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411] 명상의 허구성에 대해서 - 오류는 역사속에서 반복된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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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9-09 | 조회수557 | 추천수2 | 신고 |
아래 승근배님이 올려 주신 글에서 이미 명상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 해주 셨으니 저는 긴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계시 종교 가운데 명상법이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가톨릭에서만 성덕이 탁월한 성인이 유독 배출된 것을 아시게 될 것입 니다. 이것을 보고서 가톨릭의 영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다른 계시 종교들 (이슬람,그리스 정교회)에서 자신들도 성인이 나올 수 있도록 예전에 시도한 신비주의적 명상법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슬람의 것은 수피즘 신비주의로 남아있으나 정교회의 수도원에 서 수도자들에게 전해지던 ’하느님의 빛’이라는 명상법은 이미 천년 전에 소 멸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하느님을 찾는 방법에 명상법은 전혀 필요하지 않기에 그렇습 니다.
유독 명상법이 발달된 곳을 지도를 펴 놓고 찾아 보시면 무언가 알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연종교가 왕성해서 도무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참 된 종교가 들어설 여지도 없었던 하느님의 은총에서 소외되었던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동양권에 속한 모든 나라들의 암담한 처지였음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당연히 명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마약 주사에 환각 상 태로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명상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위배되는 점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이 들 정도입니다만 그 중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우선 하느님과의 관계 그 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고 오로지 자신만의 만족감에 빠져 헤어날 수 없게 하는 악마의 속임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망각하게 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는 말씀 그리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증거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의 계명을 값어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명상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아주 잠깐 이슬람 수피즘의 영향으로 그리스 정교에서 천년 전에 생겨났으나 자연 소멸되 었음은 우리의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임을 그 자체로서 반증해 주고 있 다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잘 아는 이가 반드시 하느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악마들도 하느님 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마들은 하느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 벌 벌 떨지만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본성을 약하 게 하는 명상법으로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의 성덕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이슬 람과 천년 전의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자들의 전철을 우리 가톨릭 신자가 되풀이한 다 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톨릭 신자들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헛된 인조(人造) 사상에 그리고 악마의 속임수에 솔깃하는 세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도 깨닫지도 못하지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가톨릭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단지 역사가 아니라 진정한 참신앙의 승리이며 숱한 인간의 죄악과 악마가 꾸며낸 오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값진 기록들이기에 언제나 현재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오류는 그대로 변함없이 계속 반복되고 진리만이 최후의 승자로 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 성립 후 2세기의 이단이었던 도체티스트파에 이어 3세기의 몬타누스 이단파, 4세기의 아리우스파, 아노모이오스파, 마케도니우스파, 5세기의 네스토리 우스파, 그 이후의 그노시스파, 펠라지안파, 요비니안파, 모노피지스트파 등의 이 루 헤아리기도 어렵고 이름만 희미하게 역사 속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의 흔적과도 같은 이단파의 계보가 현대에 이어져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나타남을 두 눈으로 확인 하면서 하느님이 부여하신 흐려지지 않은 지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다 그들간의 시 간적 공간적 간격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단파간의 놀라우리만치 닮은 유사 성에 전율하지 않을 이가 없을 것입니다.
진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듯이 인간 정신에 스며든 죄악의 결과로 사람들은 악 마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끌려가므로 오류 또한 세기를 뛰어 넘어 시간과 공간의 적 막한 간격을 단숨에 가로질러 과거 이천 년 전 혹은 천년 전의 모습 그대로 다시 등 장하건만 그 시기동안 살아남아 그 동안의 세월을 볼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그러한 인조적인 것들을 언제나 새롭고 신비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가톨릭의 진리보다 새롭고 신비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가톨릭의 진리는 사막의 한가운데 몰아치는 모래폭풍에도 끄덕하지 않는 진리의 굳 센 기둥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고통이요 험난한 시련의 가시밭길인 이 세상에서 누구의 날개 밑에 편히 쉴 것이며 누구의 굳센 팔에 의지하겠습니까?
우리들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월등하게 명석하고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고 하더라 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이 빚어낸 허망한 것들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참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구원의 길을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하십시오. 당신이
주의 기도를 기도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면 당신은 성인(聖人)의 길로
인도받을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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