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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考察]불교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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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10-10 조회수1,657 추천수4 신고

 

 

아래 474번에서 자매님이 질문하신 불교에 관해 답변을 하려고 하다

 

보니 전반적인 불교의 역사와 교리 사상까지도 이야기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이 게시판의 목적이 천주교에 관한 묻고 답하기임에는

 

분명하지만 타 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

 

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져 비록 두서없는 글이지만 올립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우선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교는 사람의 인지로서 절대선을 추구하며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도를

수행하는 것으로 볼 때는 자연종교 즉 혼합종교이며 그런 한편 아이러니

하게도 무신론(Atheism)적인 공(空)사상을 강조하면서도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적인 면도 또한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무신론적 범신론에 속하

는 종교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당히 모순되면서 이해되지 않

는 것일 수도 있으나 원래 인간의 지력만으로 구성된 이 세상의 수많은

자연 종교는 그 본질상 무신론적이면서도 범신론적인 일원론에 물들 수

밖에 없음을 다음의 글에서 차례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범신론과 다신교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란 쉽게 말해서 이 세상 모든 물건이 신으

로부터 났으므로 모든 물건이 또한 신이라고 말하는 주장을 가리킵니다.

범신론에 의하면 신과 신이 창조한 세계는 서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

므로 이 세상 모든 물건은 신의 표상이므로 그 또한 신이 된다고 주장하

여 모든 것을 신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대표적인 것은

브라만교-고대 인도의 아리안족의 종교 나중에 힌두교로 발전- 와 힌두

교이며 불교가 이러한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출발

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정확한 신조(信條)와 윤리 체계가 없는 자연 종교들은 거의 모두라 해도

좋을 만큼 이 범신론 사상에 많든 적든 물들어 있습니다. 특히 미개인들

의 원시 종교에는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물건을 신격화(神格化)하여

숭배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태양, 달, 별, 짐승들이 다 거룩한 초자

연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범신론의 주장에 따르면 으레 다신교

(多神敎)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령 다시 한번 예를 들자면 불교 사상

이 브라만과 힌두교의 범신론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팔

백만의 신을 신봉하는 다신교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석가의 일생을 기록한 경전 중 팔리어 5부 경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설로 전해져 옴을 볼 수 있습니다.

 

석가가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파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을

때 브라만교의 최고 신인 브라만(梵天)이 나타나서 "이 세상에도 진실을

구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진실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

느 사이에 세속에 물들어 버리기 때문에, 설법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계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불교는 후대에 이르러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신

들 - 8백만이나 되는 신들- 을 ’수호신’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범신론의 주장을 철학적 체계로 설명하는 스피노자(B. Spinoza)와 헤겔

(G. Hegel)등은 모든 존재의 기원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신

(神)이나 혹 인간의 사고력의 일원론을 주장하여 절대신(絶對神)과 피조

물 사이의 간격을 메우므로 신과 그 피조물은 같은 것이라는 범신론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범신론적인 주장대로 하면 신과 피조물 사이에 가로 놓인 간격을

도저히 메울 도리가 없음은 아무리 지능이 저급한 자라도 알 수 있는 일

입니다. 신의 특성인 순전성(純全性)과 절대성(絶對性)을 그대로 변화하

고 소멸하는 피조물에게 일원적으로 적용시킬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와 반대로 피조물의 변화하는 성질을 절대신에게 적용시킬 수도 없으

므로 범신론이란 이치에 완전히 어긋나는 주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범신

론에서는 모든 것이 신이므로 선과 악의 절대적 차이도 없게 됩니다. 따

라서 사람에게 윤리적 의무를 물을 근거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주

의 운행이나 인간의 모든 행동이 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사람에게 책임

을 물을 것이 아니고 신에게 물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

고 해괴한 주장입니까?

 

 

무신론적인 불교 사상

 

 여기서 불교에 대한 총체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있

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이 불교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인고로

불교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자매님의 질문에 대답할 정도의 간략한 불교의 역사와 교리 그리

고 불교 사상에 관해서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불교가 언제 정확히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는

관계로 학자들 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탄

생과 사망 연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와 중국에서는 음

력 4월 8일을 석가 탄생일로 지내는 모양입니다만, 예전의 인도에서 불교

가 흥했을 당시에는 3월에 지낸 것으로 현장의 서유기(A.D. 633년)에 보

면 나옵니다. 현재 남방 불교(스리랑카, 미얀마, 타이,...)에서는 기원

전 560-480년으로 붓다의 탄생연도를 기록하고 있으나 북방 불교(중국,

한국, 일본...) 에서는 기원전 460-380년으로 쓰고 있습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남방 불교의 연대를 따라 기원전 563-483년으로 쓰

