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769] 효임 골롬바 성녀에 대해서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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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신부 | 작성일2000-04-01 | 조회수1,578 | 추천수0 | |
자매님의 세럐명은 효임 골롬바가 맞습니다. 한국 순교성인으로 김효임이란 이름의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아래 간략한 자료가 있습니다. 골롬바는 그분의 세례명입니다.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된 뒤 김효임이란 분의 이름은 이제 성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 모든 신앙인이 세례받으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정할 때 김효임이란 성녀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그런데 보통 성인이 되면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세례명을 함께 붙여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그런 규칙이 있는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교회 관습적으로 성 김효임 골롬바, 성 김대건 안드레아로 부릅니다. 또 신자들끼리 서로의 본명을 부를 때는 대개 성을 생략하기 때문에 효임 골롬바, 대건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다음은 김효임 골롬바 성녀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김효임(金孝任, 골롬바, 1814∼1839)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김효임 골룸바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곳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전가족이 다 함께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두 여동생 김 효주(아녜스),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을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매주 두 차례의 재(齋)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니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감탄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39년 4월 김효임은 그간 이사한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효임은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서적을 감춘 곳을 대라는 관헌에 의해 동생과 함께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두 자매는 소위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몸의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을 벗긴 채 남자 죄수의 방에 넣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흉악한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이렇게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형조로 이송되어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신문이 끝나자 효임은 포청에서 겪은 법외의 고문과 능욕에 항의했다. 이 때문에 포청에서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후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고통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신보다 20여 일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래의 자료는 김효임 성녀께서 세례명으로 정한 골롬바 성녀에 관한 내용입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성녀가 많을 수 있기 때문에 아래 성녀 중에서 김효임 성녀가 어느 분을 자신의 세례명으로 정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같은 이름의 성인 성녀가 많기 때문에 대개 이름 뒤에 지명이나 그분을 구별할 수 있는 다른 명칭을 덧붙여서 부르곤 합니다. ( )안의 내용은 주로 지명을 말합니다. 예를들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아씨시 지방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말합니다).
1. 골룸바(꼬르도바), 순교자(COLUMBA OF CORDOVA +853), 축일: 9월 17일 골룸바는 스페인 태생으로 자기 친척들이 타바노스에 세운 공동체에서 수녀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 공동체가 무어족들에 의해 폐쇄되는 불운을 맞게 되자, 그녀는 꼬르도바의 무어족 사령관에게 가서, 모하멧은 거짓 예언자라고 주장하면서 격렬하게 항의하다가 참수당하였다. 그녀의 시체는 과달귀빌 강에 던져졌다. 이처럼 용감한 순교자는 아주 드물다.
2. 골룸바(리에띠), 동정(COLUMBA OF RIETI +1501), 축일: 5월 20일 성녀 골룸바는 리에띠 태생으로 그녀의 부모는 양복짓는 사람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딸을 낳게 되자, 천사처럼 보인다하여 안지오넬라라고 불렀으나, 영세 때에 골룸바로 개명하였다. 그녀는 몸과 영혼이 매우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그녀에게 읽기를 가르친 도미니꼬회 수녀로부터 성 도미니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에 대한 신심을 배웠고, 그녀의 일생 동안 위의 두 성인 성녀가 자신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10살 되던 해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는데, 부모들은 어는 부유한 청년과 약혼하기를 강요하므로, 골룸바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면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께 몸과 마음을 드렸노라 선언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성녀 가타리나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기회를 엿보았다. 한 번은 거의 5일 동안이나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후일 그녀는 팔레스티나의 성지들을 둘러보았노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19세 되던 해에 그녀는 도미니꼬 재속 3회원이 되었다. 그 후 골룸바는 자주감옥을 방문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고, 고백성사를 받도록 하였다. 그녀의 일생에는 온갖 기적들로 장식되었다. 비떼르보에서는 마귀들린 사람을 고치는 등 수많은 치유의 기적도 보였다. 물론 이런 이상한 기적들로 인하여 교회 당국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고해신부이자 전기작가인 세바스챤 안젤리 신부는 그녀를 극구 옹호하였다. 교황 알렉산델 6세가 페루지아를 방문하였을 때 그녀를 직접 대면하였는데, 놀랍게도 그녀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게 되자, 그녀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얼마 후에 그녀가 마술을 한다는 소문으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였다. 차츰 차츰 그녀는 온갖 병에 시달리다가 34세를 일기로 승천 축일 아침에 운명하였다. 이때서야 교회 당국은 그녀의 공식 장례를 허용하였다고 한다.
3. 골룸바(상스), 순교자(COLUMBA OF SENS 연대미상) 축일: 12월 31일 상스의 골룸바는 프랑스에서 크게 공경받는 순교자이나, 순교한 연대와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4. 골룸바(이오나), 원장, 선교사(COLUMBA 521-597) 축일: 6월 9일 콜(Colm), 콜럼(Colum) 그리고 콜름실(Colmcille)로도 알려진 골룸바는 아일랜드 도느갈의 가탠에서 왕가의 후예들인 페들리미드와 에트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마도 위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영세받았고, 모빌에서 교육받고 여기서 부제가 되었다. 그런 후 그는 라인스터에서 수학하였으며, 클로나드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에는 성 모비의 지도아래 글라스네빈으로 갔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하여 543년경에 이 도시가 소개되었을 때, 그는 울스터로 가서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당에서 설교하고 수도원을 세우면서 약 15년을 지냈다. 그런 후 563년경에 이 지역을 떠났다. 여기에는 상당히 큰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아일랜드에 도착한 성 예로니모의 시편(핀니안 소유) 사본을 처음으로 복사하였는데, 이것이 성 핀니안과 논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핀니안이 이 사본을 요구하자, 국왕 디아르메이드는 골룸바의 사본은 핀니안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골룸바는 디아르메이드에게 칼을 뽑게 되었는데, 이것은 골룸바와 함께 성소를 찾아온 콘노트의 쿠난이 디아르메이드의 부하에 의하여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양가의 사람들은 끝없는 혈전이 벌어졌는데, 큘 드렘느 전투에서는 약 3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 텔타운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골룸바에게 책임을 물어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 결과 골룸바는 아일랜드를 떠나기로 결정하였으며, 수많은 외인들을 개종시키므로써 죽을 때까지 보속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563년에 그는 12명의 친척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연안에 있는 이오나로 갔으며, 여기서 수도원을 세웠는데, 아일랜드의 교회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픽트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전념하였으며, 브루드 국왕을 개종시켰고, 마침내 픽트랜드 전역을 복음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큰 성과가 나온 이면에는 큰 기적이 하나 있었다. 네스강에는 큰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골룸바가 성호를 긋고 기도하므로써 이를 퇴치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고, 기적에 대한 명성으로 인하여 수도원의 방문자들이 줄을 섰다. 골룸바가 서방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오나 출신 수도자들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회칙은 성 베네딕도의 회칙이 정착되기 전까지 전 유럽에서 통용되었다. 그는 성령의 기쁨을 안고 살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즐거운 신앙생활이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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