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빌 어 주소서." 하고 울부짖는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을 통 하여 아버지인 성부께 기도하여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기도서를 보면 일목 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주신(主神)"이라고 말 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의 성모에 대한 신앙 의식을 손상케 하는 가장 심한 말이 다.
와쓰지 씨는 일반 종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지 가톨릭 신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 지 모른다. 가톨릭 교회의 가장 일반적 근거인 천주교 요리와 기도문과 모든 신자에게 공통한 예배에 대하여 설명하여 둔다. 내가 해설을 쓰고 있는 천주교 요리라는 소책자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가 교 리에 대하여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지식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실은 내 해설이 본문의 천주교 요리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다. 본문이 너무 일반적이 므로 건방진 청년들은 싱겁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소책자 속에는 어떤 고상한 철학이나 종교를 담은 큰 책자보다도 인간에게 필요한 더 많은 진리가 담겨 있다. 대학 교수들까지도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무엇인가 쓰고자 할 때는 우 선 이 소책자를 읽는 것이 지름길이다. 와쓰지 씨도 이 준비가 있었다면 앞서 슨 것과 같이 멋대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 교리 문답은 전 세계 어디서나 대동 소이하며 어린이들이 외우기 편리 하게 만들어져 있다. 너무 쉬워서 좀 바보스럽게 보이지만 조금만 겸손한 마음 으로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 인생 문제의 해결, 종교 신앙의 대상, 도덕 생활의 규범이 가장 간명하게 쓰여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일본어로 된 천주교 요리에는 직접 신앙에 관한 최초의 177문답 중 성모에 관한 것은 모두 9문답 에 지나지 않으며 기타 성모 공경의 의의나 천사의 아룀을 해설한 것 등을 합 하여 10문답으로 이것은 전체 524문답에 비하면 극히 소수이다. 이에 반하여 하느님에 관한 것은 신앙에 관한 부에서 23문답, 계율에 관한 부에서 20문답이 있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은 제 1부만으로도 50문답 이상 있다. 그리고 보통 신 자가 아침 저녁 사용하는 기도문을 보면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합하여 42쪽 중 하느님에 대한 것 약 12쪽, 그리스도에 대한 것 약 10쪽, 성모에 대한 것 약 9쪽, 기타는 신경(信經)과 10계명 등이 있다.전책 300쪽 중 직접 성모에 대한 기도는 약 25쪽 내외를 차지할 뿐이다. 물론 성모송 등을 반복한 것을 통산하 면 보통 신자들이 직접 성모에게 바치는 기도의 양은 이 비율보다는 많아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가톨릭의 종교적 생활의 실제 중심이 되는 것은 성모 공경이 아 니라 미사 성제(聖祭)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까지 그 두터운 미사용 기도서에 있는 무수한 기도문 중 직접 성모에 대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예컨 대 "전능하신 하느님,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간구를 들으시어 사제의 구하는 은총을 주소서."라든가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와 복되신 사도들과 순교자들 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라든가 마리아의 이름을 넣은 기도는 상당히 많으나 모두가 기도드리는 대상은 하느 님이나 그리스도이지 성모는 아니다. 성모 신심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 는 로사리오(묵주) 기도까지도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현의(玄義)를 묵상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모에 대한 신심인 이유는 마리아와 예수가 끊을래 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깊은 인연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컨대 성모송의 반복 등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기도보다 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 쪽이 훨씬 우세하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일 것 이다.
그 외에, 가톨릭 국가를 여행하는 일본 관광객들이 밤늦게까지 진탕 놀다가 늦잠을 자고 해가 중천에 뜰 때에 슬슬 구경 나와 그림이나 건축물을 보러 교 회에 간다. 그들은 물론 제단이 무엇 때문에 있는지 성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지도 못한다. 아침 일찍 있는 미사 성제는 벌써 끝났다.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모나 성인의 성화와 성상 앞에서 기도하는 할머니며 밝혀져 있는 촛불 들이다. 성작 앞에 무릎꿇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은 알 리 없 다. 그래서 가톨릭은 마리아 중심이라고 자기 무지는 깨닫지 못하고 혼자 멋대 로 정하고 자신 만만하다. 더욱이 "성모의 신적 탄생"이라는 말은 가톨릭 신자 는 무슨 말인지 설명하여 주지 않으면 조금도 알 수 없다. 아마도 "무염시태 (無染始胎)"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마도 필자 자신도 무엇인지 모르고 쓴 것이기에 추궁하는 것조차 촌스러운 일이다. 어쨋든 가톨릭의 지식에 관해 서는 교토 제국 대학의 와쓰지 데쓰로 교수는 초등 학교 실력 정도의 천주교 요리 시험에도 합격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학자는 모름지기 겸손하며 진실하여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성모 공경에 관한 이런 종류의 오해는 우리의 상상으로는 도 저히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 퍼져 있다. 가톨릭은 성모에게 예를 드리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비난을 프로테스탄트로부터 듣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에도 나의 한 친우에게, 야마시다라는 남자는 마리아상을 예배하는 것 이 아니냐고 물은 제국 대학 출신 학사 부부가 있었다. 모험파라든가 독실한 신자로서 나의 개심을 위하여 기도하여 준다니까 그 친우를 통하여 감사의 뜻 을 표하도록 부탁하였다. 그 외의 사항에 관해서는 별개로 하고 우상 숭배로 부터 개심할 필요만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전언을 부탁하였다.
"천주의 성모" 라는 뜻
이러한 연유로서 가톨릭 교회의 성모에 대한 신앙과 그 이유를 여기 한 묶음 으로 정리하여 쓰는 것도 헛수고는 아닐 것이다.
