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주교의 역사는 순교와 수난의 역사이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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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 시몬 | 작성일2001-11-09 | 조회수1,100 | 추천수0 | 신고 |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세계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민족의 역사에 나타난 천주교의 역사를 여러 경로의 천주교 관련 사이트에서 검색.발췌하여 다음과 같이 올려 드리오니 질문하신 의문을 함께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1) 서기(西紀)는 그리스도 탄생의 기원이며 천주교의 기원이다.
2) 고대 교회(1∼604년)에서는 교회 창설부터 311년까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참혹 하게 박해하다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개종함으로써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이때부터 세계의 그리스도교화(化)를 이루게 된다.
3) 중세기 교회(605∼1500년)에서는 1054년에 콘스탄틴의 총주교가 천주교회의 교황권을 거부하여 동방 정교를 세운 것이 1차 분열이다.
4)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살으신 땅인 예루살렘 성지를 마호멧교(회교)도로부터 탈환하기 위해서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다. (1096∼1254)
5) 근세 교회(1500∼1965년)에서는 1517년 천주교 신부인 루터가 로마 교황권에 반대하여, 천주교에서 이탈하여 개신교를 세운 것이 교회 2차 분열이다.
6)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베드로가 초대 교황에 임명된 후,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264대에 걸쳐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끊임없이 이어 오고 있다.
7) 우리나라의 천주교의 시초는 거의가 남인파 학자들로서 권철신·일신 형제, 이벽과 정약전·약종·약용[1762∼1836년, 다산(茶山), 요한] 삼형제 들이 천주학을 공부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천주교 교리연구 강학회를 열고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8)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당시 27세 이승훈은 부친이 동지사로 북경 가는 편에 따라가 그곳 천주당에 갔다. 이벽의 부탁대로 거기서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 필담 (筆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귀국 길에 1784년 2월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 으로 조선인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명례동[명동] 김범우의 집에 서 이벽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조선교회를 창립하였다.
9) 1784년 겨울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주일(主日)행사를 거듭 한 것이 관헌에 발각되어 모였던 신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었다. 김범우는 태형을 받은 후 귀양살이에서 죽었다. 첫 번째 순교자였다. 이후 1887년 5월 30일 한·불 수호 조약[1886.6.4]이 비준될 때까지 1백 3년 동안 공적(公的)박해를 받게 된다.
10) 1789년 신해년에 조상 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았다. 이것이 그 후 1백년 동안 거듭되는 박해의 표면적 이유가 된다.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옴으로써 조선 교회 창설 11년만에 성직자가 있게 된다. 전국 신자 수는 4천여 명이 되었다. 그 후 1800년에는 전국에 1만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
11) 제사에 관한 교황청의 법률적 유보는 1939년 12월 제사를 부분적으로 허용한데 이어 41년 제사문제를 지역교회 주교단에게 일임하고 일선 사목자들과 양식있는 평 신도의 판단에 맡겼다. 교황청은 또한 제사에 관한 구체적인 목록을 작성하지 않아 주교단이 제사의례에 관한 지침을 제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2) 1801년 신유년 주문모 신부와 이승훈을 위시하여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 삼형제 등 남인파 학자들이 모두 처형되거나 귀양감으로써 대박해가 일어났다.
13)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성직자 없이 30년 동안 조선 교회가 크게 발전한 것에 감동되어, 북경 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했다. 이는 조선 교회 창립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프랑스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전교활동을 하게 되고 교우수는 6,640명이었다. 1839년 기해년 헌종 때 두 번째 대박해가 일어났다. 2백 70여 명이 순교했다.
14) 1846년 병오년 조선 교회 첫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그 후 1849년 25대 왕 철종(은언군의 부인인 송 마리아의 손자)이 즉위하면서 부터 1863년까지 천주교는 보호를 받고 발전하게 된다.
15) 1866년 병인년부터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박해는 1871년까지 연쇄적으로 계속되어 1만여 명이 순교했다.
16) 1887년 한불 수교 조약이 발효되었는데 "양국인이 서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1만 2천여 명의 신자가 늘어났다. 이때부터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유롭게 전교하고, 개신교도 종교자유 를 가지게 되었다.
17) 1862년 명동 대성당이 세워진다. 1896년 대원군의 부인 민씨(고종의 어머니)가 마리아로 세례를 받고 1898년 선종했다.
