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회 이해 - 그 근본적 차이에 대해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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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8-15 | 조회수2,502 | 추천수4 | 신고 |
이제 가톨릭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성서 지상주의를 외치는 프로테스탄 트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인식의 출발점은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내세운 주장에서부터 비롯합니다. 그는 당시의 교회에 있었던 여러 가지 폐단과 함께 로마 교황의 권능도 부정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가르치 기를 "인간이 구원받는 데는 하느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타락한 로마 교회와 같은 조직은 인간에게 구원 을 주기는 커녕 방해하는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루터가 강조한 ’성서로만’(sola scriptura), ’은총으로만’(sola grat ia), ’믿음으로만’(sola fides)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가 뜻하는 바대 로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 론 개신교도 눈에 보이는 세례와 성찬과 같은 의식은 인정하나, 그리스 도에 의해 세워진 눈에 보이는 교회의 조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신 교회라는 조직이 물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은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요, 참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으로 맺어진 신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의 교회 이해가 이렇다 보니 자연히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나 성 서 해석, 신앙과 도덕 윤리의 문제에 관한 의문이 생기거나 판단을 해야 할 경우에 그 해석과 판단의 최종 결정은 각자 개인의 양심에만 맡겨지 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자를 구속하는 따위의 (어느 경우에도 필요 불가 결한 최소한의 선을 넘지 못하게 막는) 교회의 ’권위’는 인정될 수 없습 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의 양심은 프로테스탄트에게 있어 매우 중요 시됩니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프로테스탄트’ 이것은 개신교도들의 신 앙 생활 그 자체이며 개인의 양심 - 개인의 양심이 선악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반론(反論)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은 개인의 양심의 선하 고 악한 정도에 대한 판별은 각자 개인과 신과의 관계에만 국한된다고 강변하며 신과의 직접 대면 내지는 신에 의한 직접 심판을 통해 개인에 게 책임을 지울 수 있다는 개인적 구원론을 주장합니다 -을 억압하는 그 어떤 것들 - 권위, 전통, 윤리, 가치관, 심지어는 최소한의 사회적 상식 - 에도 반항한다는 식의 생활태도를 신자들에게 고취시켜 왔습니다. 그 러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사고 방식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다음의 말에 단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통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프로테스탄트인 한, 우리는 모든
전통을 거절한다. 그리고 오로지 성경에만 의존한다. 그것이 모든 프
로테스탄트 교회의 본질이며 공통된 원리이기 때문이다."(Sidney E.
Mead, The Lively Experiment: The Shaping of Christianity in Ame
rica, New York : Harper & Brothers, 1976, p.106).
그와 동시에 개신교는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세워진 눈에 보이는 교회 - 가톨릭 교회 -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인간에 의해 세워진 눈에 보이는 교회는 많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의 인조 창립된 교회와 가톨릭 교회를 같은 범주에 놓고서 바라 본다는 점이 그들과의 대화를 하는데에 있어 큰 장애물 중의 하나가 되 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 인식의 차이에서 출발하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대화에는 비오 11세 교황께서 1928년 1월 6일자 회칙(回勅) ’참 된 종교적 일치’에서 지적하셨듯이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 니다.
개신교의 교회에 대한 관점이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한 조직이라고 보는 이상 현대 국가 제도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민주적 의사 결정 즉’ 민주 주의적인’ 제도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러한 제도인 이상 의 견이 분분하고 국회나 정당 활동에서 보여지듯이 당파싸움이나 정쟁으로 인해 갈리어져 나가듯이 교파가 분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고 당 연한 귀결인 것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입장에서 본 교회는 매우 다른 성질을 갖습니다. 신 앙과 성령의 역사하심,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 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자신은 하 나의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이 가톨릭의 기본적인 가르침 입니다. 그 구성원은 모두 인간이요, 역사적으로 보면 눈에 보이는 이 교회에 인간이 만들어 덧붙인 것이 여럿 있으나, 기본적인 구성은 어 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직접의지에 입각해 있으며 인간은 이것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가 친히 정한 교계제도(교황, 주교, 사제)를 갖는 ’신자의 집단’ 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가 교회에 맡긴 임무와 동일합니다.
