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411] 명상에 관한 답변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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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승근배 | 작성일1999-09-08 | 조회수836 | 추천수3 | 신고 |
Re 411:명상에 대하여
우선 세계그리스도교 명상공동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묵상회"는 알겠지만 그게 그건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형제님께서 관심있어 하시는 명상에 관한 것입니다. 부족한 설명입니다만 조금이라도 형제님을 비롯한 다른 이웃들께도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20세기에 들어 서양에서는 동양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급속도로 물질화된 서구문명에 비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영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문화로 대표되는 생활권에 산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다른 쪽에 눈을 돌리기 됩니다. 대다수의 가톨릭신자들은 이미 가톨릭의 유구한 영적인 유산에 대한 흥미를 잃은 뒤였고 좀더 쉽고 구미에 맞는 영적인 자양분을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을 이래 보니 달라이 라마라든지 많은 승려들이 득도를 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소개되는 많은 책자들- 배꼽(라즈니쉬), 성자가 된 청소부(요기 바바하리다스), 히말라야의 성자들,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성서속의 붓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그리고 영화 티벳에서의 7년 등을 통해 너무나 신비스러움이 더해 갔습니다. 동시에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게 됩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가톨릭의 기도방법보다는 그게 더 보기 좋아 보였던 거죠. 그리고 의아스런 얘기지만 예수님께서 청년시절을 티벳에서 사시면서 득도하셨다는 "이사전"이라는 책도 발굴됩니다. 예수님도 찾아간 동양! 너무나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동양의 선사상, 명상기법을 가톨릭의 영성에 도입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동양의 선인을 초청한다거나 아예 득도를 하고자 인도 등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신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판이 하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글을 인용합니다. 읽어보시고 예수님께서 정말로 티벳에서 청년시절을 보내셨다면 이러한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으셨겠는지, 얼마나 큰 종교적 괴리감을 느끼셨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단지 하나의 개념이나 상태로서만이 아니라 분명히 인격체로서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고 하는 개념은 지극히 친근하고도 중요한 인격적 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구약 및 신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핵심적인 개념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Covenant)의 개념이다. 이 계약은 인간 사회에서의 거래에서 말하는 계약(Contract)과는 다른 것으로서 인격체와 인격체 사이에서 상호간의 全的인 충실을 전제로 하는 밀접하고도 굳고도 영구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이 계약(Covenant)을 어기면 배신이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부르시는 관계는 이러한 계약에 의거한 확고한 충성과 사랑의 관계이며, 그보다 먼저 당신께서 당신의 독생성자를 인간 세계에 보내시어 수난하고 죽으시는 피의 계약을 맺어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동양 사상에서의 하느님의 개념은 상당히 다르다. 하느님은 우리와 구별되는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우리 자신 속의 나쁜 것들을 다 떨쳐버림으로써 도달될 수 있는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또 이러한 신적인 경지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를 권선징악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따르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신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상 만물에 신의 본질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범신론적인 개념도 쉽게 발견된다. 구약 및 신약 시대에 걸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개입하시는 인격체이신 유일신 하느님과는 대단히 다른 관념들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인격체로서 인식되지 않는 동양의 사상에 의하면, 위에서 말한 계약(Covenant)의 개념도 성립되지 않으며, 하느님께의 충성이나 불충이 논의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죄의 개념도 달라진다. 全善하신 하느님의 뜻을 어긴 데 대한 보속의 필요성도 없으며 구세주의 필요성도 의식되지 않는다. 구세주의 활동을 계속하는 교회의 개념도 변질되어버린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보다는 하나의 신자들의 공동체로 인식될 뿐이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관계가 더 강조되는 것이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지 않고서도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되므로, 이러한 사상을 크리스챤 신앙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Mary’s Touch By Mail/ 우리는 가톨릭 신앙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 중에서-이분도
구약시대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노여워하셨던 잘못은 혼합주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오직 당신만을 믿고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민족을 쳐부술 때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라는 냉정한 말씀까지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이민족이라해도 그들이 미우셨겠습니까? 그러나 당신 하느님만을 따르는 유대민족을 보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왜 보호하고 싶으셨을까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민족이 사용하던 모든 물건들까지 없애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에 근접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만 요소까지도 차단함으로써 당신만을 사랑하는 민족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정착하고 농경문화로의 변화를 거치면서 하느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게 됩니다. 처음엔 농사에 관한 것에만 바알을 숭배하고 다른 때에는 하느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하느님을 믿는 건지, 바알을 믿는 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앙이 탄생되게 됩니다. 나중에는 태양도 믿고, 뱀도 믿고, 달도 믿고, 지가 믿고 싶어하는 것 모두 다 믿는 천박한 원시신앙으로 퇴화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성서에서는 이것을 "창녀짓"이라고 말하죠.
