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5] 교황의 선거제도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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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8-29 | 조회수516 | 추천수1 | 신고 |
[15] 교황의 선거제도
■ 교황의 선거제도
우리는 지난 1978년에 실시된 교황선거에서 4백여년 만에 처음으로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 탄생한 사실을 보았다. 이분이 바로 현 교황,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황의 선거제도가 결코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2천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지혜와 이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초의 교황인 베드로는 사도들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교황으로 간택되었다. 그후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를 선정하는데 있어,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인간적 방법이 불완전한 것임을 늘 의심하면서 합리적인 선거방법을 모색해 왔다.
교황선거라면 오늘날 의례 추기경단을 연상하지만, 이 제도가 확정되기까지는 1천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아직 고정된 규정이 없었다.
3세기의 자료에 의하면 로마주교 즉 교황의 선거도 다른 주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지방의 성직자와 민중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점차 교황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 방법에 외부 세력이 간섭하게 되었다. 이러한 간섭은 4세기부터 시작되어 이때부터 로마황제, 로마귀족, 독일왕들이 교황선거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대비하여 교황들은 생전에 후계자를 임명하고, 또는 선거를 감시할 규정을 만들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비잔틴 황제들은 교황선거의 승인권을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이 시(6-8세기)의 교황들은 그들의 당선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그 승인을 얻어야 했다. 다음 9세기부터 11세기까지는 로마 귀족과 독일왕들이 교황을 해임하고 임명하는 등 교황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왕 하인리히 3세는 교황 문제로 로마 귀족들의 당파싸움이 그 절정에 도달했을 때인 1046년에 3명의 교황을 해임하고, 독일 사람을 새 교황으로 임명하였고, 그후에도 한동안은 독일인들이 교황좌를 점유하였다. 교황 선거에 대한 이러한 간섭보다 황제의 권세를 잘 나타내는 것은 없었다. 황제는 말하자면 교황의 상전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이러한 오만불손한 행위에 대해 곧 교회 안에 반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속인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키고 되찾으려는 교회 개혁에서 나타났고, 그 일환으로 니콜라오 2세 교황은 마침내 1059년 이후에 교황선거를 추기경 주교들에게 국한시키는 교황선거법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교황선거에서 속인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한 점에서, 교황선거사에 있어 전기를 마련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당시 추기경들이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추기경은 교회가 만든 제도이고 또한 교황이 임명한다. 추기경(cardinal)이란 본래 문의 경첩에서 유래하여 중추(中樞)를 뜻한다. 추기경들은 주요한 교회에 예속되어 그 중추를 이루고, 주로 전례와 자선사업을 맡아 보았다. 추기경들은 처음에는 로마에만 있었는데, 당시 로마의 추기경 수는 50명 가량이었다. 교황 선거가 추기경에게 유보됨으로써 그후 추기경의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다.
교황선거가 추기경단에 유보된데 이어 1179년에는 3분의 2의 다수결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최소한의 표수가 결정됨으로써 그간 잦았던 2중선거와 대립 교황의 출현을 예방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후로는 서구대이교의 단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대립교황이 없었다.
3분의 2의 다수결은 그후 불행히도 선거의 지연과 아울러 교황의 공석시기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교황선거의 안정성을 위해 상기한 추기경단과 3분의 2의 다수결 외에 또 하나의 요소가 첨가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콘클라베(conclave)이다. 이 말은 원래 열쇠로 잠근다는 뜻에서, 유폐(幽閉)당한 교황선거장을 뜻하게 되었다.
최초의 콘클라베를 이미 1241년에 있은 것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어쨌든 콘클라베는 그후에 있은 비테르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선거는 1268년 말에서 시작되어 1271년까지 거의 3년이 걸렸다. 5년째 되던 해 비테르보의 시당국과 착한 시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좀더 지혜롭게 신속한 결정을 자극하기 위해 추기경들을 감금하고 그들에게 빵과 물밖에 공급하지 않았다.
새 교황(그레고리오 16세)은 그 방법이 훌륭했음을 인정하고, 1274년 그것을 제도화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8일이 지나도 유효한 선거에 이르지 못하면 그때부터 선거가 성공되기까지 선거인 추기경은 빵과 포도주와 물 밖에는 공급 못받게 되어 있다.
그후에는 교황선거법은 계속 수정 보완되었을지라도 상기 세 요소, 즉 추기경단 3분의 2의 다수결, 콘클라베를 제외하면 세칙에 불과한 것이다. 식스토 5세는 1586년 추기경수를 70명이 넘지 못하게 하였으나, 요한 23세는 그 수를 증가 시켰다. 비오 12세는 3분의 2표에 1표를 가하였고(자신의 표를 막기위해), 요한 23세는 그것을 다시 3분의 2로 환원하였으며 바오로 6세는 다시 비오 12세의 결정으로 환원시켰다.
비테르보에서 시작된 콘클라베 제도는 오늘에도 적용되며 바로 이 방법에 의해 현 교황이 1978년에 선출되었다.
오늘날 추기경들이 교황선거를 위해 유폐되는 장소는 바티칸 궁전 안의 시스틴 경당이다. 교황선거에는 전원 추천(만장일치). 위임 등의 방법도 있으나 보통을 비밀투표로 결정된다. 오전 오후 두 번의 투표로 3분의 2의 다수결이 나올 때까지 콘클라베는 계속된다. 이때 선거장 밖 베드로의 광장에서는 로마시민들이 기쁨의 흰 연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투표용지를 태운 연기에서 교황선거의 결과가 알려지게 되어 있다. 검은 연기이면 미결이라는 뜻이고, 흰 연기이면 새 교황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새로 선출된 교황이 교황직을 수락하면 그 즉시로 그는 교황이 된다. 이어 새 교황의 이름이 발표되고, 추기경들의 순명선서가 있은 후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로마시와 전 세계를 향한 교황의 첫 강복이 내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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