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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6] 교황 호노리오는 왜 단죄를 받았는가?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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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9 조회수556 추천수1 신고

 

[36] 교황 호노리오는 왜 단죄를 받았는가?

 

♤문: 680년의 제6차 공의회에서의 교황 호노리오에 대한 단죄는 당시의

주교들이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답: 그렇지 않다. 그 사건과 관련되는 사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교황

호노리오는 625년에서 638년까지 교황직에 있었다. 이 기간동안에 비잔틴

제국에서의 교회는 신학적인 논쟁으로 인해 여러 당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행위와 신적 행위’에 대해 논할 때

한가지 작용이라고 표현하는게 정확한가 아니면 두 가지 작용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가 하는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세르지오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관련된 당파를 간에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교황 호노리오와 교섭을 했다. 그는 호노리오에게 이번

일은 말싸움에 지나지 않으니 양쪽의 표현을 다 배제하고 이 이상의 공적인

논쟁을 금하도록 제안했다. 호노리오는 이에 대한 응답에서 양쪽 표현을 다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 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의지만을 인정 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호노리오 교황의 이러한 선언은

논쟁을 격화시켰을 뿐이다(이 말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참

인간인 동시에 참된 신이기 때문에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그후 40년 동안 동방교회에 큰 해를 끼친 새로운 이단,

즉 그리스도 단의론(單意論, 그리스도에게 한 가지 의지만 존재한다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세르지오는 설명서를 작성했는데,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를 638년에

공포하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한 작용’이나 ’두 작용’의 표현을 다 피하고

그리스도의 한 가지 의지만 인정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황제의 이 칙령이 포고되었을 때는 호노리오가 이미 사망한 후였으므로 그가

어떻게 이 포고에 반응을 보였을 것인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두 교황 세베리노와 요한 4세는 설명서를 단죄하였으며,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641년 그가 죽기까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황 요한 4세는 설명서를

단죄함에 있어서 ’한가지 의지’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아님을 지적했다.

그러나 호노리오는 이 표현을 정통적 의미로, 즉 그리스도가 두 개의 모순되는

의지를 갖고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했음을 밝히며 호노리오를 비난에서

구했다.

 

648년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설명 대신에 또다른 문헌을 발표했는데 그는 여기서

당시 논의되고 있던 교의에 대한 논쟁은 일체 피하고 다만 모든 이들에게

’한가지 의지’ 또는 ’두개의 의지’라는 표현을 사용을 금했다.

 

상기 두 문서는 649년의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마르티노 1세에 의해

단죄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콘스탄스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끌고 가서 크리미아로 유배시켰다. 교황 마르티노 1세는

그곳에서 큰 고통을 당한 끝에 655년에 사망했다.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6차 공의회는 ’한 가지 의지’의 교의를 주장했던

사람들을 모두 단죄함으로써 길게 끌어 온 논쟁을 마무리지었는데 단죄된 사람들

중에는 교황 호노리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도적 전승의 가르침으로써

사도적 교회를 성화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에 큰 배반을 통해 그 가르침을

타락시킨 호노리오를 파문한다." 교황 레오 2세는 이 공의회의 판결을

인중하였다.

 

공의회에 의해 행해진 이 단죄는 교황의 무류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호노리오는 전 교회에 대해 신앙의 장엄한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황의 무류성은 전 교회에 대한 그러한 신앙의 장엄한 정의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는 것이다. 호노리오가 개인적으로 그릇된 교의를 신봉하고

있었다는 비난에 대해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그가

세르지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단을 명백히 긍정하지 않았다는 것, 당시의

유식한 신학자들은 개인적으로는 호노리오를 정통적으로 간주했다는 것,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도 그를 공식적인 능력에서 이단적인 교리를 강요했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의 태만에 의해 이단이 조장된데 대한 비난이었다는 것,

교황 레오 2세가 호노리오에 대한 단죄를 인준한 것은 호노리오가 초기에 이단적

교리의 불씨를 제거하지 않고, 그의 태만으로 인해 오히려 이를 선동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레오 2세는 호노리오가 행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즉 그가 이단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의 직무를 게을리한 데 대해서, 즉 그가

할 일을 하지 않은데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유명한 사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주교들이 교황의 무류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류성의 교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과 일치하는 것이다.

주교들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판결문들을 구속력을 갖도록 인준을 받기

위하여 교황 레오 2세에게 보냈다는 사실은 이들이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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