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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다운 자유를 망각한 현대인의 억압과 자기 표현에 대하여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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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질문 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해석들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담겨 있습니다.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2000-06-23 조회수1,143 추천수4 신고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것을 왜곡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들을 위

해 20세기 미국이 낳은 가톨릭의 두 위대한 석학 中 - 풀턴 쉰 대주교,

토마스 머턴 수사 신부 - 고(故)  풀턴 쉰 대주교님이 쓰신 다음의 글

을 함께 음미하고자 합니다. 귀가 있는  자는 듣고서 이해하고  눈이

있는 자는 보고서 알게 되리라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진실한

이성의 소유자라면 그리고 가감없는 분별력을 지닌 중용의 길을 걸어가

는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글이라 여겨져 비록 장문이지만

이렇게 올리게 되었음을 밝혀둡니다.  

 

 

 

 여기서 저의 서론은 접어두고 풀턴 쉰 대주교님이 쓰신 "참다운 자유를

망각한 억압과 자기 표현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 대한 날카롭고도 냉철

한 분석을 들어보겠습니다.

 

 

 

 

 

 

 

 

 

 

 

                     - 억압과 자기 표현 -

 

 

 

 

 

약 700년 전, 인류 역사상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석학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 데 아퀴나스가 욕정에 대해서 한 논문을 썼는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이것을 능가할 만한 것은 없다. 그는  불안에 대해 다루면서 다음

과 같이 말했다. "정신에 해로운 관념은  그것을 억압하는 비례로 해를

끼친다. 그 이유는, 정신이 표면에 나타나서 사라지도록  버려두었을 때

보다도 억압되었을 때 그 관념에 더욱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것을 썼을 때,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것

은 이미 고해성사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해성사는 감추인 불

안을 벗겨내어 심리학적 면에서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한다. 이것은 그

불안들이 무의식에 파고 들어가 콤플렉스를 이루는 것을 막으며 또  이

불안을 약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의지(意志) 면에 나타나면 제어

되고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무의식 속에 내포되어 의지(意志) 라는 방향으로 분출

되지 않는 심리 상태 -불안이든  자아 도취에 사로잡힌 교만함이든 간

에- 는 치유되기가 어려운 정신병증으로 발전되어 간다.

 

 19세기(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신앙인  고백과 참회에서  떠난 지  이미

400년이 된)는 불안, 죄책, 범죄, 우려에 대한 전반적 억압의 무서운 결

과를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작가들은 억압이 위험하다는 옛

개념을 좀 다르게 왜곡했다. 하느님, 윤리,  개인적 죄책의 가능성이 모

두 부정됐기 때문에, 새로운 철학은  욕정과 본능의 억압은 잘못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토마스 데  아퀴나스억압된

관념을 경고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개념에  의하면 인간의 충동자아

(Id)와 그의 동물적 본능이 윤리, 하느님, 종교 등 낡은 미신의 "토템과

터부"를 거슬러 자유로운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심리학은 "자

기 표현을 하라. 종교와 윤리는 그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있다." 고 단언

한다. 모든 견제, 권위, 규율은 인격에 해롭다고 간주됐다.  이러한 철학

은 건전한 이성을 거슬러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교회의 가르침 중 가장 많은 불만과 비난의 대

상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교회가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

고 있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비롯한  다른 것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

다.

 

 인간이 참으로 섹스 본능들에 굴복하고 그리스도교의 결혼의 종신  불

가해소법(終身不可解消法)의 구속을 치워버려야 개선되고 건전해진다면,

왜 사냥 본능과 같은 다른  본능들에 굴복하면 인간이 좀 더  나아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다섯째 계명("살인하지 말라")의 윤

리적 터부를 벗어나서, "네 적을 죽여라"의  살인회(殺人會)를 창립하지

않을까? 섹스 본능과 마찬가지로 공포 본능에도 자기 표현을  허용하고

자신만이 생각하는 그대로의 자유를 용납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면, 어떤

작가들이 자기 부인을 버린 남편을 칭찬하듯, 전투 중에 초소를 이탈한

군인들도 칭찬해야 할 것이다. 섹스 본능이 윤리적 터부에 의해 속박을

받아서는 안된다면 어째서 깡패 본능은 억제되어야 할까?  물건 살 때

나 기차나 버스를 타려고 한줄로 늘어서 있을 때 앞에 서 있는 사람 -

특별히 자기보다 약해 보일 때 - 을 후려갈기고 새치기를 함으로써 자

기가 생각하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고 자신만의 이익을 챙겨서는 안되

는가? 만일 이런 폭력에 대해서 체포가 뒤따른다면, 어째서  국법(國法)

이란 아프리카 추장이 만들어낸 윤리적  터부이며. 인간의 인격을 파괴

하는 것이며, 이 개명된 20세기(- 21세기를 눈앞에 둔 2000년-)에는 하

등의 구속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들고 일어나지 않는가?

