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考察]개신교 근본주의의 공통적 경향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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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10-02 | 조회수714 | 추천수3 | 신고 |
개신교 근본주의의 공통적 경향
위의 글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근본주의 각 그룹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있으나, 근본주의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경향들이 존재하고 있습니 다. 여기서 정의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경향’인 만큼 모든 근본주의 파들이 여기서 말하는 특성들을 모두 가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1) 율법주의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율법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가 많은 것 으로 여겨지며 그 중에서도 제일 큰 오해를 하는 부분이 아마 율법이라 는 단어의 뉘앙스가 아닐까 합니다.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이 율법에 매 달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No’ 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에서 차근히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은 그들의 구원 신앙이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계속 강조합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기본 특성은 아이러 니하게도 율법주의입니다. 필자가 말하는 율법주의란 것은 종교나 도덕 의 규율 그 자체를 위해 글자 그대로, 혹은 극단적으로 그 규율을 준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본주의파들은 하나같이 성서를 절대적 권위로 내세우며 모든 질문에 율법적으로 대답하려 듭니다. 이들에게는 성서가 마치 법률 조문과도 같 습니다. 이 율법적인 성서 이해의 이면에는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라는 믿음, 즉 하느님이 성서 기록자들에게 그가 원하 시는 대로 그 말씀들을 불러주셨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세부 기록에 있어서도 근본주의파들은 절대로 틀림이 있을 수 없 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적, 지리학적 그리고 우리가 틀렸다고 알고 있는 우주의 세부적인 것들 조차도 말입니다. 성서의 정밀, 정확성에 관해선 기회가 되는 대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이 성서를 법조항처럼 사용한 것이 율법신학을 태동시켰습 니다. 이들에 따르면 누구든지 지켜야 할, 보편적으로 수긍된 믿음의 체 제가 있으므로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순 적이지만, 근본주의파들의 교리 중 대부분은 - 적어도 그들이 가르치는 형태의 교리들 - 불행히도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서에서는 도저히 찾 아 볼 수 없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우리의 ’개인적 주님이며 구원자’라는 말씀은 성서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구절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주의파들이 그것을 잘못 쓰고 있는 부당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호하며 즐겨 쓰는 단어 중의 하나인 ’희열(Rapture, 우리말 표현은 휴거가 더 익 숙할 것이지만)’ 역시 성서 어느 곳에도 씌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성서가 "전혀 틀림이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성서 어디에도 기 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서 수차례 이야기했었지만 가톨릭의 이 해로는 성서는 모든 구절들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씌어진 것이라고 설 명합니다.)
더 나아가 근본주의파들이 사용하는 슬로건 중 어느 것 하나도 실제로 초대 교회가 중요하게 여겼던 점들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이 슬로건들은 겨우 지난 2세기동안에 근본주의파들의 회합을 통해 만들어 진 것들입니 다. 이런 분명한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 신학은 그들의 신 앙이, 아니 오직 그들의 신앙만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이 된다고 주 장합니다.