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알기 위해서는 신약 성서를 보면 되듯이 석가

모니의 생애를 알기 위해서는 불교 경전을 보아야 합니다. 불교의 경전

에는 아함경(阿含經)이란 것이 있는데 아함이란 범어의 아가마(agama,

전해 오다)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 있어 붓다의 제자

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서로 기억해내고 서로 암송하여 구전으로 후대

에 전한 것이 아함경이었기 때문에 불교 경전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

고 또 붓다의 사상과 언행을 가장 진실에 가깝게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

습니다. 아함경은 보통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한문으로는 여시아문(如

是我聞) 또는 아문여시(我聞如是)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여시경(如是

經)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붓다의 생애를 아함경을 기초로 해서 알아듣는 것

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아함경 속에 많은 설화와 전

설이 나오기 때문에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것이 전설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불교

학자 헤르만 베크(Herman Beckh)같은 이는 그의 붓다전에 전설상의 붓다

와 역사상의 붓다를 나누어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붓다전의 작가들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전설을 구분하지 않고 병행해

서 생애를 기록함으로서 일반 대중의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아함경이라 함은 원시 불교 경전

에 속하는 팔리어 5부 경전을 말합니다. 불교 경전의 자세한 편찬 과정과  

(그것을 불교 용어로는 결집이라 합니다만) 여기서는 그 과정과 경전의

종류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크게 나누어 석가모니의 직계 애제자였던 아난

다의 암송으로 이루어진 팔리어 5부 경전을 기초로 하는 초기 원시 불교

의 경전들과 석가모니 사후 6백년 뒤의 대승 불교 경전의 대표라 할 법

화경을 가지고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팔리어 5부 경전 중 "대 팔리어 열반경"에 붓다 생애의 마지막 몇 달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장부 경전 34권에 해당되며 한역 경전으로는 다

음 네가지의 경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1) 유행경: 장아함경 속에 포함되어 있음.

 2) 불반니원경: 2권

 3) 반니원경 : 2권

 4) 대반 열반경

 

 위의 경전에 나오는 내용 중에 붓다가 그의 직제자 아난다에게 인간 사

후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아난다야, 나는 이제 노쇠해졌다. 80세다. 비유하면 낡아빠진 수레가 간

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겨우 움직이고 있다.....

아난다야, 자기 자신을 섬(島)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

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할 곳

으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대반 열반경 상).

 

 붓다가 거의 임종에 가까울 무렵 슈바드라(Subhadra)라는 늙은 수행자

가 붓다의 면회를 청해 왔다고 합니다. 아난다는 붓다가 곧 임종할 것

같아서 면회를 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붓다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만나겠다고 해서 면회가 성사됩니다.

 

 그 노인 수행자는 "세상에는 종교가들이라고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데 정말로 얻은 것입니까? 하고 붓다에게 물었습니다.

 

 붓다는 그 노인의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회피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팔정

도(八正道)만을 설명해 주고 노인에게 구족계를 받도록 하여 마지막 제자

로 삼았습니다.  

 

 붓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직제자 5백명을 불러 놓고서 다음과 같은 유언

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 스승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가르친 모든

법과 율이 너희의 스승이다. 비구들이여, 너희에게 할 말은 이렇다. 모든

현상은 변한다. 게으름없이 수행에 정진하여라!"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붓다는 자신을 최후의 구원자, 즉 신으로 선

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인도 사회의 브라만교로부터 불교의

핵심 교리인 제법 무상설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결론적으로 인도

의 주류 철학이었던 브라만교로부터 종교적 교리의 빈약함과 모순에 대해

신랄한 비난과 공격을 받은 끝에 발생지 인도로부터 끝내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더구나 붓다는 생존시에 제법 무아를 주장하면서 나의 실체가 없다고 주

장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영혼과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육체와

영혼은 하나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영혼의 인격은 사후에도 생존하

는가?"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석가모니는 끝까

지 대답을 회피하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이렇게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

하는 방법 -4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대답을 회피하는 방법- 을 불교에서는

사치기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붓다가 임종시에 노인의 질문에 대답을 회

피한 것처럼 말입니다.

 

 붓다는 영혼의 존재와 인격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자아

의 성질과 그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비구들이여, 색(色, 물질적 존재)은 무상(無常)이다. 무상(無常)이면

곧 고(苦)다 고(苦)면 곧 무아(無我)이다. 무아(無我)면 곧 아소(我所)

가 아니며 이는 자아(自我)가 아니며 또 이는 아체(我體)가 아니다. 이

렇게 바른 지혜를 열심히 관찰하라.!" (한역 상응부 경전 22,45 무상;

한역 동본 3, 35 청정).

