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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8] 1522년 이래 이탈리아인 아닌 첫 교황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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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9 조회수510 추천수1 신고

 

[18] 1522년 이래 이탈리아인 아닌 첫 교황

 

■ 1522년 이래 이탈리아인 아닌 첫 교황

 

1978년 10월 16일 저녁 마침내 기다리던 흰연기가 교황선거장의 굴뚝으로부터

피어올랐다. 이날은 월요일 저녁, 1백 11명의 추기경들이 교황 선거장으로

들어간 지 이틀째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 앞의 광장을 메운 10만명을 넘는

대군중 속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들은 새 교황의 이름이 발표 도기를 기다리며

교황만세를 외치고 손벽을 치며 환호하였다.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앞 발코니에 서칠 라이트가 비쳐지고 추기경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펠리치 추기경이 발코니에 올라 새 교황에 관한 메시지를 라틴어로

전했다.

 

"여러분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새 교황이 탄생했습니다." 군중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그들의 박수갈채로 잠시 추기경의 말이 중단되었다. 펠리치 추기경의

말은 계속된다. "그 분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야입니다." 이

이름은 첫 순간엔 많은 이들에게 아프리카 사람을 연상시킬 정도로 이국풍으로

들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당황하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지?"하고 반문하였다. 곧 "외국 사람이다" "폴란드 사람이다"라는

말이 군중 속에서 들려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숨을 지었다. 1522년 이해

이제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사람이 교황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들은 이 놀라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하였다. 요한

23세 때부터 시작된 추기경단의 국제화로 말미암아 교황 바울로 6세의 서거 후

외국인이 교황이 될지 모른다는 말이 많이 나돌았다. 다행히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인 루차아니 추기경을 교황으로 뽑았다. 이어 그 이탈리아인 교황이

서거하게 되지 로마 사람들은 외국인 교황의 당선 가능성을 놓고 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었고 진짜로 외국인 교황이 나올 줄은

정말로 기대 밖이었다.

 

펠리치 추기경은 끝으로 새 교황이 요한 바오로 2세란 교황명을 택한 사실을

알리고는 사라졌다. 이 사실은 군중들을 조금 기쁘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故) 요한 바오로 1세의 연속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동시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요한 바오로 1세에 대한 존경을 뜻하였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곧 발코니에 나타나게 될 새 교황이 어떤 사람인가를 안타깝게

기다렸다. 그러나 인내가 필요했다. 교황이 나타나기까지는 아직 반 시간이 더

걸렸다. 마침내 새 교황이 발코니에 나타났다. 그도 고요한 바오로 1세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의 선임자의 것과는 다른 아주 남성적이고

건강한 웃음이었다.

 

이렇게 교황직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 교황은 곧 충격받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교량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그들에게 외국인

교황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주교요, 로마주교로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찬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군중들에게 교황의 첫

강복을 주기 전에 전통을 깨고 "예수 그리스도는 찬미를 받을지어다"고 하며

짧은 연설을 하였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서거로 아직 슬픔 속에 있습니다. 이제 존경하올 추기경들이

새 로마주교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새 로마주교를 먼 나라에서 택했습니다. 먼

나라?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전통 안에서의 공동체를 통해 항상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을 이국인으로 표현했다.

과연 폴란드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이국이었고 게다가 공산권 나라여서 더욱

이국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오히려 자신을 서방을 위한 전초지요, 서방을 위한

가톨릭시즘의 보루로서 이해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가까움’이란

곧 가톨릭 나라 폴란드와 로마 및 교황직 사이의 1천년간의 굳은 결합을 의미한

것이었다. "나는 이 지명을 수락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의 전임자도 같은

말을 했었다. 사실 오늘날 교황이 되려하고 또 그런 무거운 직책을 감히

지려하는 추기경은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명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감에서 교황직을 수락했습니다." 여기서 새 교황의

신심이 어떤 것이고, 무엇보다도 폴란드인들에게 공통된 성모께 대한 깊은

신심이 드러났다.

 

다음 카롤 보이티야는 웃으면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나라의 말로, 아니

여러분과 나의 말인 우리의 말로 인사하고자 합니다. 내가 말하는 도중에

틀리거나 실수를 하면 여러분께서 나의 말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광장에는 박수가 울려 퍼졌다.

 

이 말에서 로마인들은 그들이 보이티야에게 속해 있고 보이티야는 그들에게 속해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군중들은 교황의 이탈리아 말을 이해했다. 비록 낯선 액센트이고 이탈리아

사람의 이탈리아 말은 아니었을지라도 이탈리아말을 완전히 매스터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르칠 수 있음을 민중들 앞에 솔직히

고백하였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려는 어려움에 그들의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런 말을 아주 겸허한 자세로 했다. 그는 비록 높은 발코니에

있었을지라도 마음으로는 로마 군중의 한 사람이 되려 했다.

 

로마인들은 비록 보이티야가 먼나라 이국에서 왔을지라도 그들과 같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새 교황은 처음부터 자기가 결코 외국인이 아님을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실제로 보여주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꾸준히 자신을 이탈리아화하려 했고,

로마화하려 했다. 그는 착좌식에서 "이제 로마 사람이 아니라 폴란드 출신의 한

주교가 성 베드로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는 로마사람이 될

것입니다."고 말하였다. 그가 첫 나들이로 이탈리아의 주요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의 무덤을 찾기로 한 것도 아마

하루 빨리 로마인이 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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