 

 애초에 자유로왔다고 주장하는 섹스 본능의  억압이 변태적이라면, 왜

배고픈 본능의 억압은 변태가 아니어야 하는가?  왜 절식(節食)은 단죄

하지 않는가? 아직 아무도 육체 우상자들에게 종교적 토템과 터부가 14

일간 절식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방종의 이론은 심리학적 콤플렉스란 생리적 방출구를  제공

해 주어야만 반드시 치료될 수  있다는 그릇된 주장에 근거를 둔  것이

다. 이것은 마치 빚에 대한 걱정이 심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한 것을

치료하는 방법이란 심장의 피를 다 흘려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말이다.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욕적인 것은 동일 평면 상에 있지 않다.  사람을 죽이려는 심리적 욕

구가, 그들에게 기관총을 줌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거나, 또는 자살을 하

려는 정신적 충동이 한강다리에서 떨어져 버림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해도 되는가? 섹스 본능에 관해서, 자기  표현과 자유로서 기대된 치료

는 거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능 만족에 가장 탐닉한 사람들이 가

장 변태적일 뿐 아니라, 가장 불행한 사람이며, 사회에 가장 큰 위협을

야기시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방종의 이론은 이른바 종교적 "토템"과  "터부"가 억압에 책임이 있으

며, 따라서 정신 이상의 원인이라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이 종교적 토템

과 터부가 이미 인류의 바른 이성과 최상의 갈망과 일치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왔는가? 어째서 로마나 우리  시대

의 몰락 같은 사회적 부패와  세계적 혼란의 시대가 가장 심한  방종과

비종교 시대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같은 계획에 대해서 좀더  심각한 반대 이론(異

論)이 있다. 왜냐하면, 윤리적 본능을 거스르는 육욕적 본능의 자유로운

표현이 올바른 것이라면 확실히 윤리 본능의 억압이 더 큰 억압의 문제

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항상 어떤 것이 억압되기  마련이다. 동물적

본능을 자유롭게 하려면  윤리적 이상을  억압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자의 혁명 본능을 억압하기 때문에 그르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본능의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한다면 민주

주의적 권리가 억압되어야 한다.  이런 방종의 그릇된   이론은 한 형태

의 억압을 다른 형태의 억압으로  대치할 뿐이다. 역사의  사실과  개인

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종마 사육장의 윤리보다 높은  윤리를 원치 않

는 사람들에 의한 도덕감의 억압보다,  정신 이상  특히 노이로제를  유

발시키는 데 더 큰 공을 세운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은 자기의 자유로운 표현이 뜻하는 것에 대한 그릇

된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것은  마땅히 그  본성을 따라서 자

기 표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염소의 본성과  같지 않다.

육신과 함께 불멸의 영혼을 부여받은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따를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적 본능이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가  가장

자기 표현적이다. 인간이 자기 본성을  거슬러 자기의 자유로운 표현을

하고자 할 때, 그는 자기 영혼에는 죄를, 그의 뼈에는 악한 경향을, 무의

식 속에는 괴상한 왜곡과 변태를, 자기 양심에는 아무 말도 못할 가책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그의  전존재(全存在)는 악한 의지에  의한 비행(非

行)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다. 기차는 기술자가 깔아 놓은 자기  궤도

를 달릴 때에 가장 자기 표현적이며  또한 자유로운 것이다. 만일 기차

의 자기 표현이 그 궤도를 거부하는  데 있다면(이때 거부하는  이유가

이 궤도들이 종교적 정신병에 걸려 있는 기술자가  놓은 때문이라고 여

겨서라면) 그것은 하나의 기차로서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삼각형이 네 변으로 자신을 표현할 능력을 찾는다

면, 삼각형으로서는 더 이상 자신을 표현할 수도  없으며 두말할 필요없

이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보일러가 평방 센티미터당 일정한  킬로그램의 압력만을 허용하는

독단적인 제한에 반란을 일으켜 폭발을 한다면 그 자유로운 자기 표현이

란 자기 파괴 외에 다름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조아드(C.E.M.Joad) 박사는 자유로운 자기 표현의 이론이란 실지로 아

무도 믿지 않는 가소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어떤 형태의 자기 표현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동정(同情)에 있어서의 자기 표현은  좋은 것이다. 질투에 있어

서는 나쁘다. 친절에 있어서는 좋다. 잔인에 있어서는 나쁘다. 남을 도와

주는 봉사에 있어서는 좋다. 악의와 자기 확대에 있어서는 나쁘다. 더구

나 - 이것은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  표현된 것이 나쁜 경

우, 많이 표현하는 것은 나쁘다. 예를 들면 만일 내가  술을  안 먹었을

때는 온순하고 친절하지만, 술에 취하면 마누라를 때리는 선천적 갈주증

(渴酒症) 환자라면, 술에 취하지 않을 때의 특징인  친절과 온순으로 나

를 더욱 표현하고, 분노와 폭력등의 타고난 술주정으로 나를 덜  표현하

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을 생물학적, 동물적 본능에 내맡겨버리면 매우 심각한  결과가 따

라온다. 절망과 병증(病症)이  증대된다. 자기가  굴복한 방종의 노에가

된다. 자유는 인간이 어떤 외적인 것의 노예가  될 때 파괴된다. 성서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된다.  이런 종류의 자기 표현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소유자가 되게 하는 대신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

어 버려 타인 소유가 되게 한다.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현대적 노예다.