근본주의의 율법적인 신학은 근본주의가 권장하는 율법적인 생활양식으 로 이어집니다. 필자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그들 중에는 기발함이나 창조 적인 면들이 거의 없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의 삶에 첫발을 내딛는 의식은 설교대 앞에 나가 그들의 신조를 공공연히 선언하는 법적인 형식입니다. (이것은 시민권을 획득하 기 위해 충성을 약속하는 선서와 흡사합니다.) 이제 이 근본주의파가 만 들어 낸 의식과 초대 교회의 입교 의식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초대 교회는 입교자들이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교리 답습이란 장기간의 지도를 받게 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늘 이 세례 성사를, 한 인간의 공 적인 지위에 관한 율법적 선언이라기보다 위대한 신비로 간주해 왔고 그 렇게 해왔습니다. 근본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신비를 뿌리채 뽑아 내고 그 자리에 법적인 확실성을 심어 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근본주의파의 삶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들의 목록으로 격하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유로의 초대(의도한 대 로)가 아니고 지켜야 할 규율의 법적 체계가 되었습니다. (물론 가톨릭도 이러한 정신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 습니다. 목적과 수단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언제나 바로 위치한다는 말 입니다. 가톨릭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근본주의파의 생은 개인의 신성함에 대한 위대한 추구이며 한 개인의 거룩한 삶에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결과로 근본주의파들은 죄와 악의 복합성 그리고 특히 사회적 차원의 불공평 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알맞는 대 답만 있으면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주의파들이 율법 위주의 윤리관 을 신봉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예수님(다른 모든 인간도 포함해서) 의 인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이 그러하기에 그들은 십자고상에서 예수 그 리스도를 내렸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들의 십자가에는 고통받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고통받는 십자가가 아니라 단지 아무 의미도 없는 십자가의 형상을 한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Docetists(도체티스트)들입니다 - 그리스 어로 ’… 인 듯하다’ 는 뜻으로 Docetism은 기원후 2세기경 성했던 불가지론자들 의 이단적 논리를 말하며 예수님이 오직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 장했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 인간과 같았다는 것을 믿기 어 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예로 그들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이 포도 쥬스(grape juice)를 쓰셨다고 주장하며 또한 이 사실을 매우 과장해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의 일상 음료수가 포도주였던 것은 거론할 여 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을 상상 조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 죄인들 을 사랑하셨고 그들과 가까이 하시고자 원하셨다는 것이 믿기 어려운 모 양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죄인이란 그들이 복음을 전파해 주어야 할 ’영혼’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만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었으며 모든 면에서 자유롭게 그들과 생활하셨습니다.
1980년 쿠바의 피난민들이 플로리다 주에 몰려들었을 때 어떤 TV기자 가 한 근본주의파 목사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습니 다. 그때 그는 "나라면 그들을 다 구원받게 한 후에 모두 쿠바로 되돌 려 보내겠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은 예수님을 단지, 죄 인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억지로 당신이 다가가면서 더러운 죄인들 과 만나시는 분이라고 보는 모양입니다. 성서는 근본주의자들의 생각과 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정말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그러기에 인간적인 그들의 삶에 인간적인 모습으로 들어가 셨습니다.
또한 근본주의파들은 예수님의 은총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구체화 (즉, 물질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당신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란 구절이 이를 잘 설명 해 줍니다.
실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간적 삶 속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아이러 니컬하게도 근본주의자들은 정반대되는 상황을 강조함으로써 성서적으로 삶을 보는 견해를 근본적으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당신은 하느님을 찾았습니까?" 혹은 "당신은 하느님을 영접했습니까?"란 질문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을 것 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찾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경험을 통해 서 그들 삶 속의 하느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마치 찾아질(그리고 소유될) 별개의 존재로 보았다기보다 그들의 삶 속에 친 근하게 오시고 또 그들의 역사 속에 살아계심으로써 그 모습을 나타내시 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근본주의는 하느님의 은총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가 맺어지는 어떤 순간이나 사건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소유 가 능한 ’사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구원이라는 결정적 순간’ 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즉, 인간이 한번 하느님 의 ’은총’을 받으면 그는 틀림없이 구원된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마치 기차표를 한번 사 놓으면 기차표를 가지고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기차 역에 가지 않고도 그리고 제 시간에 제 날짜에 가지 않아도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해도 기차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근본주의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이란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뜻은 성서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공동생활 안에서 나타나는 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에 순명하는 우리들 자신의 뜻을 말합니다.
