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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 비오9세, 교황의 무류권과 수위권 확립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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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9 조회수521 추천수1 신고

 

[11] 비오9세, 교황의 무류권과 수위권 확립

 

■ 비오 9세, 교황의 무류권과 수위권 확립

 

참된 종교개혁의 실현을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것을 성공리에

마치게 한 교황들, 특히 공의회의 결의를 실천에 옮긴 유명한 3명의 개혁교황에

이어,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교황좌에는 그렇게 유명한 교황들이 나타나지를

못했다. 이 시기의 교황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교황들이었으나, 그 이전과

이후의 교황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평범한 교황들이었다.

 

다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 혁명의 여파, 이탈리아의 국민운동, 자유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교황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교황들의 역사는 그것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고사하더라도, 우리 한국 교회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특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비오 9세와 그레고리오 16세는 한국교회와 매우 인연이 깊은

교황이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한국교회와 교황청’이란 제목으로 따로 취급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교황 비오 9세(1846-1878)와 레오 13세(1878-1903)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역대 교황 중에서 가장 오래 교황 위에 머무른 비오 9세 때의

치세 32년간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또 이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권이

통과되고, 또 교황령이 종말을 고하면서 교황이 자진하여 바티칸의 포로가 되는

등 격변중에서 중대한 사건들로 충만했던 시기이다. 비오 9세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에 많은 기대를 걸었었다. 상냥한 성격에 무엇보다도 자유주의 자요

애국주의자로 통했다. 그는 교황령의 통치를 위해 헌법을 제정하고 민중을

정치에 참여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1848년 반란이 일어나고, 교황령의 수상이 과격파 혁명가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교황은 도망쳐 피신하였고, 이어 로마에서 또 반란이 일어나자

비오 교황은 그의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즉 그는 외국군대의 간섭을 요청했고,

프랑스 군대의 도움을 받아 로마와 교황령을 되찾은 다음 전제군주 체제를 다시

채택했다. 그는 모든 자유주의적 사상을 비난하고, 시민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헌법을 일체 거부했다. 이렇게 그는 반동의 심볼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반란자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어 결국 교황령의 멸망을 초래했다.

 

그간 교황령은 이탈리아 민족통일 운동가들에 의해 다 빼앗기고 로마밖에 남지

않았다.

 

로마는 프랑스 군대가 주둔하면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철수하게 되니, 곧 이어 이탈리아 군대가 9월

20일 교황령의 최후 거점인 로마를 점령했다. 이로써 1천년간 존속되어 온

교황령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교황은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바티칸을

후퇴하였다.

 

이탈리아 새 정부는 1871년 5월 13일 일방적으로 소위 ’보장법’을 선포했다.

여기서 교황의 주권이 인정되고 일정한 연금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제의를 일축하고 ’바티칸의 포로’로 자처하면서 계속 항의했고,

신자들에게 정치참여까지 금지했다.

 

비오 9세는 교황령의 상실로, 오히려 보편적 교황직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교황이 교황령이란 영토를 갖고 군주 노릇을 하는 것이 ’나의 양을 치라’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적합한 것일까? 이런 질문에 중세기의 한 신학자는

이런 대답을 했다. 만일 교황이 세속사와 교황령을 포기하면 그는 정말

아버지(papa)로 불릴 것이고, 모든 이의 아버지요 교회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고 뿐더러 남이 일으킨 전쟁을 교황적

권위로 조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견되었던 찬스가 왔던 것이다. 그러나

비오 9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쨌든 이제 교황령의 상실로 인해 교황직의

외적, 정치적 세력이 사라진 반면에 교황직의 내적. 도덕적 영향이 커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황령의 멸망과 때를 같이하여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신조가 선포되었다는 사실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비오 9세 치세의 정점을 나타냈다. 그는

1854년에 성모무염시태에 관한 신조를 선포함으로써 이미 공의회의 소집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신조가 교황의 무류권의 방식으로

선포되었고 또 이 무류권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최대의 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10년후 교황은 공의회 소집 계획을 밝히는 동시에 소위 ’실라부스’를

발표했다. 여기서 당시의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등이 신랄하게 비판되었다.

 

비오 9세는 마침내 그가 오래 전부터 계획한 공의회를 1869년 말 바티칸에

소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1년도 못되어 이탈리아 독립운동가들의

’로마점령’으로 중단되고 무기한 연기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이란 최대의 두 의안을

의결하고 선포할 수 있었고, 이런 점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와 교회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선포된 교황령 중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요지는 이러하다.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서의 교황은

전교회와 모든 교구에 대해 완전한 주교권을 행사한다. 이 권한에는 신앙과

도덕문제만이 아니라 규율과 통치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모든 주교는 신앙과

도덕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과 교회 통치문제에 있어서도 교황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교황이 전 그리스도교 신자의 우두머리로서 권좌에서(ex Cathedra) 즉 책상

신앙과 도덕에 관해 어떤 발언을 하면 교황의 그와 같은 결정은 교회의 동의에

의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르칠 수 없고 또 변경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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