마침내 이것이 윤리감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런  자기  표현은 책임감을

줄이고 결국 인간 개성의 파괴를 이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슬픔과

절망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만일 욕정과 동물적  색욕에 탐닉하는 것이

자기 표현의 길이라면 늙은 다음에는 무슨  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인

가? 이런 철학은 젊은 동물은 만족시킬 수  있어도 늙은 동물은 만족시

킬 수 없다.

 

 실지로, 인간의 발전을 위해서는 두 종류의 활동 또는 표현이 필요하다

-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이다.  하나는 개인 안에 머물고 또 하나

는 밖에서 작용한다. 자기 표현의 그릇된 철학은 둘째 종류만을  인정

하며 따라서 사람을 완전히 외면화시킨다.  

 

 참된 자기 표현은 첫째, 영(靈)을 완성시키고, 다음에 그것을 객관화

하여 문화를 낳는 것이다. 영의 내향성이 외면의  "행동주의" 속에 상실

될 때 문화는 반드시 사멸한다. 결국 노예 제도가 생겨난다. - 옛날의

노예 제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노예 제도가 생긴다.  옛날의 것은,

인간이 자기 의지에  거슬리는 외적 힘에 종속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노예 제도는 자신의 자아주의적, 이기주의적 의지를 통하여 외적인 것에

종속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노예 제도를 인간에게 재연된 문제로 다룬 점

에 있어서는 옳았지만, 그들중 아무도 이 본질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

들 모두 내적 노예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둘 다 자아주의가 정상적이라고 가정한 데까지는 옳았는데,  하나는 그

것을 집단적 영역에서 연구했고, 또 하나는 개인의 영역에서 연구했다.

 

 이런 자아주의는 타락한 인간의 흠이며, 인간의 출발점이고  목적지인

"초월적 원천"을 주장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한다. 언젠가는 깊은 통

찰을 가진 역사가들이, 어떻게 외적 노예 제도가 내적 노예 제도를 대량

생산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 자기 하위의 본성에게 노예 상태로 있

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노예화함으로써 자기 조건을 정상화

하려 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방탕은 외적 표현을 찾는 개인적 죄의 또  다른 결과다. - 이  경우에

는 타인들을 부패시킴으로써 외적 표현을 찾는 것이다. 내적 공허는 혼

자서 짐을 질 수가 없다. - 이들은 사회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든 그것

을 공허하게 하려 한다. 영혼의 고독은 자신의 분위기를 창조하여, 고독

한 세계를 이루고 만다. 동물적 자아의 표현 - 동물적 자아의 만족은 외

적인 것이다-으로 이해되는 자기 표현은 자신의  파멸뿐 아니라, 평화로

운 사회의 파멸도 초래한다. 전통적 제약과  사회의 윤리적 제재는 점점

가치없고 낡아빠진 터부로  간주되며, 또는 오늘날  자유라는 명목 아래

성행되는 개인적 자아주의에 가해지는 잔인한 압박으로 간주된다.

 

 결과적으로 자기 표현엔 아무런 제한도 인정되지 않는 단계에까지 도달

한다. 가장 반역적 행위가  시민의 권리라고 옹호된다. 그리고  자연법의

방어까지도 "중세적"이라고 비웃음을 당한다.  이 무법 상태가  만연되면

사회에 말할 수"없는 혼란을 빚어 내게 되어 결국 - 독재자가 일어나 힘

으로써 이 혼란을 수습하게  된다. 이리하여 "무제한한 자유는 무제한한

폭정에 귀착한다"는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의 격언이 실현된다.

 

 이제 자기 표현에 대한 그리스도교 철학을 대조해 보기로 한다. 현대

이교주의(異敎主義)처럼 그리스도교도 억압이 해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구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는 악한 생각과 악한 욕망과 악한 행동-살

상, 약탈, 중상, 강탈, 훼손, 탐윽, 증오 등의 욕구와 같은 - 의 억압은

영혼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백의 필요성을 부정함으로써

죄책이나 죄를 억압하는 것은 한탄한다. 그리고 착한 삶을 위한 조력 성

총(助力聖寵)과 영감,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욕구를  억압하는

것은 영혼을 위해 나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섹스 본능의 억압이 좋은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

만 이 본능들의 남용을 억압함은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는 색욕을 막고 어떤 경우에는 폭식을 막는다. 교회는 결코 인간

이 주로 의식과 무의식 두 면으로 되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육신과 영혼,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원의(願意)의 세 면이  있다고 말한

다. 인간은 그의 동물적 본능의 요구에 예속된 짐승이 아니다. 그는 각기

그 본성을 따라 표현되기를 요구하는  윤리적 자아와 영적 자아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쉬운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인간 육신이 영혼에 자동적으로 종속한다거나, 전인격이 하느님

께 자동적으로 종속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자

들에게 있어서 자기 표현의 본질을 이루는 질서 있는 삶의 이상(理想)이

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 본래의 모형 또는 본질에서 좀 분리된 것으로 나

타난다. 인간 본성을 손상시킨 무슨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증거로

미루어보건대 자신이 어떤 식으론가 자기 자유를 남용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생겼다. 세상과 인간은 모두 타락한 것 같다. 그들은 애초에

