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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적 차이에 대한 고찰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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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4-10 조회수1,137 추천수3 신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적 차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적 성립의 배경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여기에 2천년에 걸친 가톨릭 교회의 역사 전부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

나 아쉬운 대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적 성립의 차이를 다시 한번 고찰해 보

겠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라면 물론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제일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역사적 성립의 차이와 그러한 차이를 바라보는 시각에

서 출발해서 교리 전반에 걸쳐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실제 생활에서 표현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즘 유고의 민족 분규에

서 보듯이 정확한 역사 인식이 없이는 현실 상황에 대해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의 결론 밖에는 끌어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가톨릭을 다른 말로 ’구교(舊敎)’, 개신교(改新敎)를 ’신

교(新敎)’라고 합니다. 가톨릭은 분명 개신교보다 역사가 오래되었고, 두 나라

에 먼저 포교된 것은 가톨릭이므로 이러한 표현이 그런대로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고교(古敎)인 유대교의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

원을 내세우는 편협한 틀을 깨치고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세

우신 인간의 종교가 아닌 하느님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신적 기원의 새로운

종교인 신교(新敎)에 해당합니다. 그렇기에 가톨릭 신자는 어느 누구라도 그 옛

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다음과 말했던 구절을 언제나 피부로 느끼며 하느님

의 은총을 받았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외칠 것입니다.

 

 

 

 

  "오, 영원히 옛스럽고 영원히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나 당신을 앎이 너무나

 

늦었고 너무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였나이다."

 

 

 

 

 가톨릭 교회의 시작은 ’성령강림일’로부터 출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으로부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예수 승천), 그 제자들은 성모

님과 함께 열흘간 기도하고 약속된 성령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연약

한 인간이었던 제자들은 그 은총으로 강하여져, 베드로가 설교한 결과 삼천 명

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사의 제 1장은 신약성

서의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기에, 신자라면 꼭 이 부분은 읽

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읽어 보면 알게 되듯이, 처음에는 박해도 수없이 많았

고, 그리스도교 사이의 다툼도 생겼으며, 더구나 이단까지 출현했었습니다. 흔

히 생각하는 것마냥 초세기의 교회에서는 가톨릭으로 일관되게  교회가 유지되

어온 것이 아니라 초세기 교회부터 이단과 배교자가 속출했으며 그러한 시련은

어느 세기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 였다는 점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종교

분열을 획책한 이후로만 가톨릭에 반대하는 종파가 출현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

된 역사 인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과 분열이 계속되었음에도 오직 가톨

릭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점 일획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지켜오고 있음

은 참으로 신의 보호가 함께하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가톨릭 역사도 이와 아주 비슷합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있

었고, ’배교한 그리스도교인’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힘으로 유지

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존재할 터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기에, 배교한 신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같은 정도로

오래된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를 생각해본다면 그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한 말은 아닙니다.

 

 개신교의 역사는 16세기에 루터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서양사 책에도

씌어 있으므로 자세한 것은 쓰지 않겠습니다. 물론 아래 제가 올린 글 중에도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해 상세히 서술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루터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간 후 사제로

서품받았습니다. 1511년에는 자기가 속한 수도회 일로 로마에 갔습니다만, 공

식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완전히 떠난 것은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 날’

에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유명한 ’95개조 제의’를 붙인 때입니다. 이때부터 유

럽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가톨릭을 떠나게 되었는데, 언제나 그러했듯이

가톨릭 교회와 그 가르침에는 이러한 사건으로 인한 어떠한 변화도 없었습니다.

 

 사실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엄격한 가톨릭의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패륜적 탕아들의 경거망동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이룩한 것은 말그대로 개신(改

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고교(古敎)인 유대교에서 새롭고 참된 신교

(新敎)로 새롭게 되어 있었던 가톨릭을 고쳐서 뛰쳐나간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

트 즉 개신교(改新敎)입니다. 이미 올바른 상태를 고치면 무엇이 될지 생각해보

시기 바랍니다. 더욱 올바르게 될지 아니면 잘못될지는 중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능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일테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교회 역사의 내용은 대강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내

용은 현재 진행중이 아닌 과거의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보다 깊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

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역사적인 사건을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평가하

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또는 개신교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은 단 하

나뿐인데, 가톨릭 쪽 사람의 눈으로 또는 개신교 쪽 사람의 눈으로, 나아가 가

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평가가 되면, 그 평가는 각기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사람은, 즉 ’바깥에서’ 본다면 16세기에 유럽의 그리스

도교가 둘로 갈라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림 1) . 가톨릭 쪽 사람이 본다면

16세기에 이르러 그때까지는 그리스도교를 바르게 전해온 정통 신앙의 교회로

부터 개신교가 훌쩍 떠나버렸다고 평가하겠지요(그림 2). 개신교는 어떻게 생각

할까요? 저는 개신교도가 아니니 개신교 신학자의 글을 빌려 소개하기로 합니

다.

