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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의 구원관 (1) -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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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2000-01-07 조회수4,974 추천수5 신고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의 생애를 통하여 가르침을 주셨고

그 육체를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써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리하여

선택하신 사도들에게 명하시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

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

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라고 말씀하셨다. 또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 16)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자비에 따라 구원을 받고 받지 아니하는 것은 사람의 자

유에 속한다. 그리하여 그 자유의 선택 결과도 그 사람의 책임으로

서 각각 그 개인에게 귀속된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

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갈라 6, 7).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

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

는 분이십니다."(2디모 2, 11-13).

 

 그리하여 믿고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 것도, 거절하고 끝이 없는 죽

음에 빠지는 것도 자유이다. 각자 구원의 실현은 그가 복음에 대하

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먼 옛날

에 이 큰 일을 간결하게 요약하여 "그대 없이 그대를 창조하신 분은

그대 없이 그대를 구원하실 수 없다."(Sermo 169, 13)라고 말하였다.

 

 

 이성(理性)에 눈뜬 자에게 구원은 단지 팔짱을 끼고 기다리는 종류

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위격(位格)으로써 위격을 가진 우리를 대

하신다. 하느님이 그 신격으로써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전 인격을 가지고 이에 응답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

인격을 건 사활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주님은 우리 문 앞에 서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 말씀을

듣고 문을 열어 그분을 마중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분은 그 집에 들

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하실 것이다.(묵시 3, 20)

 

 

 

 구원의 실현은 하느님과 사람의 협력에 의한다

 

 인류의 구원은 역사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이 수행

되는 데 있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 몸이신 교회를 위하

여 우리의 몸으로 채워야 한다(골로 1, 24). 그렇게 말함은 물론 그

리스도의 구속 사업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느님의 자

비가 충만한 공동 분배 사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신다는 말이다.

 

 구원은 인간 제멋대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프로테스탄

티즘의 고질병인 Mind Cure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부단한 인격

적 관계에 의하여 발전해 간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도덕적 노력의 교향곡이며 그 미묘한

조율은 골고타 언덕 위에서 이루어진 이래 점점 깊고 점점 넓고 전

인류를 그 속에 포괄시키지 않고는 그칠 줄 모르게 확대해 간다. 죄

중에 태어난 우리 처지로서 그러한 하느님의 대업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은총으로서, 본성에서 나온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진

리에는 사랑으로, 만사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성장하기 위해

서이다(에페 4, 15-16).

 

 그리스도와 우리는 상호 유기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신

비체인 교회를 조직하고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

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지체를 완

성해 나가는 것입니다"(에페 4, 16).

 

 즉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

이다.

 

 

 

 

 구원의 개인주의적 해결

 

 

 우리는 여기서 가톨릭 신앙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분기점을 발견하게

된다. 후자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단지 불가시적(不可視的),

개별적(個別的) 교섭에 한정하려 하고, 전자는 이 영적 사실이 전 인

류를 유기적으로 단결시키는 가시적(可視的), 세계적 대교회로서 시

공간(視空間)에서 발현(發現)한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티즘에 따

르면 각자의 영(靈)은 단독으로 그리고 직접 하느님에 의하여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종교적 존재로서 인간은 단체 생활

을 조건으로 하는 정치적 존재인 사회인과는 그 성질이 완전히 상치

되는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보는 종교는 순주관적(純主觀的)인

사사로운 일로서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사회성을 갖지 않는다. 고립

된 종교 신자와 공동 생활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사회인이란 우연히

그 양자가 구체적으로는 동일인일 수 있다는 이외에는 본질상 아무

런 유기적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질적으로 그 자

신에게 있어 이원적(二元的) 존재로 분할되는 프로테트스탄트의 종

교적 체험은 주관 이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할 고립된 현상으

로 되고 만다. 그리고 다른 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음과 동시에 일

반적 타당성마저 절대적으로 결여된 결과 이른바 가르침이란 결합의

수단 없는 단원론(單元論)의 집합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와 같은 주관적 고립으로 폐쇄되어 있는 이들 종교적 로빈슨 크

루소 속에는 라이프니츠의 이른바 "예정 조화(豫定調和, Harmonie

Preetablie)"마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각각의 영(靈)이 나만이

하느님에게 연계된다는 확신 또는 의식을 가지고 만족해야만 한다.

