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모님 [Re : 1190]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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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경 | 작성일2001-03-26 | 조회수1,178 | 추천수5 | 신고 |
+ 찬미 예수님 !
글쎄요. 꼭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존경의 우열을 가리는 비교보다는 성모님에게 교회가 왜 상경지례(上敬之禮)로써 대하고, 성모님에 대한 가르침이 나왔는지를 통하여 각자의 영성에 따라야 할 것 같군요. 요셉 성인이라고 해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따라서는 지금보다 더 큰 공경지례(恭敬之禮)의 예로 대하지 말란 법도 없겠지요? 왜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어떤 면에서는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성적인 면보다는 신학적인 면으로 나눔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1. 몇가지 전제 우리가 성모님에 대한 나눔을 할 때 먼저 꼭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성모님에 관한 모든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로 지나치게 전문화하여 다른 교의나 신학으로부터 고립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바탕 위에서 성모님에 관한 모든 것(성모신심, 교회의 가르침, 영성 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모님의 존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과 상통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부활의 빛으로 생전의 예수님을 재조명한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로, 하느님으로 고백했던 것과 같이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의 빛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성모신심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마리아론이 그리스도론과 관련된다면 당연히 교회론과도 관련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여기셨고,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만 구원활동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성모님의 생애를 하느님의 구세사 안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성모님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모든 성인의 통공 차원에서 성모님의 위치를 찾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 인간과 같이 그리스도 신비체(교회)의 한 구성원이시지만,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신비체인 교회와도 특별한 관계를 지니며, 신비체(교회)를 고유한 방법으로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모님은 <동정 잉태>를 제외하고는 성서에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적 의미의 고고학적 발굴이나 문헌상의 기록도 없습니다. 목격자의 증언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 전통의 가르침과 믿을 교리로서 우리에게 전해져 올 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의문을 품게도 하고, 심지어 개신교에게 심한 비난까지도 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최근 독일의 개신교 예배당, 특히 루터파의 예배당에 성모님상이 다시 놓이고 있고, 일부 개신교인들 중에서는 가톨릭의 성모신심을 매우 부러워하고 있는 경향은 성모님에 대한 믿음이 정당하다는 하나의 증거도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앞에서 전제했던 사항들을 참고로 하여 교회의 가르침과 성모신심과의 관계, 곧 왜 우리가 성모님을 상경지례(上敬之禮)의 예로서 대하고 있는가를 나누어보겠습니다.
1)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 마리아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부터 언급할 성모님에 대한 모든 교회의 가르침은 바로 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가르침을 전제로 나온 가르침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호칭에 대해서 개신교는 물론 일부 가톨릭계에서도 저항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3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앙고백으로부터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모님에 대해서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라고 칭하게 되었고, 3세기 초에 히뽈리투스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낳은 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3~4세기에 그리도론에 대하여 교리적 논쟁이 한창일 때 이 칭호는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4세기 초에 교회 안에 공식적으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한 니체아 공의회의 단죄 과정에서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성자의 위격이심을 선언하면서 자연히 예수님과 성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대두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 호칭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4세기말의 이단자였던 "네스토리우스"는 성모님이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심은 인정하였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끝내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되어 결국은 중국의 당나라에까지 도피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의 종교로 그리스도교를 동양에 소개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 고백한 결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의 위격을 지니시면서도 참하느님이심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의 참하느님이시라면 성모님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자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가 네스토리우스같이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주장할 경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느님이 아니시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의 참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비록 성서에는 나와있지 않는다고 하여도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즉 이 가르침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위격인 성자의 위격만이 존재하고, 이 성자의 위격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참하느님이심을 확인하는 신앙고백이며, 이 신앙고백의 결과로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라는 가르침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2)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어머니"(Kristotokos) : 너무도 당연한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 곧 인성(人性)은 바로 성모님으로부터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적 관계는 단순히 육신만을 이어받았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짐을 뜻합니다. 여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마리아는 몸으로보다 정신적으로 먼저 잉태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모님은 자신의 절대적인 신앙과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순명에 의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고, 그 다음에야 육친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fiat"는 성모님의 절대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순명행위로, 구세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모성애"(母性愛)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영성에 있어서의 중심은 바로 이 "모성애"입니다. 이 관계는 단순한 생물학적 인척관계를 넘어서 인격적 현존에 대한 관계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전적으로 동의하셨고,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자신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봉헌하셨으며, 인류의 새로운 창조사업에 협력하심으로써 곧바로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성모님은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된 인류 공동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시에 그 지체인 "인류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시라면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은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시기도 합니다.
3) 성모님의 "동정잉태" : 이 가르침 역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가르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성모님의 실재를 핵심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2세기 이래로 가장 명백한 교회 전통의 유산으로 전해져 오는 가르침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한 부분으로 선포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논란을 많이 일으킨 부분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대는 주로 유다교에서 비난하였고, 오늘날에도 에밀 브루너같은 개신교 학자는 사실이 아닌 단순한 상징적 의미에서의 "동정잉태"라고 주장합니다(개신교 학자중에서도 칼 바르트 같은 이는 열렬히 옹호하기는 합니다만). 물론 구약성서의 이사야서의 암시적 언급(이사7,14)과 신약성서에서의 언급(마태1,16; 루가1,26-35) 이외에서의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동기에서 공표하였습니다. 첫째, 성모님의 동정 잉태는 구원이 하느님 은총의 충만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은 종말에 이루어지겠지만, 그 시작은 예수님의 탄생에서 시작되었고, 동정잉태는 바로 이 의미있는 시작에 대한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둘때 예수님 자신의 말씀, 즉 하느님 나라에는 이 지상에서와 같은 부부관계는 없다(마태22,30)는 말씀에 따라 지상적 부부관계가 절대적 미래, 즉 하느님 나라에는 없다는 것을 동정잉태가 미리 조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성모님의 아낌엇는 하느님께 대한 봉헌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라는 한 인간에게 인류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위격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요구를 하셨고, 요구를 받은 마리아는 세상 구원에 협조하기 위해 자신의 전존재적으로 봉헌하셨음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의 육화(요한1장)가 인간 구원을 위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역사를 초월하며, 역사를 뒤바꾸는 의미를 지니고 종말론적 완성을 위해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건이고, 이 구원이야말로 곧 새하늘과 새땅의 시작이며, "동정잉태"는 이에 대한 하나의 표징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한 동정잉태는 하느님의 새창조와, 새로운 시작은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이루어짐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와 구원의 시작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는 새로운 차원의 잉태이어야하며, 따라서 당연히 "동정잉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이 영원에로의 초월을 의미한다면, 예수님의 강생은 영원으로부터 역사에로의 진입이며, 당연히 "동정잉태"이어야 하겠지요.
