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개인적인 만남 - 하느님께 다가가게 해주는 이야기 중에서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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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10-03 | 조회수902 | 추천수5 | 신고 |
♣ 개인적인 만남 ♣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합니다.”
[1베드 1,8]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필립 3,12]
친구들은 농담삼아 나를 ‘종교재판소장’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것 은 내가 질문,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질문들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저 질문을 좋아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진리를 발견하 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실존주의자 부류는 아니다. 나는 그런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확실 한 답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더 좋아한다. 특히 답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아무튼 나는 분명한 답을 찾아 내는 쪽을 좋아한다.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좀처럼 포기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종교재판소장이라 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그날 아침에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귓가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맴 돌고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하느님을 믿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질문의 답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도를 꺼내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에 서 아무 데나 한 군데를 선정한 다음, 그 지역의 모든 집을 일일이 찾 아다녀 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상당히 계획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 분도 알 수 있을 것임) 마침 그 동네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필요의 거리’. 그렇게 해서 나는 새로운 모험을 떠났다.
‘필요의 거리’에 도착한 나는 그 거리의 꼭대기에 있는 첫 집의 대 문을 두드렸다. 마치 요새를 방불케 하는 그 집에는 부유한 사업가에 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인물이 살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내가 그 집의 주인에게 이렇게 묻자, 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 했다.
“믿어야 하니까 믿지요. 다 자신을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아시다시 피 종교는 제멋대로 흐트러진 것들을 통제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느 님에 대한 믿음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지요. 사람들은 천 국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지요.”
그 다음 집에는 근엄한 외모를 한 정신과 의사가 살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정신과 의사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야 하니까 믿는 겁니다. 종교는 노이로제를 견뎌내는 데 도움 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짧은 인생이 덧없이 끝나고 나면 아무도 기억해 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 이 우주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 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 즉 가상의 세계에서 안 식처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봐 줄 인물을 만들어 내는 거지요. 그 인물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심각한 갈등(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지요.)도 그 가상의 세계로 밀어넣 기만 하면 해결되어 버리는 보너스까지 누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집에는 사람의 뇌를 혁신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유 명한 신경 학자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하느님을 믿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신경 학자는 대답했다.
“믿어야 하니까 믿는 겁니다. 사람들의 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 시다시피 뇌는 우리가 어떤 특정한 행동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전적인 정보가 입력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 면,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도 어머니의 젖을 빨거나 언어를 배우거나 성적인 행동을 하는 등에 필요한 본능적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 님을 믿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하느님의 영향력을 요구하는 사건 과 경험들이 이미 우리의 신경 구조 속에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칼 융의 종족 기억이나 종교적 상징의 재현을 생각해 봅시다. 나는 개인적 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나는 그 신경 학자가 나에게 던지는 갖가지 이론의 눈사태에 깔려 죽 기 전에 얼른 그 집을 나와 버렸다.
네 번째 집은 마치 지진을 만난 도서관과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사 방에 책들이 널려 있어 앉을 곳은 물론이고 서 있을 곳조차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전도가 유망한 사회학자인 그 집의 주인은 문을 열어 주러 나오면서까지 책을 손에 들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책을 들여다보고 있 었다.
“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사회학자가 대답했다.
“믿어야 하니까 믿는 겁니다. 여론 조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왜 당신은 힌두교를, 이슬람교를,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를, 기타 등등의 종교를 믿습니까?’하고 물어 보면, 반드시‘난 태어날 때부터 그랬 어요.’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꼭 믿어야 한다는 법 은 없지만,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을 살아가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니까요.”
다섯 번째 집에서는 연기와 유황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집의 주 인은 영적 테러리즘으로 유명한 근본주의 종파의 목사였다.
“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목사가 불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야 하니까 믿는 거요.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에 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성서 말씀대로‘하느님은 조 롱할 수 없으며, 살아 있는 하느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 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오. 그렇소, 그 누구도 다가올‘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생물학자가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집은 겉에서 보기에도 실험실을 연 상케 했다.
“사람들은 왜 하느님을 믿는 겁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생물학자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믿어야 하니까 믿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 를 복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대단히 복잡한 기관입니다. 말하자면 유 전자의 생존을 위한 기계인 셈이지요. 하나의 유전자가 자신을 복제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합니다. (집과 민주주의와 의과대학도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 를 보호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종교는 가족 생활과 성생활이 대단히 안정되고 질서정연한 사회를 만들어 내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유전자는 종교를 자신의 영속성을 이어갈 수 있는 조건 가운데 하나로 입력시켜 놓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 해하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유전자 형질과 표현 형질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얼 른 그 집을 나와 버렸다.
일곱 번째 집에는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언뜻 보아 전혀 외모에 신 경을 쓰지 않으며,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철학자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야 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생 각할 때 (별로 많지 않은 경우입니다만) 하느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 습니다. 나름대로의 결론을 구속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지 요. 예를 들어 우주의 존재, 우주의 질서, 의식의 명령, 가치 판단의 기원, 기적의 증거 그리고 종교 체험의 다양성과 보편성 등을 꼽을 수 있겠지요.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최소한의 살아 있는 선택사항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집을 지나자 울타리도 없는 풀밭이 펼쳐져 있어 서 마치 버려진 초원을 연상케 하는 곳이 나타났다. 거기에는‘자유의 초원’이라는 글자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진 간판이 붙어 있었다.
