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윤리 신학
악마는 신학과 철학의 완전한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창조된 것들은 악이고, 사람들도 악이고, 하느님께서는 악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이 악으로 인해 고통받기를 하느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원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악마에 의하면 하느님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기뻐하시고, 또 전 우주는 하느님께서 원하셨고 또 그렇게 계획하
셨기 때문에 불행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신학 체계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살인자들에게 내
어 주시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누렸으며, 아들 하느님은 아버지에게 벌
을 받기를 원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개신교 근본주
의자들의 대속(代贖) 교리의 골자임은 앞서 글-개신교 근본주의의 공통
적 경향-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두 분은 다 성실한 이들을 벌하고
박해하려고만 합니다. 사실상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이 결
국 죄를 지을 것을 명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세상이 창조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정의를 드러낼
기회를 갖기 위해서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악마에 따르면 최초로 창조된 것은 지옥이었습니다. 마치 다른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모두 지옥을 위해서인 것같이. 그렇기 때문
에 이런 신학에 "충실한" 사람들의 신심 생활은 무엇보다도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악마가 모자르는 듯 그들은
금지령을 늘리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가시로 모든 것을 묶어서 사람
이 벌과 악마를 피할 수 없게 합니다. 피를 아무리 흘려도 죄를 용서받
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아침부터 밤까지 피를 흘리게 합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자비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런 신학에는 아예 자비라
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는 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
니라 법에 의해 파괴되려고 왔다."고 말씀이라도 하신 것처럼 십자가는
법과 정의가 확실하게 승리했다는 징표입니다. 악마에 의하면 이것이 법
이 실제로 또 진정으로 "완성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고 벌이 법의 완성입니다. 법은 모든 것을, 하느님까지도
집어삼켜야 합니다. 벌과 증오, 복수의 신학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 교리
를 믿고 사는 사람은 벌을 받으며 기뻐해야 합니다. 그는 법과 법을 주
는 사람과 "놀이를 함으로써" 그 벌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피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해
야 합니다. 그는 그들이 지금과 앞으로 받을 벌에 전념(專念)해야 합니
다. 법은 승리해야 합니다. 자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옥의 신학의 주된 특징입니다. 지옥에는 모든 것이 다 있지만
자비는 없습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현존의 현시(顯示)입니다.
악마의 신학은 그들이 완전하기 때문이든 아니면 법을 잘 지키기 때문
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자비가 필요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에
게는 하느님께서는 이것으로 "만족해 하십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 기
쁨인가!) 악마도 만족해 합니다. 모두를 다 기쁘게 하는 이것은 대단한
성공입니다!
이런 종류의 것을 듣고 받아들이고 즐기는 사람은 영신 생활이란 일종
의 악마의 최면이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합니다. 죄, 고통, 단죄, 벌, 하
느님의 정의, 보상, 종말 등등에 대한 개념들은 그들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입맛을 다시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아마 그들이 자기네는 피할
지옥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깊은 잠재 의
식적 위안을 받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기네는 지옥을 피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압니까? 이런 모든 벌은 자기네를 제외한 모든 사
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위안을 갖는다는 것 외에 어떤 뚜
렷한 이유를 그들은 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기 만족감을 그들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들은 "구원
을 받았다."는 신념의 구성 요소가 됩니다.
악마는 악을 대적하여 설교를 함으로써 많은 제자를 만듭니다. 악마는
그들에게 죄는 대단히 나쁜 것이라고 설득하고 "하느님께서 만족해 하
시는" 범죄의 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들이 나머지 인
생을 강도 높은 죄책감과 다른 사람들의 확연한 영벌(永罰)을 생각하며
살도록 합니다.
악마의 윤리 신학은 "쾌락은 죄다."라는 원칙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리고는 그것을 다른 모양으로 조작합니다. "모든 죄는 쾌락이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쾌락은 실제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본성
적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거
기에서부터 악마는 우리의 모든 본능적 경향은 죄악이며 우리의 본성도
그 자체로 죄악이라는 논리를 폅니다. 쾌락이 불가피한 것이고 보면 아
무도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끕니다.
