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825]그건 아마도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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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성호 | 작성일2000-05-20 | 조회수1,081 | 추천수3 | |
성서가 쓰여질 당시에 초대교회의 주요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이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이지요(아직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서 성서가 쓰여질 무렵에는, 아직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구세사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3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 관한 믿을 교리는 단순히 무오류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들 사이에 현존해 계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모든 믿는이들이 모두 잘못된 믿음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성모승천 교리'를 믿을 교리로 반포하시기 전에, 초대교회때부터 전승되어 온 성모승천 이야기를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이 얼마나 믿고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전세계 교회의 주교님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각자의 교회의 신자들이 얼마나 믿고 있는 지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셨고, 대다수의 신자들이 아직도 믿고 있음에 근거하여 1950년 11월 1일에 믿을 교리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심들이 생겨났지만 곧 사라져 믿을 교리로 선포되지 않은 신심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모승천교리와 동정잉태의 교리는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어지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믿음입니다.
"성모님의 승천과 관련한 교리는 가톨릭교회의 성전을 통해내려오다 공의회(?)를 통하여 믿을 교리화되었다는데 전통적인 공의회는 그당시의 정치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사항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표되어온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단순히 무오류성에 진실이 호도될 필요없이)"라고 반문하셨는데, 미루어 짐작하신 것인지 아니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보셨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성모님께 대한 공경이 가톨릭 교회의 "예수님 승천이후 성령님이 강림하신 이후의 예수지향적인 본래의 모습"에 충실하지 못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모님께 대한 공경이 그분을 통하여 육화되신 예수님께 더 잘 나갈 수 있는 도움이 되고 있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물론 잘못된 성모신심이 신자들 사이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모신심 자체가 "예수님 승천이후 성령님이 강림하신 이후의 예수지향적인 본래의 모습"을 가로 막는다고 매도(?)- 혹 제가 오해를 하여 표현이 너무 과격했다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부연하여 가톨릭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첫째,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시라는 사실입니다.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Mk 3,33-35)라고 말씀하셨다는 구절을 들어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님께서는 단지 육신만을 빌려드렸을 따름이라고 격하시키지만, 사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고백하시며 예수님의 생애의 처음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늘 함께 하셨던 성모님만큼,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 속에서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던"(루가 2,19.51)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행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기에 그 구절은 오히려 성모님께서 단지 육적으로만 어머니이심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어머니되심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부족한 어머니라 할 지라도 자신의 어머니를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사람은 우리 가운데 별로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위대한 성현들의 어머니(맹자의 어머니, 워싱턴의 어머니, 아오스딩의 어머니 모니카, 신사임당 등)를 우리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하물며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어머니를 우리는 소홀히 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 성모님께서는 "최초의 선교사 즉 복음(기쁜 소식) 선포자"시라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구세주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라면, 성모님께서는 가장 먼저 우리에게 예수님을 가져다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루가복음 1장 39절에서 56절에,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2~45)라고 인사를 합니다.
셋째, 성모님께서는 "구원의 협력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님께서도 "처녀의 몸으로서 아이를 잉태하게 되고, 예수그리스도 공생활기간을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시고 아들 예수의 처참한 십자가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셨음을 분명히 기억합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Lc 2,1-7)과 성전봉헌(루가 2,22-38)의 순간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달아난 수난의 십자가 밑에 이르기까지(요한 19,25-27) 구원의 역사 속에 늘 함께 하신 예수님의 참된 동반자이시며 구원의 협력자이십니다.
넷째, 성모님께서는 유일한 "은총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중재를 돕는 또 다른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Jh 2,1-12)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은 바로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의 중재로 앞당겨져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62항에서, "은총의 게획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 하신 그 순간부터 -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엇다-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헤를 우리에게 얻어 주신다. ...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되신 동정녀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조금도 감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 교회는 주저함이 없이 이와 같은 마리아의 종속적인 역할을 선언하고, 끊임없이 체험하며, 신도들의 마음도 이러한 모성적 보호로 중재자이신 구세주께 보다 깊이 결합되도록 권고하는 바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섯째,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며,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심으로써>(요한 19,26-27), 우리의 어머니로 세워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맺어진 초자연적인 혈연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사가가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성모님을 어머니로서 우리의 마음의 집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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