정하여졌던 것보다 낮은 면에 있다. 그런데 이 타락의 책임은 하느님께  

돌릴 수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 인간의 책임이다. 이 타락 때문에 인간에

게는 악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육신이 반드시 영혼에게 굴복

하지는 않으며 영혼도 항상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 계명을 따르지는 않는

다. 때때로 육신은 영혼의 최대 이익에 반대가 되는 것일지라도 매우 명

령적인 요구를 한다. 또 한편 때때로 영혼도 영(靈)의 수익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이익이 따라온다는  근거로 영혼이 주권을  리비도(Libido)에게

기꺼이 넘겨주기도 한다.

 

 인간 인격에는 두 요소가 아니라 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따

라서 그리스도교의 자기 포기의 교리는 동물적 본능에게 자기를 맡겨버

리는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육욕적인 자기 실현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경험을 다  갖는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지만, 그 반대로 다른 것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경험들을 거절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긴 해도 자기 실현에 도달하는 참다

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없는 것 같다. 더욱이,  어떤 종류의 자

아가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기 실

현의 필요성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유물론적 심리학은 영혼의 수동적 포기를 믿는다. 여기서는 인격의 상

위 부분이 하위 부분과  이의 자발적 욕구한테  마음대로  조종된다. 이

심리학은, 동물적 유산(遺産)을 따라 살면, 인격이 신비로운 동물적 힘으

로부터 병든 영혼이 잃어버린 창조성의 선물을 다시 받을 것이라고 어리

석게 믿는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수동적 포기가 아니라 자기  제어의

노력인 능동적 포기를 믿는다.  영혼은 자신을 손아귀에 쥐고는  하위의

그릇된 욕정으로 하여금 더 높은 목표를  위해 굽히도록 훈련시킨다. 농

부가 가축들을 길들여 자기에게 종속하도록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야수를  자신에게 종속하도록,

나아가서는 전인격을 하느님께 굴복시키도록 훈련을 시키지 않고서는 살

아갈 수 없다.

 

 행복은 하느님의 소명을  깨닫고 본성의 욕구를 극복함으로써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쳐이기는 데만 있다. 이것은 원초적 힘을 부어라 마셔라

식으로 풀어놓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에 가까운 금욕

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주께서 천국은 폭력을  요하며 강포한 사람만이

그것을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있어서 완성의 길은 규율의 길이다. 그는 완성을,

최고점에 도달한 인격의 만족으로 - 즉 생명과 진리와 사랑 곧 하느님께

로의 도달로 알아듣는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수동적으로 포기하면, 그는

현재 조건에서 죽음의 선고를 받는 것이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쓴 약을 먹어야 하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

 

 주께서 당신 교리를 멍에로 비유하셨을 때, 당신의 제자들에게 프로이

트주의자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순결을 보존하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경

쟁적 자본주의 세상에서 마음으로 가난해지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무기

제조자들 틈에서 양순하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쾌락을 찾는 자들 틈에서

슬퍼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실용주의자들  틈에서 정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복수를 추구하는  자들 틈에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면 하

느님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규율의 법은 힌두교나 그리스의 완성의 길과는 아

주 다르다. 이 두 가지는 일종의 자기 유도적(自己誘導的) 무관심에 기반

을 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힌두교는 인격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는 세상에 무관심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람이 자기 영혼의

소멸이나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을 위해 토력해야 된다는 이데아를

배격한다. 교회는 자기 표현이 세상의 구원이나  개인 영혼의 구원과 분

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체계의 본질이

성사(聖事)에 있는 이유다. 이 성사는 우주의 부조리한 요소들을 성화(聖

化)하여 유용하게 만들며, 그리하여 영혼의  목적과 인간 인격의 촉진을

위해 이바지하도록 한다. 교회는 세상과 인간  양쪽의 최상 가치를 인정

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구하는 목적은 또한 세상을 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금욕 사상에 관해서 더욱 망각되고 있는 점은 자기 수련

이다. 이것은 자기 표현의 조건이며, 목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방

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자기  수련의 목적은 오직 사랑이다.  그러므로

동물적 충동을 길들이는 것을 자기 인생의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 - 어떤

동방 신비가들이 하는 것 같은 -  사람들은 육체의 부정(否定)은 성공하

겠지만 영(靈)의 긍정은 성취할 수 없다. 성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사

람이 자기 몸을 불태우게 넘겨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갖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없다고 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을 타락한 본성의 노예

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기 위해 극기(克己)를

한다. 우리 주께서 육신의  욕망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한 적은 절대로

없다. 다만 더 큰 보물을 잃을 정도로 이 욕망들의 만족을 찾아 그 불안

때문에 영혼을 짓눌러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 생활의 목적은 사랑의 성취에 있다.  그런데 이 사랑에 관

해서 이중의 계명이 있다. 하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느 면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얼마간의 금욕

이 요구된다.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유

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 이웃 사람에

게 있는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로 하여금 우리  사랑의 자

애로운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색욕 외에 다른 잡초에 의해서도 질식되고 거의  파괴될 수

있다. 속심(俗心)도 이 중의 하나다. 실천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에서

도 거의 잊어버린 진리가 있다. 악한 것은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이

세속의 정신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세상으로부터 초탈해야 한

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1요

한 2,15). 성 요한이 혹평한 이 세속은 밥 -과- 김치 존재의 세상이 아니

라, 시간과 공간을, 하느님이 제외된 바 폐쇄된 체계로 간주하는 세속 정

신이다. 윤리 법칙과 결별한 정치와 경제, 종교 없는 교육 - 이들은 세속

정신의 현상들이며, 이런 것은 모두 해롭다.

