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 교회는 왜 이혼을 금하는가?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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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3-01 | 조회수1,214 | 추천수1 | 신고 |
- 왜 이혼을 못하는가? -
교회는 가정의 화롯가의 성소를 보호한다
"가톨릭 교회는 왜 이혼을 금하는가?" 이는 비신자 동포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다. 미국에서 맺어지는 결혼이 네 건 중에서 한 건이 이혼 재판소에서 결말을 짓고 있음을 지켜 보고 있는 열교도(裂敎徒)들은, 왜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반대 하는 역사적 태도를 고집하고 있는지 이상하게 여긴다. 그리고는 자기들 교파의 목사들이 전에 두 번 세 번 결혼한 적이 있는 이들의 결혼을 주례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은 또 한 번 놀란다.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한결같이 반대하는 근본 이유를 알려면, 우선 교회는 두 사람의 그리스도인, 즉 가톨릭에서 영세한 두 사람의 결합을 그저 민법상(民法 上)의 계약으로만 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설정한 성사(聖事)로 본다는 점을 지 적할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배타적(排他的)인 국가 권위 의 관할권 밖으로 끌어내어, 적어도 종교면으로라도 이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 할권 밑에 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혼배 성사를 유효하게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선언함은 종교적 권위에 속하는 일이다.
혼배는 성사(聖事)다
이제 혼인의 성사적 성격을 말하겠다. 성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편지하여 혼인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비겨 크나큰 신비라고 선언했다.(에페 5, 25-32). 성 아우구스티노는 4세기에 이의 성사적 성격을 말했는데, 이는 초대 교회의 보편적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다. "사도께서 남편이 그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사랑함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혼배하는 신자들에 게 혼배(婚配)의 열매인 자녀를 많이 낳고 도 정덕(貞德)을 충실히 지키라고 일 러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이 한 가지 성사(聖事)임을 깨우쳐 주는 것이 확실 하다. 이 성사의 본체(本體)는 물론 혼인으로 결합된 남녀는 살아 있는 이상 서 로 헤어질 수 없다는 데 있다" (De Nupt. et Concup., I., 10).
종교 혁명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혼배의 성사적 성격을 보 편적으로 믿었다. 이 사실은 동방 교회의 신조(信條), 예컨대 네스토리안, 모노 피지트, 콥트, 자코비트 등 교파의 신조에서도 발견되기에 더욱 확실하다. 이들 은 5세기 이래 자모(慈母)이신 성교회를 떠나 있었는데도 그들의 전례에는 혼배 를 7성사 중에 포함시키고 있다. 16세기에 튀빙겐 대학의 교수들이 그리스 정교 회를 종교 혁명가들의 신조 속에 끌어넣으려 했을 때, 그리스 정교회의 총대주교 (總大主敎) 예레미야는 분연히 저들의 제안을 걷어차고, 자기 교회는 두 개의 성 사만 믿는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혼배를 포함한 7성 사를 믿어 온 동방 교회의 불변적인 신앙을 선언하면서 종교 혁명가들의 교섭을 모욕적으로 거절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성전(聖傳)의 소리는 혼배의 성사적 성격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그리스 도께서 세운 것이다.
이제 질문에 대답하기로 하자. 교회는 왜 이혼을 금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금한 까닭이다. 하느님이 세웠고, 당신의 교리를 가르칠 명을 받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는 이혼을 용인할 수 없다. 여기서 이혼과 합법적 별거(別居)를 구별해야 되느니 만큼, 이 글에서 이혼이라는 것은 보통 비신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뜻으로 쓰기로 한다. 곧 이혼이라 함은 결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다시 결혼할 자유를 누린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우리 주께서 이혼을 금하셨음은 복음사가(福音史家) 세 분의 기록으로 명백한 데다가, 성 바오로는 이를 더욱 확증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 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 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 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 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들은 다시 "모세는 ’아내를 버리려 할 때에 는 이혼장을 써 주어라’고 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 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19, 3-9).
예외 없다
이에 대해서 어떤 비신자는 아내가 간음을 범한 경우에는 그 남편은 그 처를 내쫓을뿐더러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추론(推論)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추론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무런 제한도 없이 그냥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까닭이 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부정(不貞) 때문에 처를 내쫓더라도 그 결혼의 인연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전제 아래서만 참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바 리사이파들에게 대답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런 뜻이다. "결혼의 맹세를 어기는 경우 남편은 그 아내와 갈라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결혼을 하면 그 때 는 자신이 간음을 범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구세주의 가르침의 올바른 해석임은 성 마르코와 성 루가가 확증한다. "집에 돌아와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 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10, 10-12).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며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루가 16, 18).