유대교의 전통을 소화해낸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 속에 이루어진 사건을 교훈삼아 2000년이 지난 이제껏 다른 종교의 문화를 따온 적이 없습니다. 만약 역사 안에서 그런 노력이 있었고 그 노력을 교회가 인정하였다면 가톨릭교회는 지금의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하느님은 지금의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서양뿐 아니라 동양의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토착화를 운운하며 동양사상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를 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동양사상을 공부하기 전에 가톨릭 교회의 영성생활에 대한 고찰은 얼마만큼을 투자했는가를 말입니다. 그리고 동양사상에 솔깃한 신자들분께는 먼저 남의 것을 탐내기 전에 우리의 것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이면서도 가톨릭인입니다. 가톨릭의 정통문화를 유지, 계승해야 할 사람도 바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때문에 한국적인 문화와 가톨릭의 문화가 서로 상응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문화현상에 대한 깊은 숙고가 무엇보다도 앞서 필요하겠지요.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명상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명상기법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의 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지혜를 얻음으로써 도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 내적인 평화, 건강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명상 안에서 자신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하고 있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언제나 단절된 채 자신만의 하느님을, 그리고 전혀 엉뚱한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사로잡혀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느님을 찾았다고, 득도를 했다고 기뻐하겠죠.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분이 잠시 좋아진 것뿐입니다.
또한 명상기법은 우리를 가톨릭교회 안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명상을 한다고 해서 동양적인 명상의 "방법"만을 따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용구까지 쓰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용어까지도 쓰이게 됩니다. 차츰차츰 다른 종교의 문화가 우리에게 스며드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가톨릭교회 안으로... 구약의 바알처럼.... 나중에는 가톨릭 교회는 필요 없이 자신만의 명상생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람들도 생길 것입니다. 명상 잘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도를 얻는데 굳이 주일미사는 무슨 필요이며, 이웃사랑은 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절차복잡하고 요구사항 많은 가톨릭보다는 개인적으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명상기법은 얼마나 큰 이 시대 현대인들의 복음이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 다른 종교로 이교한다거나 자신만의 종교를 가지고들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단학이나 기공을 병행했던 친구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학 등을 배우기 전에는 평일미사도 잘 나가도 그랬는데 배우면서부터 평일미사는 나가지 않게 되고 심해지니까 주일미사도 거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곳에서 육적인 건강이나 정신적인 안정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며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은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친구는 그것을 깨닫고 저에게 와서 그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로 알려진 안소니 드 멜로 신부의 글이 금서조치되었습니다. 금서조치에 대한 이유가 그 분께서 후에 가톨릭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였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건 그분에게 일어난 일일뿐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분의 글을 읽고 났을 때 떠오르게 되는 것은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불교, 힌두교 등의 다른 종교라는 것입니다. 또는 혼합종교입니다. 비록 영성적으로 탁월하였고 많은 이들이 인정하였긴 하지만 가톨릭아닌 외적요소를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면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자들을 가톨릭의 진리 안에서 보호할 책임을 다한 바티칸의 고민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가톨릭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상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골로사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헛된 철학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들어서 전해 준 것이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은 아닙니다."(2,8) 여기서 말하는 헛된 철학이 점치러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신다면 유아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이겠죠. 이 시대의 헛된 철학- 선사상, NEW AGE, 단학, 기공 등을 멀리하십시오. 보기엔 좋아 보이나 거기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의 평안만을 누릴 뿐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은 보장받지 못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누군지 모르겠고 그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명상에 관심이 있어서 그 책을 읽고 계시는 것이라면 십자가의 성요한, 아빌라의 성 데레사, 성 카타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기나 편지, 집필서를 먼저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 분들의 글에서 달라이 라마의 명상보다도 탁월한 "가톨릭의 관상"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도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싣고 있는 책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정신적 수양은 성체조배입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 형제님께서 구하시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형제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그것을 다른 곳에서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다 미리 마련해 두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WORKER
(추신 RE;412 / 성서에 예수님의 청년시절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 복음사가들의 관점은 예수님의 강생과 고난, 십자가의 죽음, 부활이었습니다. 때문에 청년시절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시절 가지고 운운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것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괜히 말 만들길 좋아하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예수님의 청년시절까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삶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만 알면 됩니다 그 외의 것은 세상의 헛된 지혜를 쫓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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