 

 그러나 그 자체를 찾을 가치가 있는  이상(理想)으로서의, 세상으로부터

의 이탈은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는 헉슬리 (Aldous Huxly)처럼 말할 수

는 없다. "이상적 인간이란 해탈된 인간이다. 육체적 감각과 색욕에 집착

하지 않는 사람이다. 권력과 소유에 대한  갈증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다 과학과 사색과 인류애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불교나 도교의

비집착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이 아니다.

 

 소유하는 자는 소유되며 생의  환상의 노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고상하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해탈과 탈속(脫俗)을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

지 않는 한, 즉  일차적 목표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도달하는

단순한 방법으로 여기지 않는 한 헛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목적으로서의 금욕주의가, 경고가 필요할 만큼 대다수의

사람에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있는 그런  시대는 아니다. 오히려 방종

이 오늘날 몇 갑절 더 만연된 오류다. 이것은 또한 더  치명적이다. 문명

에 있어서 유연(柔軟)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고  규율의 결핍보다 더 인

격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

 

 역사가 토인비(Arnold Toynbee)는 멸망한 21개의  문명 중에서 16개는

내부의 부패 때문에  망했다고 말한다. 국가들은  별로 살해되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 자살을  범한다. 그러기에 오늘의  이기주의와 쾌락 애착의

동향과 자신의 자아주의에 대한 긍정과  자기 단련에 대한 만연된  거부

등이 불길한 징조이다. 비록 두 세계 대전이 우리에게 막대한 희생을 부

과했고, 우리가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러고  나서도 그것만으로

써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가장  큰 희생을 하게 하기에는  충분치

못하였다. 즉 인간은 자기가 동물로 하여금 영(靈)에 대한 주도권을 얻도

록 허용할 때가 가장 자기 표현적 이라는 환상을 포기하는  희생을 하도

록 하기엔 충분치 못했다.

 

 인간의 하위성(下位性)의  해방이 파시스트와  나치스와 공산주의자에게

어떤 결과를 이루었는가를 볼 때, 우리는 분개한다. 그래도 우리는, 자기

가 짐승일 뿐이라는 철학으로 출발하여, 서슴지 않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개인 안에 꼭같이 해로운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직 배우지 못했

다. 자기의 이기적 욕정을 극복하지 못하는  그만큼 그런 욕정을 제어하

고 종속시키기 위한  외적 권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치 생활로부터

윤리, 종교, 금욕을 빼어버리면 불가피하게 경찰 국가가 따라오게 마련이

다. 이것은 이기주의에 의해 생겨난 흔란을 수습하려 한다.  법은 강권에

게 양보한다.

 

 윤리는 비밀 경찰로 대치된다. "향락된  위안의 정도와 문명의 성취 사

이에는 서로 상관이 없다. 반대로 안일에 젖는 것은 현재의 또는 임박한

부패의 가장 확실한 표지 중의 하나다."

 

 전체주의 정체(政體)는 자유로운 국가의 사람들에게까지도 침범한 병의

증상이다. 이것은 인간에 있는 부조리의 병이다. 현재 처해  있는 대재앙

의 무서운 범위를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들은 인간이 위대한 물질

적 진보를 이루었다는 사실로 눈이 가려졌다  하지만, 실은 인간은 자연

에 대한 지배권을 얻은 순간에 자신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렸다. 인간

이 자제력을 잃었고 삶의 영적 목적을  부정했기 때문에, 자기 손아귀에

넣은 자연의 힘을 파괴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만다. 원자탄은 현재 인격

의 붕괴에 대한 완전한 상징이다. 무릇  자연력에 대한 지배권의 획득은

자신의 동물적 충동에 대한 지배권의 획득으로써 상쇄되지 않는 한 잠재

적 위험일 뿐이다.

 

 유물론적 심리학자들이 자기 표현을 동물적 본능의 개방으로 여기는 그

만큼, 그는 이 세상의 현재와 같은 비애와 부조리에 기여를 하는 것이다.

동물적 인간은 문명을 지휘할 수 없다.  그들은 평화보다도 전쟁에 정통

하다. 오늘의 우리는 증오를 통하여 공동적을 거슬러 단합할 수 있다. 평

화 중에 우리를 단합시키려면 정신과 공동  목적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

는 전쟁을 수행하기는 힘들었지만, 승리하고 나면 평화는 자연적으로 따

라왔다. 오늘날에는 입장이 바뀌었다. 현대 세계는 건설의 힘보다 파괴의

힘이 더 크다.