서로 갈라선 당사자들의 재혼(再婚)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고 있는 이 텍스트들 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아무런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가장 명백하고 가장 절대적인 말투로 선언하고 있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중대 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헤어져 살 수는 있지만 상대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혼할 수 없으며, 재혼하면 이는 간음을 범한 것이다. 곧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는 엄숙하고도 인상적인 선언 을 하실 때, 그리스도는 어떠한 인간 능력도 혼인의 인연을 풀 수 없게 하신 것 이다.
나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
혼인 인연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가르침은 자기가 창안 (創案)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임을 깨우치게 했다. "결혼 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 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재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 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1고린 7, 10-11).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의 이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 눈앞에도 똑똑히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이가 -심지어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까지도 - 혼인의 인연이 풀릴수 있다고 여기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혼인도 여느 계약이나 마찬가지로 계약 당사자들의 뜻대로 파기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 다. 이러한 생각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의 지지를 받음은 그래도 이해가 가 지만, 자칭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굳게 따른다는 이들마저 그리스도교의 창설자 가 명백히 단죄한 이 생각을 외교인(外敎人)이나 다름 없이 우기고 있음은 참으 로 이해할 수가 없다.
성 바오로가 19세기 전에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는 경고를 오늘날 그들에게 다시금 되풀이해야만 되겠는가? 그리스도 교 혼인의 인연은 절대적으로 풀릴 수 없다는 이 교리는 사도들의 발명(發明)도 아니고 공의회나 교황, 또는 어떠한 인간의 창안(創案)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 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쉽고도 잘못 알아들을 수 없는 가르침이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공경하기로 힘씀으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세기를 이어 그리스도교 혼인의 신성성과 영속성에 관한 가르침을 지켜 오고 있 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이의 창립자이신 하느님께 대해서 반역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법의 목적
이혼하면 가정의 불행이 구제되는가? 또 사회적 이익이 있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창립자가 하느님이심을 믿는 이에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치고 사회 복지 를 해치거나 인류의 영속적 행복을 파괴할 것은 아예 있을 수조차 없음은 의심 할 여지도 없다. 혼인의 신성함과 불가해소성의 법률도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법률과 마찬가지로 그 목적은 전체로서의 인간사회 복지에 있다.
일반적 복지를 위해서는 제아무리 건전하고 필요하더라도 몇 군데 개인을 얽매 지 않는 법률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또 혼인이 파탄으로 끝났을 때 무죄한 편 에 큰 희생, 심지어는 영웅적 희생까지도 요구하는 특수한 경우가 있음을 부인 할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결혼의 속박을 완전히 끊고 재혼할 특혜를 베풀어 주 어야만, 이런 결혼의 무죄한 희생자가 행복을 누리게 되는 수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혼이란 정당한 것이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다.
교회는 모든 자녀들의 행복을 걱정하느니만큼, 사정에 따라서는 부부의 완전한 별거(別居)를 허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혼 금지법에 대해서 단 한번만이라 도 예외가 허락된다면, 즉시 그 금지법은 수많은 예외의 집중 공격을 받아 그 법 은 절름발이가 되고, 급기야는 그 목적, 곧 사회 전반(全般)의 복지를 달성할 수 가 없게 된다. 특히 걸핏하면 날뛰는 인간 본성의 욕정을 조절하여 전체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법률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치명적인 쐐기
여기서 말한 진리를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개신교 형제들의 경험을 한번 훑어 볼 것이다.