 

 이상의 설법에서 붓다는 자아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의 임종 설법에서는

"자기에 의지하라! 또 자기를 등불 또는 섬으로 삼아라! 법을 등불로 삼

아라" 고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모순되는 것은 붓다의

언행을 수록한 팔리어 5부 경전을 통틀어 계속되는 바 도대체 어느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 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상적인 면으로 붓다는 자아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행위적인 면

에서는 또 한편 자아를 일부 승인하고 있는 듯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종교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을 분명히 밝히는 것인데 그

것은 인간의 자기구현(自己具現)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훌륭한 인간 형

성의 길은 자기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무아설은 인간 행위의 책임 귀속에 큰 문제가 되고 또 일체의 윤

리 활동이 성립될 수 없으며 종교적 인과 응보 관계에도 모순을 초래한다

고 일찍이 자이나교에서 기원전 5세기에 다음과 같이 비난한 바가 있습니

다.

 

"만일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면 현세와 내세에 있어 과보(果報)를 받으려는

노력이 무의미하게 된다. 갑이란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을이란 사람이 그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 전에 어떤 행위를 한 그 사람이 현재의

과보를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앞의 시간과 후의 시간에 있어 존속과 상

주하는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요소로

형성된 개인의 존재가 앞과 뒤로 따로 떨어져 아주 짧은 찰나만 존재한다

는 찰나성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Sarva-Darsana-Samgraha III 1,

1-17)   

 

 이러한 비난에 대한 불교도의 반론은 다음과 같은 "목화의 비유"를 통해

제시됩니다.

 

 "하나의 연속적 개인 존재 안에서 발생한 앞의 관념이 행위의 실행자이

며, 뒤의 관념이 과보의 수혜자이다. 그리고 인과의 관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혼란은 없다. 이는 마치 달콤한 즙에 적신 망고의 씨를 땅에 심

으면 그의 싹, 가지, 줄기를 통하여 성장하지만 맨 나중에 얻은 실과에

는 꼭 달콤한 맛이 있는 것과 같다. 또 목화의 종자에 칠(옻나무)의 액

을 발라주면 후에 목화에는 색깔이 꼭 나타나는 것과 같다.

 시트론(citron, 佛毛柑)꽃에 칠(옻나무)을 발라주어도 같은 결과가 나

온다. 그래서 어느 연속적 개인 존재 안에 행업(行業)의 잠재적 인상(印

象, karma vasana)이 발생하면 같은 존재 안에 과보가 맺어진다."

 

 자이나 교도들은 불교도의 "목화의 비유"가 단순한 말재주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는 불교 특유의 대답을 회피하는 사치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면서 다음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불교도가 말하는 대로 비록 인과 관계가 정해졌다 해도 자아인 영혼이

없으면.

 

 1) 자기가 행한 과보를 받지 못한 채 없어지게 되며,

 2) 자기가 행하지도 않은 과보를 받을 수도 있고,

 3) 그렇게 되면 윤회나 해탈도 성립할 수 없다."

 

 (Sarva-Darsana-Samgraha III 1, 40).

 

 

 붓다는 그의 제자 말룬캬푸타(Malunkyaputta)가  "영혼이 존재합니까?"

하고 질문하였을 적에 정확한 확답을 회피하면서 "독 묻은 화살의 비유"

를 들어 독이 묻은 화살이 몸에 맞았을 때 이 화살을 뽑아 내어 독의 종

류가 무엇인지 살펴 보는 중에 독이 온 몸에 퍼져 죽게 되는 것과 마찬

가지로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어가는 길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말로 대

답하였습니다. (중아함 63, 225 말룬캬 童子經).

 

 그런데 붓다에게는 확답을 회피할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는데, 만일 그

가 "영혼이 있다"고 말하면 그가 내세운 세 가지 기본 교리(제행 무상, 제

법 무아, 열반 적정) 중 제행 무상과 제법 무아의 설법이 성립될 수 없음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만일 "영혼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

그가 주장하는 피안의 세계와 윤리 도덕 문제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한 이치이므로, 이런 이율 배반적인 교리상

의 모순된 문제로 인해 붓다는 어느 때는 영혼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어

떤 때는 없다고 서로 내용이 상충되는 말을 하였던 것을 경전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불교 학자 드 라 발푸생(De La Valle-Poussin) 은 "신

생 불교는 교조의 마음대로 고도로 종교 형태를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고 말합니다.