실로 흥미로운 곳이 아닐 수 없었다.‘필요의 거리’를 헤맨끝에‘자 유의 초원’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흥미로웠던 것은 공터에 불을 피워 놓고 보잘것 없 는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부랑자를 만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왜 하느님을 믿는 겁니까?”
부랑자는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 솔직해서 꾸밈이라고 는 찾아볼 수 없는 듯했다. 사실 그에게는 감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고 상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의 두 눈에는 약간 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글쎄요. 사람들이 왜 하느님을 믿는지는 잘 모르겠소. 아마 각기 그 이유가 모두 다를 것 같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왜 하느님을 믿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가볍게 웃음이 번지며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오.”
그런 대답을 들은 나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뭐라구요? 당신이 하느님을 만났단 말입니까?”
부랑자는 다시 웃었다. 나와의 이런 대화를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간접적으로 만났다고 할까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난 그분의 아들을 만났소.”
“직접 대면을 했단 말입니까?”
그렇게 묻는 내 목소리에는 일말의 냉소가 깃들여 있었다. 이 사람도 어떤 종교적 확신을 얻기 위해 세상을 방황하고 다니는 괴짜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오. 하지만 나는 그분의 친구와 제자들이 그분에 대해서 쓴 글을 읽어 보았소. 확실히 보통 글은 아니더군요.”
그리고 코트 주머니를 뒤지더니, 종이가 너덜너덜하게 낡은 조그만 책 자를 한 권 꺼냈다. 신약성서의 4복음서를 묶은 싸구려 책자였다.
“내가 말한 글이 바로 이것이오.”
그 즈음 나는 그 남자의 온화한 말투에 조금씩 끌려들고 있었다는 사 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그저 평범한 방랑자가 아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신병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를 거부하 는 이단자도 아니었다. 그 사람의 말투나 행동에서는 성스러운 여행길 에 나선 순례자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우러나왔다. 그때부터 나는 그 사람을‘순례자’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내심으로는 그 사람에 대한 외경심이 생기고 있었음에 도, 나는 악마의 대변자와도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 다.
“이 복음서들을 읽었군요. 하지만 세상에는 무신론자들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났다 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는 마치 내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 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그분처럼 말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오.”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어떤 인간도 그분처럼 산 사람이 없소. 어떤 인간도 그분처럼 죽은 사람이 없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망설인 끝에,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것은 인정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분 역시 그저 훌륭한 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순례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것 참 편리한 해석이로군요!”
잠시 후 간신히 웃음을 그친 그는 왜 그렇게 웃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런 말을 수백 번도 더 들어 보았지만, 내 평생 그토록 한심한 말은 없다고 생각하오.”
“왜지요?”
나는 여전히 말썽꾸러기 역할을 자처하며 따지고 들었다.
“이유는 간단하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소. 물론 그 주장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소. 만약 틀렸다면 그것 은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예수님은 비열한 사기꾼에 지 나지 않을 것이오), 의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당신도 예수님 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적어도 그분이 사기꾼이나 정신병자라고 생각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이것은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주 간단 한 문제요. 우리에게는 삼자 택일의 여지밖에 없기 때문이오. 주님이냐, 거짓말 쟁이냐, 아니면 미치광이냐 하는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오. 따라서 결론은 그분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소.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순례자의 확신에 찬 말투에 감동을 받았다. 나 역시 언제나 복음서는 사실일 것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다른 어떤 소리를 한다 해도 그 복음서에는 누구도 무관심할 수 없는 대단히 훌 륭한 인물이 묘사되어 있지 않은가.
나는 한 발짝 물러서는 말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나도 당신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알고 싶었기 때문입 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을 만났다고 확 신하는 것이 순전히 복음서를 읽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순례자는 웃으며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생 생히 남아 있는 어떤 사건을 회상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렇지는 않소. 어느 날, 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문득 그런 일이 일어났소. 내 가슴에 하느님의 손이 얹히는 것을 느 낀 것이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 문에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소. 그분이 나를 당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품 속으로 인도하신 거요. 그 기 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소.”
순례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직도 그 순간의 감동이 남아 있는 모 양이었다. 잠시 후 원래대로 돌아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나는 이제 그만 가 봐야겠소.”
그러면서 순례자는 발 앞에 피워 두었던 조그만 모닥불을 끄기 시작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순례자는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물려받은 유산들을 둘러보러 가는 것이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례자가 지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소, 세상은 내 것이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을 만들었 으니 말이오, 안 그렇소?”
“그래서 당신은 나 같은 사람들과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평생토록 이렇게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순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이 늙고 기력이 쇠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미 그 사람에게 흠뻑 매료되어 버린 나는 진심으로 그의 운명이 걱 정되었다.
순례자는 다시 특유의 밝고 투명한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훌륭한 어머니 대지의 품에 나 자신을 뉘어 야 할 때가 오면, 그 대지가 나를 내 아버지의 품으로 안내해 줄 것이 라고 확신하오.”
순례자는 그 말을 남기고 머리를 똑바로 치켜든 채 내 곁을 떠났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이 세상의 어떤 왕자도 대적할 수 없는 고상함이 우러나왔다.
사람들은 왜 하느님을 믿는 것일까? 그날 나는 필요의 거리’에서
일곱 가지 대답을 들었다. 하나같이 다 그럴 듯한 대답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들은 대답,‘자유의 초원’에서 순례자의
입을 통하여 들은 대답이 가장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위의 글은 닐 기유메트 신부님의 단편집 - "하느님께 다가가게 해
주는 짧은 이야기들 시리즈" 중에서 발췌한 것임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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