 

 평화는 사랑의 결과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인간 안에서 꽃핀

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하느님께로 인도되는 삶을 영

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인도(自己引導)를 억제함으로써 도로

를 멀리까지 포장할  때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규율하도록 우리를 잘 보살피신다. - 그리고 이것은 그분이 우리

에게 주실 수 있는 사랑의 가장 강력한 증명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하여는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 경험의 사실이다. 우리는 지하도나 길거리에서 만나

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자세한 것까지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흥미를 갖

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 중 어떤  사람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다면, 우리는 점점 더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는 더욱 그

들을 보살피게 된다. 그들을 우리 사랑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일 때, 우리

관심과 그들의 행복이.다 같이 커진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의 영

역 안으로 끌어들일 때도 이와 같다. 하느님께서는 좀더 우리 생활을 세

밀하게 인도하시며, 우리는 더욱 더 하느님의  사랑의 실재와 깊이를 확

신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인격을 그분께 맡기는 그만큼,  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소유

하시게 되고 우리 안에 작용하시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포악한 지배자

와 같은 외부로부터 오는 명령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안으로부터 일어

나는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암시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

게 암시하시는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

는 결코 우리가 명령하에 있다고 의식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분에 대

한 우리의 봉사는 가장 고차적인 자유의 형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분

을 위해 무엇을 하기란 항상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응하기만 한다면 그 행복을 주실 수 있다. 심술쟁이 딸을 가진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딸의 의지에 감화를 주기 위해 딸의 마음을 파고들어 가기를

원한다. 어머니의 가장 큰 슬픔은 이렇게 할 수 없을 때  생긴다. 양쪽의

행복은 어머니의 사랑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딸의 허용  여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어느 부모라도 부모의 뜻에 역행하는 자녀를  인도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우리가 반란적  욕구의 만족을 요구하는

우리 안에 있는  동물로 하여금 우리를  인도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를

이끌어줄 수 없다.

 

 우주의 전질서가, 무기물이 식물에게, 식물이 동물에게 동물이 인간에게

예속하는 데 있는 것처럼, 인간의 평화는 자신을 하느님께 예속시킴으로

써만 이뤄진다.

 

 충동자아(Id)의 요구가 초월자아(Super-ego)의  이상보다 더  중요하며,

섹스의 억제가 긴장과 노이로제를 이루고, 이것이 육욕의 방탕으로써 만

해소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 따위  심리학자들은 현세계의 이기주의,

자아주의, 포악성을 격증시켰을 뿐이다.

 

 모든 불행의 주요 원인은 무절제한 욕망에 있다. - 필요 이상을 원하거

나 영에게 해로운 것을 원하는 욕망에 있다. 현대 세계는 굉장한 광고로

우리의 욕구와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지만, 결코  그런 것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은 무한하다. 지상의 선은 모두 유한하다. 따라서 불행과 불

안, 실망과 슬픔이 있게 마련이다. 이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出口)는 극기를 통한 감관(感官)의 제어뿐이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의미하신 것이다 : "손

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버려라. 또 눈이 죄를 짓

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버려라" (마태 18, 8-9).

 

 우리 현대 문명에서는 생물학적인 것이 영적인 것과 결별한 까닭에, 시

계 추가 시계에서 떨어지듯 자유가 하느님에게의 의존으로부터 격리되었

기 때문에, 자유가 무엇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

유로만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자기 수련의 실행의 부흥이

특별히 필요하다.

 

   랑도(Rom Landau)는 올바르게 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완전한 종교는 자기 초탈을 고취할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인간적 동물로서의 자신을 위해서는 제어하기를 거절하지만,

 일단 하느님과의 관계를 의식하게 되면 이를 즐거이 받아들

 일 것이다. 이것이 문제 전체의 핵심이다 인간을 그 영적 본

 성에서 분리시켜, 단순한  육체적 기관(器官)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게 해보라. 그러면 자신을 존중해서 물질적 안

 녕이나 향락을 위해 본질적 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을 위해

 서도 희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일단 그가 하느님을 대면하고

 자기 인격의 신적 본성을 알게 되면, 자기의 육체적 존재를 구

 성하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이 포함 되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하느님과 관련된 자로서의  자신을 위해 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자기 수련은 참으로 자기 표현이다. - 자아 안에 있는 최

상, 최선의 모든 것의 표현이다. 농부는 성장하려는 옥수수의  욕망의 완

전한 표현을 위해 잡초를 뽑아버린다. 극기와 금욕을 통한  자기 제어는,

유물론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우리 본능과 욕정

과 정동의 배격도 아니고 또  하느님께서 주신 충동들을 무의식  속으로

처넣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본능과 욕정과 정동은 악이  아니라 선이다.

자기 제어는 그들의 무질서한 과잉을 억제하는 것일 뿐이다.

 

 성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말한 것처럼, 위를 위해 포도주를 조금 마시

는 것은 한 본능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가 있는지 위가 있는지

를 분간치 못할 정도로 많이  마시는 것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포도주를

남용하는 것이다.