 

 

 이상에서 불교의 종교 형태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는 마치기로 하고 다음

에서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대승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절에 모시는 이유

즉 부처의 신격화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즉 가톨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

인 동시에 신으로서 찬미하고 경배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

시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어려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까지 일

관되게 하느님의 아들임을 주장했고 초대 교황 베드로의 신앙 고백 "선생

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듣고 꾸중

을 하시거나 너의 생각이 허황된 공상에 지나지 않다고 책망하시지 않으

시고 그것은 하느님이 알려 주신 것임을 선포하시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

라의 열쇠를 주시는 놀라운 보상을 주셨으며 또한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성자이심을 수많은 기적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음을 복음서를 통해 잘 알

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의 일반 대중이 보기에

는 불교에서는 붓다가 그리스도교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놓

일 수 있는 구원자로서 신으로서 사람들 머리 속에서 생각되어지는 것

같으니 여기서는 원래의 불교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실제로 붓다는 자신

을 인간 이상의 초월자로서 구원자로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

는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알아보겠습니

다.

 

 먼저 초기 불교의 경전인 팔리어 5부 경전을 다시 한번 살펴 봄으로써

붓다의 직제자 아난다를 통해 나눈 다음의 대화를 살펴 보는 것이 원래

불교에서 붓다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억측과 오해에 대해 어떻게 말했

는지 알려 줄 것입니다.

 

 

 붓다는 자기 자신을 우주의 최고 존재로 생각하고 말한 적이 없었다

 

 팔리어 5부 경전에는 붓다가 자신을 최고 존재로 생각하고 말한 적이 없

으며 그의 제자들도 큰 깨달음을 얻은 선생님(賢者, Guru)으로 존경하고

따랐지 그를 구원자 또는 구세주로 생각하고 말한 적이 없음을 보여 줍니

다.

 

 가령 붓다가 나란다에 머물고 있을때에 그의 제자 사리푸트라는 붓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대해서 이와 같

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즉 깨달음에 대해서 사문이든 브라만 승려이든

선생님보다 나은 사람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

고 있습니다."(대열반경).

 

 다음 붓다가 입멸 전에 벨루바 촌에서 큰 병이 났는데 그 때 아난다는

붓다가 세상을 떠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병에서 회복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무사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선생님께서 교

단에 아무 말씀도 없이 입멸하실 리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말에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교단이나 제자들이

자기(붓다)를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고 각자 자신들의 노력으로 깨달

음을 얻으라고 일렀습니다.

 

 "아난다야, 교단이 내게 아직도 무엇을 기대한단 말이냐….? 나는 법을

가르치는 데 힘을 다하였다. 만일 내가 교단을 통솔한다든가 교단이 내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교단에 대해서 지시를 내렸을 것이지만 그런

일은 없다" (대열반경 상).

 

"아난다야, 현재도 내가 입멸한 후에도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처로

하여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라…. 법을 등불로 삼고 의지처로 하여 다른 것

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만이 가장 내 뜻에 맞는 사람이다."

(대열반경 상).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고 분명히 당신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셨던데

반해 붓다는 자기가 먼저 실천하고 다음 그 제자들도 그 방법을 익혀서

실천할 것을 권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로 말미암아 구제를 받아라."

고 하지 않고 "너희도 수행을 쌓아 어서 붓다가 되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붓다가 아함경에서 가르친 해탈관은 어디까지나 각자 자기

의 힘으로 성취하는 "자력 해탈(自力解脫)"이었습니다

 

 

대승 불교가 붓다를 최고의 신적 존재로 만들었다

 

 붓다는 위에 소개한 초기 불교 경전 아함경(팔리어 5부 경전)의 내용으로

보아 최고 존재나 구세주는 아닙니다. 그런데 서구의 법률 용어로 "법리상

(法理上, de jure)"이라는 말과 이와 상반되는 "사실상(事實上, de facto)"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리상"이란 말을 달리 표현하면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on the level of philosophy)"가 되는데, 붓다는 법리상 그리고 철학

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최고 존재" 혹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사실상"

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체계화된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on the level of

systematised religion)"이 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붓다는 사실상

불교의 최고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불교 신자들의 신앙심, 예식,

교리의 표현 등에서 최고 존재로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대승 불교는 붓다가 입멸한 지

약 6백 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생겨난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사상 즉

"구원불", "관세음 보살"의 관념이 자력 구원을 외치던 초기 불교에 유입

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승 불교의 시작을 역사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처음에는 불탑 공경을 통