개신교의 종교 혁명이 있기 전, 그리스도교 양우리 안에는 이혼이란 알지도 못 했다. 복음 사가(福音史家)들과 성 바오로와 또 15세기에 걸쳐 줄곧 성전으로 전 해 내려온 그리스도의 명백한 가르침을 버린 혁명가들은, 간음이라는 이유로는 이혼할 수 있다고 떼를 썼다. 이는 아무도 가히 풀지 못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 침을 어기며 수백만의 부부를 찢어 놓은 치명적 쐐기였다. 굴레를 벗고 날뛰는 인간 정욕으로 인한 이혼의 핑계는 급작스럽게 불어, 오늘날에는 그 수효가 엄 청나고, 따라서 어처구니없이 사소한 이유로도 가룩한 인연을 마구 끊어 버리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던 바로 그 날, 미국의 모든 신문은 다음과 같이 AP 통 신의 기사를 실었다. 캘리포니아의 어떤 도시에서 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이혼 소 송을 제기했다. "내가 아침 식사 때 먹으려고 만든 말랑말랑한 과자 위에 남편은 자기가 코치를 맡고 있는 축구 팀의 공격형을 계획적으로 그렸다"는 것이 이혼 사 유였다. 그녀는 이를 ’정신적 학대(虐待)’라고 우겼다. 이래서 이혼 소송이 일어 났다. 만일 재판소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마구 이혼을 허가해 온 솜씨를 고치지 않는다면, 이 글이 인쇄소의 기계에 올려지기도 전에 이 민감한 부부는 이혼 허가 를 받을 것이다. 부부가 맺는 가장 신성한 서약 -불멸의 사랑과 충성의 서약- 은 이처럼 멋지게 타락해 버렸다.
가톨릭이 아닌 교파의 거의 모든 목사들은 요즘에는 부부의 짝을 맺어 주고는 세 번 네 번 또는 그 이상이라도 새로 결혼하게끔 이혼시키고, 그리스도교의 창 립자이신 하느님의 엄격한 경고,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리하여 혼인의 신성함과 영 속성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혼이 허락되는 수백 가지 의 핑계는, 실제로 모든 열교파의 교회에서 혼인의 신성함과 불가해소성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률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말았다.
종교 혁명가들의 과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해 가톨릭이 아닌 교파들의 경험은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법률 -특히 인간의 정욕을 억제하는 법률- 에 예외를 마련하는 것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혼인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률에 단 하나의 예외라는 쐐기를 박는 것은 마치 네덜란드의 얕은 지역을 위 해서 바닷물을 막고 있는 둑에 얇은 칼을 들이치는 것과 같다. 무시무시한 바다 의 거센 파도는 이 극히 좁은 틈을 금세 활짝 열어 젖혀 순식간에 바닷물이 몰 려들어 육지에 범람하고 온갖 것을 휩쓸어 간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혼배 성사의 둑을 망보는 파수병이다. 이 둑은 닥치는 대로 파멸을 일삼는 정욕 을 억제하여 인류의 행복과 복지(福祉)를 촉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적해 둘 것은, 저 종교 혁명의 두목인 마르틴 루터는 혼인의 단일성(單一性)과 영속성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장 심하게 파괴한 자이다. 이는 그가 ’혼인은 그저 세속적인 일’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비롯한다. (Dr. Martin Luther’s Saemitliche Werke, Vol, XVI, p. 518-519). 그 때 설교단 에서 자기 배우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남편은 아시리아 왕의 본을 따라 와 스디를 에스델로 갈아치우고, 종을 주부(主婦)자리에 올려놓으라고 이혼을 선동 했다.(Sermon on Marriage, Vol. XX) (에스델과 와스디에 관한 것은 구약성서 에스델서를 참조).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다처제(多妻制)를 인정했다. ’모세의 첫째 권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내가 오늘날 권장할 수는 없지만 남자가 한 명 이상의 아내를 취함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를 이론으로 가르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동료 혁명가들 멜란히톤, 부서, 렌닝, 코리브누스, 빈트레르트 등과 더불어 헷센의 백 작 필립이 이미 8명의 자녀를 두었고, 또 별거할 뜻이 없는 첫 번째 처와 같이 살 고 있는데, 둘째 아내를 맞는 것을 인정했다. 이에 이르러 개신교의 탄생과 더불 어, 인간 정욕의 폭력에 눌려 그리스도께서 선언한 위대한 이상(理想) -어떠한 사 람의 힘으로도 풀 수 없는 결혼의 인연-을 비벼푸는 힘이 그 무수한 교파 속에서 쉴 새 없이 작용하여 왔다.
솔직한 고백
요즘에 와서 모든 개신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가정을 파괴하는 폐습이 직접 혁명가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한 덕분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메 인 주(州)의 개신교 감독은 몇 해 전에 다음과 같이 솔직히 고백했다. "혼인 인 연의 신성함과 이혼 문제에 대한 타락된 견해(見解)는 16세기 유럽의 개신교에 서 비롯한다. 이는 곧이어 대륙의 개신교 국가의 법률로 나타나고, 거의 때를 같이하여, 뉴잉글랜드의 법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 지 우리나라에도 차차 번져 왔다. 특히 뉴잉글랜드와 직접 이런 사상과 관습의 영향을 받는 주(州)에서는 혼인의 본성과 의무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은 입 법에 있어서나 지배적인 사회 감정에 있어서나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다." (The Calling of a Christian Woman, by Rev. Morgan Dix).