 

  일단 본능과 욕정이 의지에 예속되면  이들은 근절되고 인도될 수  있

다. 교회가 이들의 불법적 표현을 견제한다고 해서, 욕정을  억압하는 것

은 아니다. 교회는 배고픔을 부정하지 않듯, 정동(情動)을 부정하지 않는

다. 교회가 부탁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이  식탁에 앉을 때, 돼지처럼 먹

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바오로의 강렬한 열정을 억압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그것을 미움에서 사랑에로  전환시키셨을 뿐이다. 주께서는

막달레나의 생물학적 활력을 억압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그녀의 열

정을 악의 사랑에서 덕의 사랑에로 돌리셨을 뿐이다. 이러한 에네르기의

전환은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대죄인이 가끔 대성인이 되는  이유를 설명

해 준다 그들이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죄인이었기 때문

이 아니라, 강한 욕구와 맹렬한 정열과 넘쳐 흐르는 정동(情動)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거룩한 목적으로 전환될 때 전에 해를  끼친 그만

큼 선을 행한다.

 

 이 원리는 국가에도 적용된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서구 문명의 짜유

주의자들의 무관심과 거짓 관용보다도 혁명적 러시아에 그리스도교 전교

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미지근한 물보다는

불을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 러시아의

불이 지금은 공산주의의 숨막히는 잿더미에 덮여 있지만, 어느 날엔가는

은총의 도움으로 타올라,  하느님과 그 아드님  성자의 격렬하고 뜨겁고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으로써 세상을 비추고 뜨겁게 하도록 하소서.

 

  강한 열정은 성화(聖化)의 고귀한 소재이다 극도로 범죄한 사람이라도

절망하여 "나는 회개하기엔 너무나 큰 죄인이다"  또는 "하느님은 나 같

은 것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서는

이따금씩 제스처로가 아니라,  "열정 없는 정열"  "난폭한 침정(沈靜)"을

가지고 사랑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이신다.  메마른 땅에서 헤엄칠

수 없듯, 뉘우치지 않는 죄인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그릇된 힘을 하느님께로 향하고 하느님께 재지도를 청하자마자, 전에 결

코 행복치 못했던 것에 반비례로 행복하게 된다. 하느님께로부터의 격리

를 지속시키는 것은 이미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그 잘못을 뉘구치지 않

는 현재의 고집이다.

 

 막달레나와 바오로처림 하느님께로 되돌아간 사람들은 그의  이전 경향

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규율을 환영한다. 극기는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

께 대한 사랑 때문에 행하여질 때만  그렇다.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석탄

불 위에 자기 생명을  내던지거나, 큰 쇠못 위에  누워 생명을 내버리는

그런 "성자(聖者)"는 결코 교회로부터 시성(諡聖)되지 않는다. 금욕을 위

한 금욕은 참으로 일종의 자아주의일 뿐이다.

 

 자기 수련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며, 그것의 목적은 하느님께 대한 더욱

큰 사랑이다. 애덕을 파괴하는 금욕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잘못이다. -

빵 겉껍데기만 먹고 살기로 결심하고서, 수도원을 자기의 괴벽을 만족시

키기 위한 빵 겉껍데기 사냥터로 만들어 수도원을 온통 뒤집어엎은 수도

자가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웃을  불쾌하게 하는 금욕은 하느

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올바른 종류의 극기는 우리 본성을 완전하게 한다. 정원사가 가지를 쳐

버리는 것은 장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좀더 아름답게 피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지치기의 목적이  덩굴의 파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미의

완성에 있듯이, 자기 수련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다.  자기의 명

성을 영구화하기 위한 것과 같은 인간적 목적을 위하여 행한  선행은 인

간적 보상 외에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행한

극기 행위만이 영혼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극기 행위는 올바른 동기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애착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희생하는 극

기라야 한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의 사랑 없이 행한 극기는 비록 제아무리 엄한 극기

라도 아무 소용없음을 우리에게 강력히 상기시킨다. "내가 비록 모든 재

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

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고린 13, 3).

 

 페넬롱(Francais Fenelon) 대주교는 자기  수련을 즐거이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보류를 두는 것이 얼마나 영적 진보를 방해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러한  보류에 대해 망설인다.  그리고 자책이 두려워

그런 것은 모르는 척하며 그런 것을 보물처럼 고수하려 한다. 이런 보류

중 하나를 떼어버리면 뜨끔한다‥‥ 악이 존재한다는 매우  확실한 증거

다. 어떤 보류된  점에 대해 포기하기를  멈칫멈칫하는 것일수록 포기할

필요가 있는 것임이 더욱 확실하다. 그린 것에 꼭 묶여  있지 않다면, 자

기가 자유릅다는 것을 자신에게 확신시키려고 그렇게 애쓰지는  않을 것

이다. 배가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람이 없어서인가?  천만에.

성총의 숨결이 불어주고 있다. 배가 바닷속 깊이 있는 보이지 않는 닻에

묶여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탓이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 탓이다.

우리가 철저히 살피기만 하면, 우리를 억류해 놓는 감추인 속박을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미덥게 여기는  그 점이 분명히 가장 믿지

못할 점이다."