하여 붓다를 찬미하고 숭배하던 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난 새로운 종

교 운동이었고 그 후 대승 불교 운동에 알맞게 만들어 신자들 사이에서

읽히던 것이 대승 경전인데 우리가 이름은 매스컴에서 들어 익히 잘 아는

반야 심경을 중심으로 하는 반야경(般若經)계의 대승 경전이 불멸 후 400,

500년 경에 처음 나타났고, 불멸 후 600년 경(A.D. 100-150년)에 대승 경

전의 핵심이라 할 법화경이 출현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붓다를 구원불(久遠佛, 永遠佛)로 신격화(神格化)

시켜 아득한 옛날에 성불하여 석가모니 붓다로 나타난 것은 하나의 방편

(方便)에 불과한 것으로서 석가모니 붓다가 80세에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하나의 "거짓 기별"과 같아서 실제로 붓다는 죽은 것이 아니고 중생 구제

(衆生救濟)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 뿐이라고 설명하는 Docetism(도케티즘:

기원후 2세기에 발생한 그리스의 이단파의 주장(’…인 듯하다’는 뜻의 희

랍어)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

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적인 논리로 설명하

고 있습니다. (법화경 제16품 여래 수량품).

 

 

원시 불교의 경전인 아함경(팔리어 5부 경전)에는 분명히 "각자 자기 자신

을 의지처로 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붓다 스스로 제자들에게 가르

쳤는데, 대승 경전인 법화경에는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탑묘에 들어가 나

무불(염불)을 한 번 외워도 모두 성불한다."(법화경 제2품 방편품)고 가르

치며 붓다에 의지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불"이나 "관세음 보

살"은 불교에서 최고 존재입니다. 실제 한국 불교에서도 "관세음 보살이

곧 하느님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고익진, ’하느님과 관세음 보살’,

대한 불교 조계종 포교원 발행, 1988).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최고

신인 "하느님"과는 내용에 있어 완전히 다릅니다.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드 뤼박(H. De lubac, S.J.)은 "계시된 하느님"과 불교에서 최고의 존재인

붓다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붓다가 불교에서

최고 존재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두고 하느님이라고 말한 적이

없고 또 "하느님의 속성(본성)"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한 바가 없기 때문

입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붓다는 "신(神) 문제와 영혼의 문제"에 대한 질

문에 대해 "독 묻은 화살의 비유"로써 회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고유

한 신관(神觀)이나 영혼관(靈魂觀) 그리고 우주관(宇宙觀)은 없는 실정입니

다. 그리고 불교의 3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 무아의 사상은 앞서 자이

나 교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 예를 보더라도 영혼과 인격의 개념을 배제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대승 불교에서는 붓다를 신

격화하여 절대자로 모시고 있지만 불교의 근본 신관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절대자의 개념이 붓다 한 존재로 귀결되지 못하고 인도 재래의

힌두교와 브라만교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범신론적 신관 즉, 수많은 다신(多

神)적 사상이 그 안에 내포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승 불교의 관점의 비

약은 우선 붓다와 관세음 보살의 이념적 차이가 모호하여 붓다도 최고 존재

요 관세음 보살도 같은 최고 존재로서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입장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범신론적 신관의 개념으로서는 인격신

(人格神)의 개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최고 존재인 붓다나

관세음 보살을 "하느님(人格神)"과 같다고 하는 것은 겉으로 비슷한 점을 보

고 속으로 다른 내용을 무시하는 또 다른 오류에 불과합니다.          

 

 

 이제 두서없이 전개된 필자의 글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목

해야 할 것은 불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무상(無常, anitya), 무아(無我,

anatman), 공 사상(空, sunyata)이 모두 부정(否定, negative) 개념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설명하고 있어 우주의 실체(實體)와 자아 파악(自我 把

握)의 주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서구의 불가지론과 일맥 상통

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바로 현대 서구 세계 -유럽, 미주 지역- 에서

불교 사상이 기존의 그리스도교 사상 체계에 호시탐탐 반대할 기회를 엿

보던 불가지론자를 자처하는 이들과 무신론자들에게 크게 호소하는 이유

이기도 합니다.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여 인간의 지능은 신을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없는 것이라는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인간이 그의 창조주를 알아볼 수 있고 또 신

의 창조물인 우주는 신의 전능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증거물이 된다고 주

장합니다. 이 점에 관하여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인간 지능의 힘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의 온갖 불경과

불의를 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만

한 것을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

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인간은 하느

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래

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로마 1, 18-23).

 

 

 불가지론자들은 신을 알아볼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면서도 신에 대해

서 무한(無限)·절대(絶對)·초월(超越)등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고 있는

데 그것은 자가 당착(自家撞着)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

이 말하는 신과 그의 속성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머리 속에서 꾸며낸 무신론적 가설(假說)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들

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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