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245]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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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승주 | 작성일1999-06-13 | 조회수528 | 추천수1 | |
제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는 절대적인 '운명'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참된 예언은 결정된 운명에 대한 발설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렇게 결정되어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요즘 특히 유행하는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도 '인간들이 운명을 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지요?
예언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던 사람 중의 하나가 어떤 의도에서건 그분을 넘기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십자가 사건의 핵심은 제자의 배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과 자기 봉헌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많은 체포의 위협과 제거 시도에 노출되어 계셨음을 주목한다면, 십자가 사건의 시작은 제자의 배반으로부터가 아니라 때가 되었음을 아신 예수 그리스도의 받아들임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것은 유다의 배반이 아니라 게세마니에서의 기도이지요. 배반은 십자가 사건의 충분 조건이 아닙니다.
덧붙여, 결정적인 유다의 죄는 '배반'이 아니라 자기 생각 속에 갇힌 '절망'이었음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소극적인 배반과 유다의 적극적인 배반을 비교하며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를 배반 이후에 초점을 맞추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유다가 배반 이후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깨달음과 회심에 집중했다면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움직였고 스스로 사도단을 떠난 것이지, 결정된 운명에 이끌려간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모습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본성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을 알거나 알지 못하도록, 혹은 따르거나 따르지 못하도록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고,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고 부르십니다.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아오스딩 성인은 '하느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나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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