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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6] 왜, 가톨릭인들은 교황의 세속권력을 인정하는가?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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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9 조회수517 추천수2 신고

 

[46] 왜, 가톨릭인들은 교황의 세속권력을 인정하는가?

 

 

 

♡문: 왜 가톨릭인들은 교황의 세속권력을 옹호하는가? 그리스도는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18,36)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1870년에 교황은

통일된 이탈리아를 위하여 스스로 교황령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 아닌가? ’로

마 문제’는 이탈리아의 비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거부함을 암시하

는 것이 아닌가?

 

 

♥답: 교회는 오직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세워진 영적 나라이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교황들의 세속적인 권력은 그들의 영적인 권한을 위해 결코 필

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교황의 신적 권한의 존속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영

속적인 현존에 의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첫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한 권위를 갖고 다스렸고 반면에 이교도 황제들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인들은 교황이 그의 최고의 범세계적인

교정권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어떤 세속 군주에게도 소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항상 고수하였다. 1849년 비오 9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국민이건 왕이건 국가건 간에 만일 그들이 교황을 한 군주나 정부에 소속된 국

민으로 보고 또 그가 완벽한 자유를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들

은 결코 신뢰감과 믿음을 가지고 자유로이 교황에게 의지할 수 없을 것이다. 사

람들은 항상 교황이 어떤 행위를 하는데 있어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군주나 정

부의 영향력을 입지나 않을까하여 끊임없이 걱정하고 의심하여 왔으며 이를 핑계

로 교황의 교령들이 종종 지켜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역사가 기조는 이런 말을 했다. "교황직 안에서 영권과

속권이 결합되게 된 것은 체계적인 발전에서 온 것도 아니고, 추상적인 원칙이

나 야심에 찬 의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물론 때로는 그것이 이론이나 개인

적 야심들과 얽혀들기도 했으나 교황의 세속 권력을 초래한 것은 필요에서였다.

즉 끊임없이 증대되어온 데 기인한 것이다. 피핀과 칼 대제의 증여는 이미 시작

된지 오래고 또 국민의 선한 의지와 군주들의 호의에 의해 지지되어 온 조직을

마무리한데 불과했던 것이다.

 

 천년 이상의 오랜 기간에 걸쳐 신성화 되어온 교황의 세속 권력은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끝이 났다. 교황들은 그들의 존엄성

과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처음에는 ’보장법’의 수락을 거부함으로써, 다음은

’바티칸의 포로’로 남음으로써 이탈리아에 의한 교황령의 강탈에 대항하였다.

 

 교황들은 1871년 5월 13일자 보장법과 교황령의 강탈에 대한 금전적 배상을 받아

들이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환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계약이었으

며, 새로운 국회가 자유로이 이를 적용하고 해석하고 변형시키거나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탈리아 법에 의한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교황의

자유와 독립을 전혀 보장해주지 못했다.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교황들과 이탈리아 사이에 화해가 이루

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뭇솔리니의 등장으로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그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우선 ’로마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그가 소유

하고 있던 독재자로서의 권력은 국회에 의존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어떤 정치가도 일

찍이 가져보지 못했던 기회를 그에게 제공해 주었다. 1926년 초여름에 라테란 조약

과 정교조약(政敎條約)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바론은 정부를 대표하였고, 파

첼리는 교황을 대표하여 이에 참여하였다.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100회 이상의

회의가 열렸으며, 교황 자신도 그가 파첼리에게 허용한 29차례의 알현을 통하여 모

든 세부 사항들을 신중히 검토하였다. 1928년 11월 22일에 마지막 안이 완성되었으

며 1929년 2월 11일에 추기경 가스파리와 무솔리니는 라테란 조약과 정교조약에 서

명을 하였다.

 

 서문과 27개 조항으로 구성된 라테란 조약은 교황성좌를 독립국으로 확립시켜 주고

있다. 라테란 조약은 비가톨릭 교도들에게 변함없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한편,

가톨릭은 국가의 유일한 종교로 선언하고,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다. 또 바티

칸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승인하였고, 교황의 신성불가침함을 선언하였으며, 추기경

과 바티칸 당국자들, 외교 사절들의 지위를 규정하였으며, 여권과 관습과 재산권 등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라테란 조약은 사보이 왕조의 합법성에 대한 교황의

인정과, 그가 영적 수위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그에게 보장된 독립성에 완전히 만족

하고 있다는 엄숙한 선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렇게 해서 ’로마 문제’가 종결되기

에 이르렀다.

 

 

 1929년 비오 11세는 사순절 설교에서 그가 바티칸 시를 요구한 작은 영토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어떠한 영토적 탐욕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움직일 수 없으나 그것은 오직 양보

불가능의 영토에 대한 자각임을 우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

다. 왜냐하면 이러한 영토적 주권은 모든 주권적 통치에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보

편적으로 인정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권 자체를 유지하기에 충분할 만큼

의 최소한의 영토는 필요한 것이다. 영토가 없으면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기 때

문이다. 우리는 영토가 최소한으로 축소된 것을 기뻐하지만 그것으로써 영적 권위는

지탱될 수 있고, 또 지탱되어야 할 것이다."

 

 

 

 

 

 

 이 현명한 말을 통해서 교황은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그리스도

의 말씀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생각이 얕고 편협한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이 이탈리아 안의 한 작은 영토의 왕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의

왕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권의 행사에 필요한 한에서만 그의 왕권을 요구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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