4) 성모님의 "평생 동정" : 교회헌장에서도 "먼저 우리 주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 이 가르침은 교회의 전통적인 믿음입니다. 개신교에서도 초기의 루터와 쯔빙글리도 이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기 교부 중에서 떼르뚤리아노와 대부분의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의 직잡적인 언급은 물론 없습니다만, 요한 복음서 19장 26절에서 십자가상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성모님의 "평생 동정"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교회론적으로 보면 성모님과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들과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만, 인간적으로 보면 성모님이 예수님 외에는 다른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에게 성모님을 맡기셨으리라는 짐작 때문입니다. 사실 성서에서는 성모님의 "평생 동정"을 의심케 하는 구절들이 더 많이 나오고 있으며, 개신교측에서는 이 구절들을 가지고 이 가르침을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성서에 언급된 몇가지 표현들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면 "예수님의 형제"(마르3,32; 6,3; 마태13,55; 요한2,12; 사도1,14; 1고린9,5; 갈라1,19), "첫아들"(루가2,7; 마태1,25), "함께 살기 전에"(마태1,18),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마태1,25)라는 표현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호교론적 반박은 충분합니다(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성모님의 "평생 동정"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흔들임 없는 완전한 봉사를 드리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결단이며, "동정잉태"로 자신의 전존재를 바쳐 하느님께 드렸던 자기 봉헌의 유지이며, 성령의 특별한 은총 속에 종말론적 삶을 미리서 살으셨다는 표징입니다. 또한 인간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을 뜻하며,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의 개방성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가 추구해야 할 삶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성모님의 "평생 동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의 구세사적이고 은총적 의미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가르침입니다.
5) 싱모님의 "무염시태" : 성모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유일하게 원죄없이 태어나신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의 교서인 <무량하신 하느님>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원죄를 안고 태어나셨다면 예수님의 강생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세주가 태어나신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인간이시면서도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한다면, 성모님의 무염시태에 대한 믿음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종말에 이르러 받을 구원을 성모님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미리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미리 받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모님은 원죄없이 태어나셨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성모님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모님도 인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분명히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은총을 미리서 받으셨다는 것 뿐입니다.
6) 성모님의 "몽소승천" : 성모님이 승천하셨다는 가르침입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의 사도적 회칙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신앙의 진리로 공표되었습니다. 물론 성서적 배경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초대 교부들에 의해서도,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 역시 그리스도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 육신이 썩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었습니다(창세3,19;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미리 받으신 성모님은 인간이기에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지만(그러나 그 죽음은 우리와 같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소멸되어가는 육체의 죽음의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원죄로부터의 해방으로 인해 그 육신은 썩지 않고, 즉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승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인간의 종말론적 삶을 미리 사신 성모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성모님의 생애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인 구세사적 삶의 목표를 달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완전한ㅇ 구원의 모습을 성모님 안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전생애를 통하여 아들 예수님과의 전존재적 일치를 위해 샤셨던 성모님에게 주어진 하느님 은총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7)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 : 앞서 언급한 "인류의 어머니"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다만 분명히 알아둘 것은 성모님도 교회의 구성원이시고 지체이시지, 결코 예수님과 같이 교회의 머리는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다만 미리서 구원받은 인간일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은총 자체이신 구세주는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8) 나눔 : 첫째,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모두 그리스도론에서부터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삼위일체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믿을 교리로서의 가르침은 모두 당연한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성모님은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간혹 성모신심의 지나침이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 점을 잊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모님 뒤에 놓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님들을 봅니다. 빨리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모신심으로 돌아갔으면, 그래서 아름다운 신앙인의 참모습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성모 신심은 하느님께 대한 흠숭지례(欽崇之禮)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어디까지나 도움이 되는 성모신심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결국 성모신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모님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성모님 영성의 핵심은 모성애입니다. 모성은 우리 생명의 뿌리이며, 우리 생명의 근거입니다. 모성애가 지니고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 희생, 인내, 헌신, 고통, 희망 등의 덕목은 바로 공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 신앙이 추구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구요. 결코 중세기에 형성된 아름답고, 여성스럽고, 향기로운 것만이 성모님 영성은 아닙니다. 넷째, 우리가 성모님을 상경지례로서 공경하는 이유는 성모님이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가지는 의미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시작부터 성모님은 참여하셨고, 그래서 구원역사의 협조자로서 또 새 창조의 협조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셨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봉헌하는 순명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셨고, 교회의 구성원이시면서도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우리와 교회를 위하여 끊임없이 중재자적 역할을 수행하셨고,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종말론적 삶의 모습을 미리 사셨던 예표로 신앙의 지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산만한 답변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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