그러나 이 경향은 서부의 여러 주에도 급속히 퍼져 갔음을 주의해야 한다. 오 늘날에는 레노나 네바다의 이혼 재판소는 사소한 핑계로 결혼의 신성한 인연을 푸는 데 신속하고도 간편하게 판결해 버리기로 전국에서 유명하다.
이혼의 증가
이제 이혼의 쐐기로 말미암아 현대 사회의 가정 생활에 야기되는 혼란을 잠깐 훑어보자.
1870년부터 1900년까지 이혼율은 결혼자 10만명에 대해서 81건에서 200건으로 -약150퍼센트- 껑충 뛰었다. 35년 전에는 미국에서 결혼 12건마다 한 건씩 이혼 으로 끝맺었다. 1942년 5월 25일자 미국 조사국 발표를 보면, 1940년도의 이혼율이 역사상 최 고 기록이었다. 곧 26만 4천건의 이혼이며, 이는 결혼 건수 매 6건 중 한 건 이 상의 비율이다. 전쟁통에 급히 서둘러 잘못 생각해서 맺은 결혼이 결국 전국적 으로 이혼의 사태를 야기했다. 그래서 그 전의 모든 기록을 다 깨뜨렸다.
’라이프’ 잡지의 조사에 의하면, 1946년에는 총 60만건을 훌쩍 넘어섰다고 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이는 도회지에서는 결혼 건 수 두 건마다, 시골에서는 세 건 마다 한 건이 이혼으로 끝맺었음을 뜻한다. 하기야 1946년의 이혼 총수(總數)는 비정상적이며 과도기의 것이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골수 속에 쐐기가 점점 깊이 박혀 들어가고 있는 슬프고도 비극적인 사실만은 여실하다.
종교 문제는 전혀 도외시하더라도, 혼인의 서약에 대한 타락이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목도하는 주의 깊은 관찰가들은, 이것이 개인에게나 사회에나 불행한 결 과를 초래함을 탄식하고 있다. 예컨대 멘켄(H. L. Mencken)은 종교나 도덕적 이유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근본 원리를 침범한다는 이유로 연애 결혼을 선동 하는 자를 단죄하고 있다. "우애(友愛) 결혼의 어려운 점은, 이것이 안정(安定)과 신뢰(信賴)를 파괴하는 데 있다. 당사자들의 어느 편도 상대편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따라서 상대편을 마음놓고 신뢰하지 못한다. 정상적인 사람 이면 자기의 원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여인과 결혼할 리가 없다. 자기 의 영원한 벗으로 생각되는 여인과 결혼한다. 우애 결혼 속에 행복이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지금껏 인간 심리에 대해서 배워 온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와이즈(Rabbi Stephen S. Wise)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한층 더 쉽게 이혼할 수 있는 결혼법을 만들려는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갈파했다. "필요한 것은 종교 혁명가들이 환상한 것처럼 결혼법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의 서약 을 충실히 지키기 싫어하고 그 대신 욕정만 떠받들려는 자들의 마음과 도덕을 변혁(變革)하는 것이다."
첫째로 공공 복지
국가 사회의 생명을 보조하려면 각 구성원(構成員)에게 사회 연대성(連帶性)과 사회 복지를 위한 개인의 휘생 관념을 고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시(戰時)에는 국민은 목숨을 걸고 조국 방위를 위해 응소(應召)해야 한다. 개인이 자진해서 자 기 개인의 이익을 가족과 국가와 인류 전체의 복지 밑에 두는 척도(尺度)는 주 로 그의 무아심(無我心)과 고상한 인격에 달려 있다.