1) 모든 인간 중에서 마리아의 특수한 지위는 그녀가 신성(神性)과 인성(人 性)의 유일한 페르소나를 합하여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모(生母)이기 때문 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낳으신 아들이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이시기에 그 녀는 Theotokos(하느님을 낳으신 여인)"천주의 성모"로 칭한다. 물론 하느님이 그녀로부터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재의 어머니" 따위를 말할 때처럼 그 태내에서 사람이 되신 분이 신성을 가지신 분이었다고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 다. 천재를 낳은 어머니라고 말하여도 어머니가 천재를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 다. 낳은 어린이가 우연히 천재였다는 것은 어머니가 반드시 천재라고 정해진 것이 아님과 같은 이치이다. 가톨릭은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고 칭하여도 여신 (女神)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나 하느님보다 높은 분으로도 물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가톨릭을 아무 것도 모르는 교수 나 편견에 사로잡힌 일부 프로테스탄트이다.
성모 공경의 도덕적 의의
2)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은 맹목적인 운명의 결과도 아니요 또한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하느님의 섭리도 아니었다. 그녀의 독특한 지위의 도덕적 의의는 그 자유 의사에 의하여 구세(救世)의 대업에 공헌한 점이다. 예수 강생의 현의는 하느님의 영원한 예정대로 성취하느냐 아니냐는 일로 마리 아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렸다고 말하여도 틀림없다. 그녀의 의지는 하느님의 구세의 계획의 성패 여부에 직접 의식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인간의 의지였다. 천사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동정을 지키고 있던 그녀는 결코 무조건 이 영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의심하였으나 그것이 무엇이나 못하는 일이 없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이란 깨우침을 받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지소서." 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는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어 예수 강 생의 현의는 이루어진 것이다. 성부는 그 외아들의 강생이 한 동정녀의 승낙에 의하여 성취되기를 원하셨다. 인간이 아무리 허약하며 불쌍하고 더럽혀진 자라 도 하느님은 이들을 자유로이 만드시어 그 자유 선택에 의하여 자기 운명을 결 정할 것을 원하신다. 이것이 가톨릭 세계관과 프로테스탄트의 견해가 근본적으 로 갈라지는 중요한 점이다. 성모에 관한 양자의 태도가 서로 다름은 단지 그녀를 존경하느냐 않느냐 하는 피상적 문제가 아니다. 훨씬 깊은 근본 적 개념의 차이가 여기 나타난다.
루터에 의하면 구원에 관해서는 인간은 목석과 같이 전연 이에 협력하거나 참 여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가톨릭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바와 같이 "그대(의 협력) 없이 그대를 만드신 하느님은 그대(의 협력) 없이는 그 대를 의롭게 하시지 않으셨다. (Qui ergo fecit te sine te, non te justificat sine te)." 라고 말하고 있다. 전자는 도덕의 부정에까지 이르는 순타력주의(純他力主義)이며 후자는 도덕을 포섭한 타력 본원(他力本願)이 다. 분별할 줄 아는 나이가 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에 자유로이 협력함 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전 인류의 구원에 관하여도 하느님은 이 협력을 도외시하 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처녀 마리아를 택하여 이 영광스럼 사명을 맡기셨다. 첫 째 하와의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 것이 둘째 하와의 사명이었다. 첫째 하와가 멸 망에 이르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었듯이 둘째 하와는 인류 구원의 어머니가 되었 다. 이렇게 하느님은 인류에게 주신 자유를 존중하여 도덕적 품위의 존엄을 보전 하게 하셨다.
우리를 죄에서 의롭게 구원을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식 으로 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지 결코 자력의 선업(善業)에 의한 것은 아니다. 죄나 하느님에게 반역하는 것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부와 사랑 의 관계에 의하여 맺어지는 것도 원죄의 편에서 상세히 기술한 바와 마찬가지 로 자연에 의한 상태가 아니라 자유 선택을 기초로 하는 도덕적 관계를 전제 로 하여 그 위에 은총이 합하여 처음 가능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섭리인 것이 다.
따라서 죄로부터 구원에로 가는 것도 자연적으로나 마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다. 인간 의지의 협력이 적어도 대표적으로 더해져 처음으로 성 취되는 도덕적 과정인 것은 당연하다. 이 근본 원칙이 예수 강생의 현의에 활 용되어 처녀 마리아가 동의하는 형태로 나타나 이 도덕적 선택으로 처녀 마리 아는 성모 마리아가 되었다. 따라서 가톨릭의 성모찬양은 하느님의 비할 수 없 는 은총의 찬양인 동시에 그 은총을 목석과 같이 무심하거나 뜻 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절대 귀의에 의하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답한 한마디로써 이것은 도덕에 산 마리아의 인간성 찬양 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그 종을 위하여 큰 일을 하신 것을 찬양하는 둥 시에 그 종의 순결과 신앙과 겸손을 인류의 자랑으로 여긴다. 같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페르소나에서 인성과 신성이 일치 결합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것이 우리의 영광인 것처럼, 순결한 처녀로서 그 태내에 하느님을 잉태하신 어 머니인 마리아를 가지는 것은 우리의 큰 위로이다. 첫째 아담과 하와의 죄와 더러움은 둘째 아담과 하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하와가 아담의 걸림돌이었는 데 반하여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단지 육체적뿐만 아니라 도덕적 협력에 의하 여 탄생시키으로써 구원을 가능케 하였다. 마리아는 실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 하여 인류가 영원의 생명에까지 향상하는 도상에 있어 인간 자유 의지의 참여 협력을 일신에 상징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모 공경은 가톨릭 세계관의 기조 로서 알려져 그 초자연적 도덕관의 가장 숭고한 발현이 된다. 성모의 옥좌는 통속 신앙이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가톨릭 정신의 진수가 숨김없이 나타 난 것이다.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 에서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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