18)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에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가 한국에 왔으며,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서 103위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19) 1989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 주례로 제44차 세계성체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이상의 연대적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주교는 예수님께서 친히 사도들을 기초 삼아 세우신 종교입니다. 사도란 예수님의 12제자를 말합니다. 사도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파견된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12사도 중의 으뜸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으뜸 사도인 베드로 사도는 64년경 로마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초대 교황이고 그뒤 수많은 교황들이 이를 계승하여 현재 제 264대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보내시어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마태 16.18-19).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우리 나라 사회의 여러 상황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교회 창설의 첫번째 배경으로는 천주교회의 동양 선교와 한역 천주교 서적의 전래를 들 수 있으며 동양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16세기 말엽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천주교가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의 활동이 우리 나라에도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마태오 리치 신부였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이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수 있다는 보유론(補儒論)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천주교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와의 관계를 밝힌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17세기에 들어와서 그 밖의 여러 선교사들도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는 많은 종류의 책을 지었습니다. 당시 중국을 왕래하던 우리 나라의 사신들이 가져온 한문 서적들 가운데는 중국 선교사들이 지은 책들이 있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 책들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17세기 초, 천주교 책들이 전해지자 우리 나라의 학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를 읽어 나갔지요.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거의 200여 년 동안 천주교의 책들을 읽고 검토해 왔고, 그 가운데서 천주교를 새로운 인생 철학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곧 천주교를 새롭고 참다운 종교로 믿고 실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천주교 서적의 연구는 이땅에 교회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지게 된 첫번째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두번째의 배경으로는 당시 우리 나라 사회의 변화를 들 수 있는데, 조선 왕조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이끌던 사상은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性理學)이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하여 성리학은 조선 왕조의 사회와 정치를 이끌어나갈 힘을 잃어버렸고, 일부 지식인 들은 성리학 대신에 새로운 가르침을 찾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보려던 일부 관리들과 지식인들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 왕조의 사회는 양반, 상민, 노비와 같은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차별을 강요 하고 있었으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이와 같은 신분 제도가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기근과 전염병의 주기적인 발생, 양반 관료들의 민중 수탈 등으로 인해 불안한 생활을 하던 많은 이들이 각종 신흥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18세기의 사회에서는 실학 사상(實學思想)이 발전하고 있었고, 몇몇 실학자들은 중국의 유교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있었으며, 공맹 당시의 유학 사상에 있던 천(天) 또는 상제(上帝) 관념에서 천주교의 유일신 사상 이해에 도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라는 말은 중국에 가톨릭이 전래된 후 상제(上帝) 개념과 구분하기 위하여 천주 (天主)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생긴 말이고, 원래 명칭은 가톨릭 교회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종교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천주교신자들은 “성당에 다닌다"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당은 종파가 아니라 천주교 전례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말하므로 “천주교이다.” 또는 “가톨릭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 입니다. 그리스도교 종파는 크게 가톨릭 교회(천주교),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영국 교회(성공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많은 순교자를 낸 신유박해는 수백 명의 신자들이 희생된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 천주교 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즉 이 때 박해를 피해 피신한 신자들은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궁벽한 구석까지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신유박해는 한국교회에 있어 시련과 성장의 양면을 담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유박해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유박해의 역사성을 보다 넓은 마당에서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편사적인 측면과 비교사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문화적 환경에 있던 한·중·일 3국이 외래종교인 천주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했는지를 살피는 것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제사문제는 허용시 이를 지키기 위해 피흘린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 냐 하는 근본적 의문에서 부터 시작해 가톨릭적 상제례의 토착화 연구라는 학문적 발전으로 거듭해왔으며, 일관성있는 교회 가르침 속에서 선교정책에 따른 제사문제에 관한 시각 변화를 인정한 교회 신학자들은 가톨릭 전례에 맞는 제사 의례를 연구하여, 5~6년전부터 가톨릭 상제례 예식서 개정안 작업을 진행중에 있습니다.
유교 조상 제사의 근본 의의가 보본, 보은의 마음에서 살아계실때 섬기듯이 섬기려는 추효 (追孝)에 있지 신령의 극락천도나 흠향, 기복에 있지않는것을 파악한 교회 신학자들은 죽은이와 산이가 함께하는 공동체적 유대로서 제사 문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신학자들은 제사 문제의 가톨릭적 토착화를 전제하고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제사의 근본의미가 감사에 있는 만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릴때 생명의 근본이신 하느님께도 감사할 줄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 신학자들은 조상들께 드리는 제사를 승화해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보은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것을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천주교는 세계사적으로나 우리민족의 역사성으로 볼 때 참으로 많은 희생자의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이래로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는 통치자들과의 갈등과 충돌로 험난한 수난의 역사속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참다운 종교로 발전 하여 오늘에 이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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