 

 하느님이 일찍이 사람이 되시어 지상에 내려오시어 그 사람의 인성

을 통하여 인류에게 가르치셨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사실마

저 특별한 의의를 잃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서 상술한 불가시

적, 개별적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하여는 논리적으로 그

리스도의 강생(降生)은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이 옛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단지 직접

계시를 내리신 것에 그쳤다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치(理致)에 맞았

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성서 채택의 근거

를 유다인들의 얌니아 회의의 결정에 따르고 있는 것과 더불어 그리

스도의 강생 구속의 의의를 상실한 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그리스

도교에서 벗어나 오히려 구약의 옛 율법에 얽매인 유다교의 모습에

가까운 것을 알게 된다.

 

 구약 성서에서 보여지는 개인에 대한 개별적 계시를 강조하는 개신

교 신앙의 모습과 신약 성서에 근거한 전 인류의 구속 사업의 중요

성을 깨닫는 가톨릭 신앙의 구분은 이제 확연해진다.  

 

 그렇게까지 가시적으로 지상에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셨던 하느님의

업적이 왜 그들 프로테스탄트에게만은 불가시적이며 개별적인 분리

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는지.

 

 "모두가 하나 되기를."  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였던 사랑이

자아의 내부에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을, 그리하여 자타간에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분리된 주관의 대항과 투쟁을 만들어 내는 결과에 도달

하였는가. 이것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의 해석

 

 

 가톨릭주의는 종교 생활에서 개인주의의 정반대이다. 구원은 물론

각자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제공되어 사람에 따라 자유로이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제공도, 그 자유로운 수용도, 단지 개

인의 마음 속으로만 행해지는 불가시적인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리스도는 가시적 교회를 통하여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할 인류

의 한 사람에게 작용하신다. 우리도 또한  그러한 영으로써 이에 대

하여 공공연한 태도를 가져야 할 필요에 직면한다.

 

 그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관련된  공사

(公事)이다. 그래서 공공연하여야 할 우리의 태도는 공정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타당성이 있어야 할

근본적 사안으로서 주관의 방종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이런 것은

물론 자유의 부정이 아니고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다가오는 일이기

때문에 도리어 도덕적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취사(取

捨) 어느 것도 선이나 악에도 속하지 않는 주관적 평가나 기호의 문

제가 아니고 제공된 객관적 가치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문제이

다.  

 

 구원은 너와 나의 구별없는 일반적인 인간성에 기초를 둔  요청이

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천차 만별한 구체적 특질에 연계하지 말고

이에 대한 거취를 가려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즉시 천차 만별의

개성을 포용하여 대동 단결하는 원칙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임에 자유로운  것은 프로테스

탄트와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유로운 선택은 더욱 고도로 도

덕적이고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연 권위를 떠나서

도덕이 있을 수 없고 또한 단지 자아의 일부분이나 전 인류와 분리

된 나로서 행하는 것보다 자기의 전 능력을 들어 전 인류와 연대 책

임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하는 행위 쪽이 훨씬 깊고 인격적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이른바 신앙

 

 

 프로테스탄트의 이른바 신앙이란 단지 자발적인 태도 또는 감정으

로써 본질적인 내용을 갖춘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이성(理性)은

거의 여기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의지나 또

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신뢰감으로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구속(救贖)이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등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그

에게 신앙은 신조(信條)의 승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받았다는

의식(意識),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닌지는 관심 밖이다.

 

 일종의 종교적 자기 암시 행위이며 최면 행위이다. 그것은 결코 고

도의 도덕적 자유에도, 또는 깊은 인격적 행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자기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기 것이고 타인의 그것과는 관계가 없으

므로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신앙 조항의 서로 다른

정도는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래가 내 마음속에 있는 자기 일

이며 사회적인 나의 관여는 모르는 일이므로 자타의 관계를 타당화

하는 모든 가시적 제도나 교도권 등은 무용의 장애물이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가 그런 것을 제정하셨을 리가 없다고

프로테스탄트들은 생각한다.

 

 그렇다고 만일의 경우에 매달릴 아무 것도 없다면 외롭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많은 경우 단순히 형식적 교회 또는 성서만을 가

지고 있다. 형식적 교회는 본질적인 의의(意義)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서적은 입이 없으니 방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성서는 자기가 편하

게 해석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필요에 따라 고등 비평(高等批

評)에 호소하여 사실성을 거부해도 좋고 혹 그것을 방패로 하여 상

대를 공격할 자료도 된다. 공방 모두 유리한 무기이다. 당면한 적

(敵)은 단지 나의 자유(주관적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주관적인 도

덕에서와 같이, 이 말은 깊은 도덕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를 구

속하려는 권위이며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가톨릭주의이다.

 

이것에 대하여 성전을 선포하는 것은 주관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생명

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단결의 원리로까지 살리는 길은 이 방

책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이 투쟁을 중지하는 순간 내용이 빈약한

데다 와해의 원리를 잉태한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연 붕괴되고 만다.