 

 

 

   -중략-

 

이 초기 그리스도교사를 견본으로 하여 그 후의 역사를 본다면, 후자의 의의나

가치도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무엇보다 중세의 교회는 초기 교회의 전통을 이

어받았다고는 하지만, 헛된 것을 보태거나 불필요한 것을 만들어 지나침과 형

식화에 빠졌다. 마리아 숭배, 교황 절대주의, 성체의 실체변화설 등이 그것이

다. 그에 대한 시정과 타개의 움직임이 이미 중세에 싹텄다. 프란치스코회, 바

르드파, 공동생활 형제회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서

인지 이들 운동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16세기 초에 루터가 스스로의 체험에 맞추어 개혁의 봉화를 들었을 때 엄청난

반응이 일어나, 온 그리스도교계의 적어도 삼분의 일이 이에 호응하여 개신교

교회는 출현하였다. 이는 성서의 복음으로 돌아가려 하는 운동이었는데, 그 복

음은 바오로의 그것이었다(유우키 코오,「그리스도교 신강(新講)-예수로부터

현대신학으로」, 츄코 신서, 1975년, 178. 179).

 

 

 

 

따라서 개신교에 의한 교회 역사 평가는 (그림 3)과 같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

니다. 물론 이 세 가지의 다른 역사관 가운데 오직 한 가지만이 옳은 것이 될

것이겠습니다만, 그것이 어느 것인가는 개인의 역사적인 사실의 평가 즉 역사

관만으로는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사실 개신교 중에는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그리스도’이지만, 나자렛의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사

람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라고까지 주장하는 교파도 있기 때문

입니다.

 

 

개신교를 굳이 분류하자면 가톨릭과 유사하거나 비슷한 점이 많이 엿보이는 것

이 있는 반면 이러한 것이 과연 그리스도교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

도의 교파까지 아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세포분

열 상태로까지 말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왔는가 하는 것 자체가 흥미있는 연구

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교파의 분열과 이단에 대한 지속적 연구를 하는

열심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마침내 진리의 빛을 받아 가톨릭 교회가 참교회임

을 깨닫고 회심하게 되곤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성공회 학자였으나

마침내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이 된 존 헨리 뉴먼과 현재까지 쉼없이 계속되고

있는 영국,독일과 미국 등의 목사와 대학교수들을 비롯한 사회지도층 지식인들

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글은 이미 앞서

올린 글 가운데 ’지성인은 로마로- 왜? (1), (2), (3)’ 에서 이미 상세히 서술

한 바 있으며 고학력의 지식인 계층과 세계적 지성이라 일컫는 이들의 절대 다

수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은 통계 자료를 통해 이미 입증된 현실입니다.

 

 

 개신교 사이에 한 가지 일치되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가 교

황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 반역을 감행한 것 외에는 일치되는 점이 도무지 없으

며 오늘은 이 교파의 깃발 아래에 내일은 저 교파의 깃발 아래 우왕좌왕 휩쓸려

다니며 각 교파 간에 서로 배척하지 않는 교리가 도무지 없다는 바로 그 점이라

고 16세기 초기 독일의 종교 혁명가 중의 한 사람인 테오도르 베자는 이미 이야

기한 바 있으며 그 사실은 4세기전이나 새로운 2천년을 일년 앞두고 있는 오늘날

이나 여전히 유효한 말입니다.

 

개신교가 가톨릭에 비해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점은 아마도 각 개

인의 종교적 체험을 유난히 강조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는 개인의

감정이나 주관에만 의존해 신앙을 갖지도 않으며 더구나 그러한 개인의 주관적

내감에 몸과 마음을 다 빼앗겨 개신교의 망상적 상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

가 웰즈가 자주 이야기했듯이 신을 서술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지성이나 이성의 좁은 틀안에 집어넣

고 간단히 분해되어 흡수할 수 있는 오렌지 쥬스같은 존재가 아님을 가톨릭 신

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전지전

능한 하느님이시지만 그분이 우리의 원의와 의지대로만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

이 참된 신앙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아는 가톨릭 신자들은 어떠한 불의와 시련,

그리고 한순간의 부귀영화도 모두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 개인의 주관적 체험에서만 이해할 성질의 것이 아니

라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프로테스탄트는 개인의 주관적 체험의 절대 신봉자입니다. 그 반면 진정

한 가톨릭 신자는 절대적이고도 영원 불변의 객관적 권위 즉 신의 권위에 절대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결국 신의 권위를 대신하는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

며 신앙의 보호자인 어머니 교회에 순명하는 가톨릭 신자에게 개인의 헛된 주관

적 체험에 의존한 신앙을 영위하려는 개신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

졌으리라 봅니다.

 

 

 

 

 

다음에는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사(聖事)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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