삶, 예수님, 은총, 하느님의 뜻 등은 결코 어떤 공식이나 소유물로 전 락될 수 있는 양적인 물건이 아닙니다. 이 모두는 우리의 이해 범위 밖 에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개념들을 자주 수학적인 등식 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궁극적인 신비이 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대상으로 축소시킨다면 이는 곧 우리 의 형상대로 그분을 왜곡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욥기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 -훌륭한 근본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은 그들이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이 그의 근본주의파 친구들이 알고 있 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역사에 대한 무지
11살때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우리 집 앞에서 내 어머니와 어떤 근본주의 파의 여인이 자기들의 서로 다른 종교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듣고 있었 습니다. 반 시간 가량의 논쟁 끝에 그 여인은 발을 탕탕 구르고, 그녀의 성서를 소리나게 내려 놓으며 우리 어머니에게 "한 마디만 더 하겠어요. 만약 사도 바오로가 킹 제임스(King James) 역본 성서를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야겠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화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교회와 성서의 역사적 발전에 대 해 아주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한 예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의 광고판에 그들의 교파가 "서기 33년에 예수님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근본주의자의 예입니다. (실상 이 교파는 19세기에 살았던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에 의해 시작된 교 파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종종 역사를 무시합니다. 그들은 성서와 그리스도 교회 가 특정한 역사적 배경에서 근원했고 특정한 역사적 격동 속에서 그 형태 를 갖추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다시 예를 들면 근본주의자들은 그 들의 교회가 신약 성서에 묘사된 그대로이고, 세계 역사의 변동 속에서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고립된 채로 존속했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순 수한 성서적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그러한 교회는 과거 사도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존재한 적 도 없으며 존재할 뻔한 적조차 없었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우상 숭배가 극에 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들 이 존경해 마지 않는다는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은 사도 바오로가 ’성서’라고 새겨진 가죽제 본의 킹 제임스 역본을 들고 선교 여행을 다니며, 마치 그가 ’바오로 서간 들’을 그의 청중에게 읽어 준 것처럼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초대 교회가 신약 성서에 어떤 책들을 포함시킬 것인가를 암시적으로나 마 결정하기 전까지는 2세기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물론 성서 목록을 교 도권에 의해 정식으로 결정하기까지는 2세기란 시간이 더 걸렸음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초대 교회는 점차적으로 늘어 나는 성서 문학뿐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주교)들이 구두로 가르치는 것, 그리고 그 밖의 경건한 글들에 의존했습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발전 과정에서 논쟁의 여지 없는 사실이 발생했습 니다. 2세기 초기에 교회는 감독(주교) 제도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세기 초에는 확고히 주교 제도의 교회가 되어 주교들에 의해 운 영되는 가톨릭 교회의 교직 제도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서, 세례와 성체 성사는 초대 교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일부의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성사들을 없애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들 중 두 가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초대 교회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성서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2세기에 시작해서 4세기와 5세기에 이 르러 절정을 이루며 다듬어진 많은 신경들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신경들은 성서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겪어온 역사적 변동에 의해 자라고 다듬어졌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변동은 오늘의 교회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2천년이란 기간동안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일하신 것을 무시하고는 어느 누구도 건방지게 -일부의 과격 근본 주의파들이 시도하듯이- 서기 33년을 자신의 교파의 창립 기원으로 주장 하는 망발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초대 교회에서부터 발전해 오늘에 이른 그리스도교 즉 가톨릭 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의 참 그리스도교 신앙을 영원히 이해하 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란 원시적 근원인 신약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역사를 거치 며 진화해 온 가톨릭 교회입니다.
(3) 개인주의
근본주의의 초점은 한 인간의 개인적 구원과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에 있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의 신심, 예배 형식 그리고 신학은 ’우리’ 가 아닌 ’나’ 중심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서는 구원이 하느님의 사람들, 즉 교회를 위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물론 신약 성서는 개인의 구원에 있어서의 각자의 책임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이지 한 개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뽑아 당신의 복음 전파 사업에 동반시키셨습니다. 또한 왕국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는데 이는 공동체적인 개념을 갖는 것입 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도 분명히 교회와 일치해서 쓰여졌습니다. (에페 4, 15-16: 5, 29-30).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획은 ’나’ 가 아닌 ’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히브 11, 40). 다시 말해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 묘사된 초대 교회는 분명히 ’나’ 중심의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워주신 성사들은 공동체 생활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I고린 10,16).