결혼이 실패하고, 무죄한 희생자가 이혼하고 재혼할 유혹을 받게 될 때 그리스 도는 그런 이에게 전체 사회의 보다 큰 복지를 위해서 자기의 개인적 이익은 희 생하도록 요청한다. 만일 이런 경우에 단 하나의 예외만 있어도 명확한 한계선 을 그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혼인의 단일성(單一性)과 신성성(神聖性)은 여 지없이 파괴될 것임을 하느님께서 그에게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 때 개인은 자 기 희생의 영웅으로서 공공 사회의 복지를 개인의 이익보다 위에 두도록 응소 (應召)하여야 함을 깨닫는다. 그러면 사람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한 병사나 다름없는 감사를 동포들로부터 받을 자격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전능하 신 하느님의 상을 받을 자격까지 얻는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되신 어머니는 이렇게 할 필요가 정말로 없었음에도 율법을 지키는 표양을 보여 주시지 않았던가. 어린 예수님은 정화(淨化)의 예절을 필요 로 하지 않았음에도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대로 할례(割禮)를 받지 않으셨는가. 또 마리아의 정결(貞潔)은 어머니가 됨으로써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음에도 불 구하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40일 만에 유다의 율법이 요청하는 대로 취결례 (取潔禮)를 받지 않으셨던가. 이처럼 그리스도와 복되신 어머니는 당신들은 예외 라고 우기지도 않고 -우길 만도 하였건만- 오히려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만대의 그리스도인에게 훌륭한 표양을 주셨다.
예(例)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고 또 필자의 생각으로는 불행한 결혼의 무죄한 희생자 가 개인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을지언정 공공복지(公共福祉)를 위하여 법률을 준 수해야 한다는 유일한 논리적 근거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예를 들기 로 한다. 고해소의 비밀의 법률은 고해 신부가 고해 때에 고해자로부터 들은 죄 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일체 입 밖에 내지 못하게 금하는 법률이다. 그런데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때 들은 정보(情報)를 세상에 밝혀야만 되는 것처럼 보 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중대한 범죄의 판결을 받은 죄수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사제가 고해 신부로서의 직책을 통해서 그 죄수 아닌 다른 이가 그 범죄의 진범(眞犯) 임을 고백함을 듣고 알았다. 그런 경우 "고해소의 비밀을 사직(司直) 당국에 누 설함으로써 중범자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저 죄수를 석방시켜 주는 동시에 진범을 벌할 수 있을 게다. 그렇게 해야 정의가 크게 선양(宣揚)될 것이다. 그러 니까 이런 특수한 사정에서는 고해소의 비밀의 법률은 효력이 중지된다"라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천만에. 이런 결론은 완전히 틀린 소리다.
이런 특수한 경우, 이렇게 해야 정의가 고취되고 단 한 사람은 좋게 된다는 것 은 솔직히 인정하지만, 그 반면 고해소의 절대적 봉인(封印)에 대한 신뢰심은 몽 땅 날아가 버리게 되어 수백만 명이 손해를 입게 된다. 이는 결국 공공 복지와 전 인류의 행복을 해친다. 말하자면 단 한 사람의 경우를 위해 법률에 예외를 둔다면 얻을 이익의 몇 백만 배의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혼인에 관해서도 이와 같다. 신랑과 규수가 서약하는불멸의 충성의 맹세가 항구한 신뢰를 불어넣는 것 이기에, 예외 때문에 절름발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외를 하나라도 둔다면, 혼인 맹세의 보편적 효력에 대한 인류의 신뢰는 물론이거니와, 그 결과로 혼인 의 인연 그 자체의 신성함과 영속성에 대한 믿음마저 몽땅 꺼져 버리게 되는 까 닭이다.
공정한 결론
이상에 열거한 사실들로 비추어 볼 때 다음의 결론은 충분히 보증될 것이다. 곧 혼인의 신성성과 불가해소성에 대한 확고부동한 교회의 태도는 민주주의의 가장 강한 방패와 성채이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가정을 안전히 보존함으로써 질서 있는 정부의 기초(基礎)를 옹호할 뿐 아니라. 가정 생활의 가장 높은 본보 기를 고취한다. 교회는 남편과 아내와 아이들의 이익뿐 아니라 그들의 행복까지 보호하고 있다.
교회는 그 자녀들에게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공곡 복지 밑에 예속시키기를 가르침으로써 국민 생활의 가장 고상한 본보기를 향상하게 하는 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공헌을 하고 있다. 가정의 영구(永久)한 단일성을 악착같이 고집하여 보 호하는 교회의 태도는, 조국과 사회 전반(全般)의 복지를 개인의 사사로운 기분 만족보다 위에 두는 모든 국민들에게 찬사를 받음은 마땅하다. 그리스도교 결혼 에 관한 교회의 숭고한 표준을 낮추라고 조르고, 혼인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 의 법률을 무수한 예외로 두어 벌구멍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귀에, 교회는 위대 한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금 속삭인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 ’The Faith of Millions (억만인의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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