그 ’임무’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가르치는 임무’,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신자를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교도하는 일.
2. ’성화하는 임무’, 즉 눈에 보이는 7가지 성사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과 은총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리스도와 맺어주는 일.
3. ’다스리는 임무’, 즉 신앙생활과 교회 활동 면에서 지도하고 규정을 세워 그리스도의 양떼를 다스리는 일.
이 세 가지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2이며 3은 1과 2를 위한 것입니다.
또 가톨릭의 견해로 볼 때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 ,즉 가톨릭 교회가 하느 님과 인간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비방은 옳은 것이 아닙 니다. 그들 프로테스탄트들의 주장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만 아래 그림에서처럼 교회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 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이러한 것이라면 인간은 직접 그리스도와 맺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하느님이 아닌 것, 즉 인간적 인 것이 개재하여 결합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교회의 참모습을 그림으로 다시 나타내어보면 아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친히 세우신 가톨릭 교회 안 에서 인간이 직접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제도인 것입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인식 -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들의 신앙 공동 체라고 하는(마치 기원후 2세기 경의 Docetist(희랍어로 ’…인 듯하다’ 란 뜻) 이단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인(神人) 양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는 오직 신(神)으로만 존재했으며 단지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함) - 과는 판이하게 다른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보다 쉽게 하고자 간단한 유비를 들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자는 복사기나 컴퓨터, 세탁기, 휴대폰, 자동차 같은 문명의 도구들 을 이용하곤 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편리하게 사용하는 기계들이지만 이것들이 간혹 고장났을 경우에 는 혼자서는 고칠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수리하기에 알맞은 도 구가 없기도 하지만 이러한 기계의 작동 원리와 수리기술에 관한 노하우 를 도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제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 고 있는 전문가나 그 상품을 판매한 상점에서는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기계를 직접 제작한 사람이라면 가장 잘 고칠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인간의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은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어떠한 시련과 역경이 있어도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 어떠한 실패를 당하 더라도 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미움받 아도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 희망과 희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눈으 로 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에 의해 형제임을 눈으로 볼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도 추구합니다. 적어도 눈에 보 이지 않는 것이 주어졌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하 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인간의 일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에 구원을 얻 도록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수단도 주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라는 제도는 그리스도가 택한 눈에 보이는 구원의 수단 입니다. 물론 ’지금의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라든가, ’교회에는 성령이 활동하신다’든가, ’세례의 물을 받으면 새로운 생명 으로 다시 태어난다’든가 하는 것은 신앙상의 것입니다만, 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눈에 보이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며 또한 가톨릭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므로 좀 더 유비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저에게 1억 원을 줄 생각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거액의 돈을 주는 방법으로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1억 원을 드립니다"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현금을 건네는 방 법입니다. 둘째는 현금을 건네는 대신 1억원 짜리 ’수표’를 주는 방법입 니다. 이 방법은 주는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가장 편리합니다. 무 거운 지폐 다발을 은행에서 운반할 필요도 없겠고, 도둑에 대해서도 안 심할 수 있고, 현금이 필요한 때는 언제라도 은행에서 바꾸어 주기 때문 입니다. 셋째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 람은 저에게 현금도 수표도 주지 않지만, 대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1억원은 내가 보관하고 있는데 이젠 당신 것이니까 필요할 땐 언제 든지 가지러 오시오."
자, 혹 독자 여러분이 돌연 이처럼 1억원의 기부를 받게 되었다면 어떤 방법을 고르시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현금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하 겠지요. 또 세 번째 방법으로 받는다는 것도 역시 불안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로는 1억원을 받았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여 ’수표’를 받은 사람은 그 현금을 눈으 로 볼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수 표가 ’진짜’라야 하겠지만 누구나 세 번째 방법보다는 안심할 수 있다 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이해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주는 방법으로서 이 두 번째 방법, 즉 인간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방법 을 택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유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 그리스도 자신이 세운 교회는 ’수표제도’와 비슷합니다. 수표의 가 치는 그 종이라든가 잉크의 종류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이에 서명한 사람의 의지와 자격 그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제도의 가치는 그 구성원인 인간의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간을 사용하여 만드신 제도 그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 고 눈에 보이는 방법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톨릭이 이해하 는 교회는 인간을 성화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전문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교회는 하나의 ’성사’, 이른바 구원의 ’보편적 성사’ 인 것입니다.