그 후에 아무도 죄를 피하거나 죄로부터 도망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악마는 피치 못할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그러고 나면 죄
에 대한 모든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내동댕이쳐지고 사람들은 인
생에는 쾌락밖에 없구나 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본래 선인
쾌락은 순서가 뒤바뀌어 악이 되고 인생은 불행과 죄로 떨어집니다.
죄와 죄의 벌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설교해서 그들의 마음에는 실질
적으로 죄에 대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정말 미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세
상이 자기네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보복하는
길입니다.
악마는 자기 방식대로 설파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설교하기
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논법은 대개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옳은 일을 하기를 바라
십니다. 그런데 당신 안에는 무엇이 옳은지를 자신 있게 말해 주는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런 편안한 내적 만족을
주지 않는 어떤 것을 당신에게 하라고 하면 성경을 인용해서 그들에게
사람에게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십시오. 그리고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당신에게 그런 만족을 주는 것을 마
음껏 하십시오."
악마의 신학은 사실 신학이 아니고 마술입니다. 이런 신학에서의 "신
앙"은 당신을 자비로서 계시해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
니다. 그것은 자기 기분에 맞게 바꾸기 위해 현실에 적용하는 일종의 폭
력인 심리적이고 주관적 "힘"입니다. 믿음은 일종의 최고의 효과를 내는
소망입니다. "깊은 신념"으로부터 생성되는 특별하고 신비스러우며 역동
적 의지력으로부터 오는 통제입니다. 이런 훌륭한 힘으로 사람은 하느님
의 의지를 전복시켜 하느님의 뜻을 자기의 뜻에로 끌어들입니다. 이런
놀라운 역동적 믿음의 힘으로(이 힘은 누구나 적절한 보상을 위해서 자
기 안에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화된 주술사가 되고 하느님은 우리의 종이 됩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술을
인정하시고 거기에 익숙해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술을 인정하
시고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것을 성공으로 포상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판이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원수들은 우리에게 와 항복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사업은 번창할 것이고 우리는 태양 아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큰 돈
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혹적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역시 미묘한 변증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모든 것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영혼의 힘"을 생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을 감고 몸을 가다듬읍시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눈을 감고 영혼의 힘을 좀더 생성합니다. 악마는 우리가 영
혼의 힘을 생성하기를 바랍니다. 악마는 우리가 영혼의 힘을 많이 생성
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영혼의 힘으로 넘쳐 흐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싫증이 날 때까지 이 짓을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힘을
생성하느라" 지칩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
는 이런 "믿음"에 싫증을 느낍니다. 믿음은 우리의 불안도 갈등도 없애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확실성의 노획물로 내버려 둡니다. 우
리의 책임을 없애 주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마술은 결국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족시키고 우리 자신도 만족해 한다
고 (이 경우 어떤 사람의 믿음은 제법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우리를 확신시키지도 못합니다.
믿음에 싫증을 느끼고 따라서 하느님께 싫증을 느끼게 된 우리는 전체
주의적 집단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집단 행동은 반발을 이용해 우리에
게 용기를 주어 싸움으로, "열등한 민족들"이나 적대 계층을 박해함으로
써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벌함으로써 행복해 합니다.
악마의 윤리 신학의 또 다른 특성은 이것과 저것, 선과 악, 옳고 그름
의 모든 차이를 부풀려서 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류는 더할 수 없는
세분(細分)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든 하자(瑕疵)가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인정함으로, 인내심 있는 이해와 사랑으로 가로
맡아 진리를 찾기 위해 서로 돕는 감정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그와는 반
대로 악마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으로 옳아야 하고 그리
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틀린 것을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들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절대적으로 옳기를 바라거나 절대적으로 옳은 사
람과 한 편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네가 옳
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논리적 지성으로 추론하고 냉철한 이성(理
性)이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기네 생각과
틀린 사람들을 벌하고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상한 대로 악마의 윤리 신학은 악마에게 엄청난 중요성
을 부여합니다. 이제 우리는 악마가 그 신학 전체의 핵심이라는 것을 쉽
게 알게 됩니다. 모든 것 뒤에는 악마가 있다는 것을. 우리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악마는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악마가 우리와 싸우
려고 한다는 것을. 악마의 힘이 하느님의 능력과 같거나 하느님보다 월
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악마가 이런 짓들을 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는 사실… 등등을 곧 알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악마의 신학은 단순히 악마는 신(神)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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