신약 성서에서의 공동체적 삶의 강조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근본주의자들 은 예수님과 교회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들의 관심사 는 한 개인이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이지, 그 사람이 교회를 통하여 예수 님께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개인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께로 완전히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몸이 된다는 것 은 정확히 세상에 속해있는 그의 몸인 교회와 한몸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이 축구 경기장에 세워진 제대 앞으로 나가 ’구원’을 받았거 나, 혹은 케이블 TV의 복음 전도사의 초대에 응해 TV화면에 손을 대면서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쳤다’고 한다면 그 다음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요?
대중을 상대로 한 근본주의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위험은 사람들에게 그 들이 단지 예수님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찾았다는 그 사실 하 나만으로 예수님과 한몸이 되었다고 잘못 이해시키는 데 있습니다. 근본 주의파에서 주로 하는 부흥회나 그와 유사한 모임에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생 전환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런 경험 자체가 - 근본주의자들 이 주장하는 대로 -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체적 배경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근본주의파들의 개인주의의 강조는, 가끔 원맨쇼와 흡사한 그들의 예배 의식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가톨릭도 신부가 신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모든 신자들은 제단의 신부에게만 집중하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의 예배 형식은 아니 었습니다.) 크리스천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신자들이 참여하는 데 있는 것 이지 흥미있는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근본 주의파 교회들은 고의적으로 극장처럼 설교대를 중심으로 실내가 부채꼴 모양으로 바닥면이 들어오는 입구 쪽이 높도록 경사지게 설계된 교회 안 에서 연출되는 예배의 오락적 가치를 강조하며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합니 다. 이런 체계는 -근본주의파의 신학처럼- 크리스천 예배의 중심인 ’신 비’보다 멋지고 재미있는 설교가 핵심이 됩니다.
근본주의파들의 개인주의의 강조는 그들이 권교시 잘 쓰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나는데 "나는 주님을 압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습 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등의 말이 그것입니다. 신약성 서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이런 슬로건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 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이런 논리적인 결론을 주장한다면, 그들은 신약성 서 전반에 걸쳐 잘 나타나고 있는 공동체 정신과 개인적 계시의 공동적 판별정신을 모두 부인하는 것입니다. (요한 4, 1-6참조). 주님이 ’나’ 에게 말씀하신 것은 종국에는 내가 한 일원인 공동체의 신자들 전체로부 터 식별되고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약 성서는 교회를, 항상 새롭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 를 건설하며 계속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행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성서는 교회를 -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자주 갖게 되 는 인상이지만 - 세상의 악과의 전쟁에서 이긴 이미 구원된 개인들이 모 인, 그러나 제멋대로이고 흐트러진 집단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4) 창조에 대한 부정적 태도
많은 근본주의자들의 현대 과학에 대한 혐오는 과학의 도움으로 하느님 의 창조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고 있음을 깊이 통찰하고 있는 가톨릭의 입 장을 이들이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근본주의파들은 창조주로서 그의 계속되는 작업보다 하느님의 구원사업 에만 더 열심히 초점을 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창조의 행위와 구원사업을 구분하려고만 듭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그의 창조 작 업에 계속 임하시며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종종 구원 사업의 기술적 방법에만 너무 관심을 쏟아서 하느님 자신이 종교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종 교에는 관심이 없으시고 그의 창조물, 즉 그가 만드셨고 앞으로도 계속 만드실 사람들과 모든 사물들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필자가 기억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가톨릭인들이 너무 ’인도주의적’이 라며 늘 비판하던 근본주의자인 한 여인과의 대화입니다. 그녀의 말을 더 깊이 납득하려고 노력한 결과 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어했던 말은, 가 톨릭인들이 인간의 추악한 면을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통 교리주의의 한 친구가 최근에, 바로 이 문제를 놓고 설교하는 어느 유명한 목사의 큰 집회에 필자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과 하느님이 예수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것을 비교했습니다.