 

 가톨릭이 있고서 프로테스탄트이다. 옛말에도 적이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고 하였다. 원래 자기 신앙에 타인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음과

동시에 타인의 신앙에도 간섭해서는 안 되었을 자가 달려드는 맹수

의 기세를 막지 못하여 자기의 영적 생명에 충실을 기하기보다는 교

권주의를 공격하는 쪽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모

순을 탓하기보다는 도리어 그 초라함을 동정하는 것이 백번 옳을 것

이다.         

     

 

 

교회는 예수 강생의 계속

 

 우리는 종교 때문에 인간을 고립시키고 천박하게 유아 독선에 빠져

자가 모순을 고집하면서 남을 공격하는 것으로 겨우 존재의 이유를

유지하는 재앙을 면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가시적 길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계신

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이에 대하여 끊임없이 가시적으로도 대응

하며 또한 가시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그 태도가 궤도를  벗어나는

지의 여부를 공평하게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가톨릭

신자는 안심하고 건전한 영적 향상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

여 진리와 사랑의 일치 속에 유형적으로 나타난 하느님 나라를 통하

여 주님은 구원을 풍요롭게 성취하신다.

 

 인간은 자타가 구원의 협력자로서의 영광을 얻고 또한 그 협력 때문

에 더욱더 상호 친밀하게 결합된다. 그리하여 강생의 현의는 교회의

신비로서 계속된다.

 

 

 그 옛날 아름다운 비유의 말씀으로 갈릴래아 군중을 가르치신 것처

럼 또한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시며 고민하는 마음을  위로하시고 깨

끗이 씻어 주시고 안수로써 영을 내리시어 병을 고치신 것처럼 그리

고 마지막에는 상처 입으신 손, 발과 구멍 뚫린 옆구리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희생을 완수하신 것처럼 주님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시적

교회를 가지고 그 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

 

 성직 제도와 성사로써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에까지 탄생시킨 신

비체인 가톨릭 교회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계속하도록 전권

을 위임받은 유일한 단체이다. 거룩하고 보편되며 하나이고 사도로부

터 전해 오는 교회, 그 머리는 그리스도로서 신성한 교회, 주님은 하

나, 세례도 하나, 주님이 베드로를 그 후계자로서 지상에서의 그 대리

자로서 정하신 세계적 교회가 곧 그것이다.    

 

 

 

 

 교회의 본체인 그리스도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사회성이 자연히 만들어 낸 단체가 아니다.

또한 신자들의 종교 생활이 낳은 당연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그

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그 신비체를 움직이는 영은 그리스도의  영 그

자체이므로 개개의 신자가 은총을 받은 다음에 교회가 성립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그 신비체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즉 윤리적 순서에 의하면 우선 교회가

존재하고 그런 후에 그 결과로서 개개의 영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교회의 본체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모든 거룩해짐은 그리스도에 의하

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 17).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다."(루

가 10, 16)라고 말씀하신 "말씀의 일꾼"이다.

 

 하느님 나라가 넓어지는 것은 단지 불가시적인 은총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의 선교에 의한 것이다.

단지 인간은 씨를 심었고 물을 준 싹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

십니다."(1고린 3, 6). 교회는 개개의 신자에게 내리신 은총으로 자

연히 성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도 아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

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두셨습

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그 다

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 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등입니다."  "몸 안에 분열이 생기

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지

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기뻐하지 않겠습니

까"(1고린 12장).

 

이들 말씀 속에 하느님 나라인 교회의 질서 정연한 기구와 살아있는

발전이 명시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적극적인 하느님의 뜻에 따

라 제정(制定)된 것이다. 이 살아 있는 성전의 으뜸인 베드로가 "주

님은 살아 있는  돌…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

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여 드리십시오."(1베드 2, 4-5)라고 말한 데 대하여 같은 베드로가

일치의 표시로서 오른손을 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도 또한 같은 말

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느님

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

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

야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

른 기초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1고린 3, 9-11).

 

하느님 나라는 주님의 위임을 받은 건축가가 살아 있는 돌인 그리스

도의 기초 위에 질서 정연하게 쌓아 올린다. 인간은 이 진리를 인정

하고 하느님의 조수들의 권위에 따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일

원으로서 하느님 나라 건설의 밑돌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와 사도들의 기초 위에 놓이지 못한 돌이기에 멀지 않아  황망한 폐

허에 놓인 돌이 되거나 두 길 중 한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주관적

프로테스탄티즘은 그야말로 자유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복종하느냐

안하느냐가 자유일수는 없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주장하는 그 자유

의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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