그에 반해 프로테스탄트들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의지에 기인한 조직이라는 것과 진정한 참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들의 신앙 공동 체 즉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극히 부정 하는 Docetic한 태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만을 강조하게 만들었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성사와 교회의 존재 이유 에 대해서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위의 유비 가운데 프로테스탄트의 성정(性情)에 꼭 들어맞는 경우는 세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때 돈을 가지러 갈 수 있다는 그 단순한 믿음 한 가지인 것입니 다.
그런데 한가지 기괴한 것은 그토록 맹목적 믿음의 각양각색의 교파에 속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묶어주는 공통적인 특징은 그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감출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것은 바로 프로테스탄트 자신들의 내부에서 더 큰 진리를 갈망하고 있다 는 것에서 비롯하는 불안감입니다. 그토록 많은 이설(異說)과 괴이한 형 태의 종교 집단 -이른바 사이비 혹은 사교(邪敎) 집단으로 여겨지는 종 파- 가 유독 개신교에서만 출현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더 큰 진리에 대한 갈망이 프로테스탄트 안에서 그런 유형으로 표출되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 당혹스러운 것은 일부의 프로테스탄트들이 보여주는 가톨릭에 대한 노골적인 편견과 비방이 프로테스탄트의 몇몇 분파 교회들 로서 비록 소수이긴 하나 사실은 프로테스탄트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 반적인 정서와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과 서적 출판과 방송 매체를 통해 공 개적으로 가톨릭의 신앙과 교의 내용을 비방하는 것은 분명히 가톨릭의 신 앙을 공격함으로써 교리에 허술한 가톨릭 신자들을 자기 교파로 끌어들이 려는 저의(底意)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건대, 1960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교 재일치를 위한 가톨릭의 입장을 - 갈라진 형제들(프로테스탄트, 정교회, 성공회 등)에게 - 보다 분명히 밝혔지만 그 이후 1962년 8월 20일부터 24 일까지 노르웨이에서 열린 세계 침례교 연맹(Baptist World Alliance) 대 회에서 침례교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입장을 제임스 개럿 목사가 (1)논쟁 (2) 개종 혹은 전도 (3) 대화 의 세 가지로 정리 설명하면서 - 그 중에서 도 가톨릭과의 논쟁을 통한 개종에 더욱 주안점을 둔 것은 우리 가톨릭을 실망시킨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유럽 의 ’국가 교회주의’를 표방한 개신교가 아니라 미국에서 유입된 ’교파형 교회주의’ 내지는 ’분파형 교회주의’를 수입한 한국의 개신교가 이 땅에서 대중의 성정(性情)을 보다 더 잘 이용하고 있음을 각종 종교 통계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국적 대중의 정서는 감정과 이성의 두 가지 갈래 가운데 감정과 정서 적 감흥이라는 일종의 무속적 경향과 아울러 조선 시대 성리학이라는 유 교 문화를 거치면서 자의식 속에 생겨난 배타적 성향의 외고집이 현재 한 국에서 개신교가 가톨릭의 교세를 압도하게끔 만든 주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이성의 힘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음을 밝힌 스콜라 철 학에 근거한 가톨릭과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총만으 로를 외치는 정신적, 영성적 빈혈 상태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보면서 한국 에서의 가톨릭에 있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선교 방법의 개신교화가 아 니라 무엇보다 가톨릭의 고유한 영성과 이러한 가톨릭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신자들의 의식화라고 생각됩니다. 개신교의 간접 선교(병원, 학 교를 통한 사회 사업)가 성공한 것을 보면서 무조건적인 간접 선교에만 매달리는 것 또한 가톨릭의 선교 방법으로는 적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3)라 는 요한 복음의 말씀을 그들의 개신교 신앙에 대한 것으로 자주 인용하는 듯합니다만 성서 말씀을 온전히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우리 가톨릭 신 자들은 하느님의 참사랑을 받는 유일한 교도(敎徒)답게 아래의 성서 말씀 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늘 마음속에 되새기며 살아갑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
다." (요한 8, 31-33)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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