 

 극기는 미움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

다. 어머니는 어린 딸의 뺨에 꽃봉오리를 올려놓기 위하여 자기 뺨의 꽃

봉오리를 희생한다. 학자는 자기 근육을 발달시키려는 회망을 버린다.

리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권력과 자아주의를 찬양하는  그릇된 이상(理

想)에게 "아니다"라고 말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순절  때 무엇을 "포기

하라"고 말함은 잘못이다.  주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무엇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교환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 영혼을 무엇과 교환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하느님과  사랑하게 되

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자신의 쾌락)과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즉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데서 오는 영혼의 평화)이 있음을 발견

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를 다른 것과 교환하며, 천국을 얻는  데 덜 좋은

것을 버린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利)가 남는 이러한 교환을  매일 계속

한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은 삶의  지배적 열정이 된다.  다른 모든 가치

있는 사랑처럼 이것도 희생을 요구하고  고취한다. 그러나 이상으로서의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랑이, 최근에 이르러 아무런 희생도 고취하지 않는

인내라는 새로운 이상으로 대치되었다. 어째서 세상에 있는 인간 존재들

이 단지 참아야만 하는가?  인내라는 이름으로 도대체 인간이 무슨 희생

을 했는가? 오히려 이것은 유린된 무리를 보고한답시고 책이나 강연에서

자신의 자아주의를 표현하도록 한다.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참

혹한 것 중의 하나가 참는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결코 "네 원수를 참아

주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직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

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마태 5,44)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사랑은 오로

지 우리 타락한 본성의 증오를 힘써 억제할 때만 이뤄질 수 있다.

 

 그렇지만 자기 수련은 우리에게 이 이상의  일을 한다. 이것은 우리 삶

에 확고한 목표를 준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알도록 도와주는

가장 유효한 자기 수련은 묵상이다. 이것은  마침내 우리에게 자기 실현

을 통한 자제(自制)를 이뤄줄 것이다. 모든 현대 영혼의 대부분의 비극은

자신의 정신 안에 자박(自縛)되어 있다는 점이다. 묵상만이  하느님의 침

입으로써 발광적인 자기 중심의 포위를 쳐부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묵상도 어떤 다른 수련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만족할 줄 알았던 것에 싫증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새로운

환멸을 맛볼 때마다  새로운 집착으로써 메우려  한다. 그들은 지난날의

증오와 수치를 새로이 열광적인 자극으로써 내쫓으려 한다. 그들은 사랑

의 상대자를 바꾼다. 하지만 싫증과 권태는 남아 있다.  그들의 부조리는

습관이 되고, 따라서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영혼

의 상처를 거리낌없이 드러내  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처가  있다는

것, 아니 영혼까지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절망의 노예로 묶어

두는 사슬이 만들어져 있다. 그들의 과거  번민이 아직도 계속해서 가책

을 준다. 그들의 장래는 공포로 어둡다. 그들의 쾌락은  전처럼 강렬하지

못하다. 그들의 불안은 더욱 끈덕지다. 그들은 더욱 빨리  흥분하게 되고

그리고 그들의 양심은 더욱 쉴 수가  없어진다. 그들의 범죄의 순간들은

이제는 공포의 밤들이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짐이 되고,  친구들에게는

싫증이 되며, 넌더리를 내면서도 결코 물릴 줄 모른다. 점점 더 굶주리되

결코 만족될 수가 없다. 마침내 그들은  사기꾼들에게 푸짐한 돈을 지불

하고서, 죄라는 것은 없으며, 죄책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탓이라는 말

을 들으려 한다. 하지만 윤리적  암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쏠아 먹어감을 느낀다.

 

 우리 가운데 있는 이렇듯 가련하고 좌절되고, 정신병, 신경병에 걸린 수

백만의 사람들이, 기어들어오는 광기(狂氣)와  커져가는 광증(狂症)을 피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이들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자신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을 하느님이

"의사"에게 들어올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치는 것이

다. 그들이 이것을 알기만 하면, 단 한 번의 고백으로도, 그들의 죄가 용

서를 받게 되어 구제될 것이다 또한 자기들의 죄를 변명하여  버리는 데

소비한 작은 재산을 절약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뉘우치면 용서하기로  약속하셨다. 그러나 미루기

만 하면 용서받지 못한다 죄는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닳아 없애지만, 그

자체는 닳지 않는다. - 깨끗이 씻겨져야만 없어진다. 영혼의 평화의 비결

은 악으로부터의 해탈을 하느님께 대한 집착과  결합시키는 데 있다.

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요소로서의 자아주의를 버리고 우리 주를 우리 행

동의 섭정자(攝政者)로 모시는 데 있다. 반신적(反神的)인 것은 억압되어

야 하고 신적(神的)인 것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깨어날 때

입맛이 쓰거나 급박하게 쫓겨가는 느낌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마다 "하느님, 맙소사 또 아침이야" 하고 불평하는 대신 사랑에 겨

운 영혼의 행복 중에 "하느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게 될 것이다.

 

 

 

 

 

 

 

    - 풀턴 쉰 대주교의 "영혼의 평화"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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