한가지 차이점은, 희생제물로 바치려던 이사악은 살려 주신 반면에 예수 님께 죽음의 시간이 왔을 때에는 ’하느님이 그를 죽이셨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 목사의 견해가 바로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속 (代贖)’ 교리의 골자입니다. 하느님은 악한 우리를 벌하시는 대신에 사악 한 인류를 향해 가진 분노를 예수님께 몽땅 퍼부으셨다는 것이 그들의 생 각입니다. 실제로는 하느님이 예수님을 죽이신 게 아니고 악한 인간들이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사랑의 희생 제물로 기꺼이 자신을 바친 것이지 죄악으로 물든 인류를 향해 복수심에 가득찬 횡포한 아버지에 의해 강제 로 희생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잘못된 인식이 일반적 으로 창조설에 대해 부정적인 근본주의파들의 태도에 뿌리 깊이 새겨져 있고, 그런 이유로 인해 중요한 의미의 근본주의 미술, 문학, 혹은 문화 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비친 인류가 죄악에 가득 차고 형편없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문화가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전 인류가 보존해야 할 크리스천 문화의 자랑스런 작품들은 구원받은 인류가 근본적으로 선하다 는 것을 믿는 크리스천들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프라 안젤 리코, 레오나르도 다빈치, 밀레, 베토벤, 바하, 헨델과 같은- 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5) ’세상’과의 관계
우리 주위를 둘러 보면 인공 유산, 가정의 붕괴, 매스컴이 저질화시킨 문 화, 계속 증가하는 군비 경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미명 아래 자행되는 끔찍한 인권 유린과 인종 학살, 성적인 비윤리, 대중의 물질 만능주의, 개 인의 사생활과 자율성의 박탈, 세계 어느 곳에나 있는 사회의 불공평, 널 리 퍼져 있는 빈곤과 배고픔,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악들을 볼 수 있습니 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사회악들을 보면서 -많은 근본주의파들이 그랬던 것 처럼- 이 세상의 악함을 하느님의 심판에 맡긴 채 체념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근본주의가 왜 호소력이 있는가 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근본주의는 인생의 모든 불안정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빠르고 쉬운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비록 그것이 옳은 답이 아니라고 해도 말입 니다.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방법은 가까운 개신교회에 나가서 간단 하게 ’구원받고’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런 악을 만들어낸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날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 다.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은 크리스천들이 그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잘 못 이해한 탓도 큽니다. 그리스도교는 전적으로 세속과 분리되어야 하며 종교와 교회에만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와 세상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교회 선교 사업의 핵심적 대 상은 좋든 싫든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 주위에 있는 우울한 세상일 수 밖 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닮아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근본주의 자들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요한 17, 14-18 참조). 우리는 세상을 하느님의 왕국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 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많은 문제들 앞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세상의 방법으로만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는 또 하나의 사회 자선 단체나 복지 기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의 물질 만능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근본 주의자들은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 차이점은 세상의 방법을 사용해야 될 경우에 근본주의자들은 ’손을 떼는’ 식의 방법을 취하는 반 면, 가톨릭인들은 이 세상의 방법을 하느님의 가르침에 알맞게 사용하려 고 합니다.
가톨릭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어떤 것도 그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주장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창조물을 ’설명’하기 위해 인류가 발전시킨 심리학, 사회학, 과학 등이 단지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크리스천답지 않은 가치관을 낳았다는 이유 하나로 간과되고 회피될 성질의 악은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들처럼 이런 학문들을 반대하는 대신, 크리스천들은 이 학문 들을 연구해야 하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좋은 면을 찾아서 그 좋은 면을 복음의 메시지로 응용해야 할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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