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 1719]세실리아 세레명에 대하여...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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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시몬 | 작성일2002-12-22 | 조회수472 | 추천수0 | 신고 |
예비자 교리를 받고 계시는데 저가 도와 드리도록 하지요.
성녀 세실리아는 체칠리아라고도 하는데 관련 자료를 가톨릭 대학교 강론 자료집과 성 바오로 선교네트에 있는 자료에서 각각 발췌하여 올려 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녀 체칠리아(세실리아) 축일 11월 22일
음악의 성녀로 알려져 있는 체칠리아는 3세기에 아직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지 않았던 시기에 로마의 유서깊은 명문 귀족의 딸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한 가정과 인정을 끊어 버리고 하느님께 몸을 바치고, 또 신앙과 동정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희생한 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발레리아노’라는 한 귀족 청년을 체칠리아와 결혼시켰는데, 결혼식이 끝난 후, 체칠리아는 자기 남편에게 종신토록 동정서원을 했다는 것을 밝히고 또 자기에게는 천사의 특별한 보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크리스찬이 아니였던 발레리아노는 그 천사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싶어 심히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체칠리아는 그를 울바노 교황께 보내어 교리를 연구케하고 마침내는 세례를 받게했는데 그 후 그는 신기하게도 체칠리아의 수호천사를 뚜렷이 목격하게 되어 한층 더 체칠리아를 존경하게 되고 또 그의 서원에 쾌히 동의하고 자기동생 ’따불띠노’ 까지도 신앙에 인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발레리아노 형제가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전교하자 당시의 권력자인 알마키오의 미움을 사게되어 체칠리아와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막대한 재산을 빈민에게 나누어주었고 또 자기 주택까지 성당으로 제공하였으므로,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알마키오’는 체칠리아를 그 당시 사형 풍습대로 목욕탕에 가두어 놓고 쪄서 죽이는 가혹한 처형법을 적용하였습니다. 24시간이 지난 후 목욕탕 문을 열어보니 아직 그때까지 체칠리아는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을 베어 죽이기로 결정하였는데, 형리의 서툰 솜씨때문에 목을 베인 후에도 수시간 동안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죽게되었습니다.
그후 신자들은 그 유해를 정중히 매장했는데, 821년에 교황 빠스까리스가 그 무덤을 열어보니, 그 시체는 조금도 썩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 바른쪽 손가락 3개와 왼손 엄지손가락 1개를 내 보이며 3위일체를 표시하고 죽었다고 하는데, 그 손가락도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교황은 예식을 갖추어 그 거룩한 유해를 체칠리아 대성당 지하묘소에 정중히 안치하였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성당에는 순례자의 줄이 끊어지지 않고 많은 이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체칠리아라는 이름은 ’첼리 릴리아’(Caeli Lilia) 즉 ’천국의 백합’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체칠리아 성녀는 외교인 남편을 개종시키고, 자신의 온갖 부귀 영화를 포기한 채, 그리스도께 사랑때문에 그 동정심을 간직하고 순교한 크리스찬 여성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대학교 강론자료집에서...
체칠리아 Cecilia 연대미상 축일: 11-22 동정 순교자 로마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230 ? 순교)
축일;11월 22일
체칠리아는 로마의 순교자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 이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정확한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초대 교회가 그녀에게 바친 영예에 대한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4세기 후반의 단편적인 기록이 그녀의 이름을 딴 교회를 언급하고 있고 그녀의 축일은 적어도 545년에 와서 경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체칠리아는 발레리아노라는 로마인과 약혼한 높은 신분의 젊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영향으로 발레리아노도 개종하고 그의 형제와 함께 순교했다. 체칠리아의 죽음에 관한 전설은 칼로 그녀의 목을 세 번이나 친 뒤에도 3일 동안 이나 살아 있다가 교황에게 자기 집을 교회로 바꾸어 주기를 청하고 죽었다고 한다.
문예 부흥기 이후 그녀는 흔히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설명 ; 다른 착한 그리스도인처럼 체칠리아도 마음 속으로, 때로는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녀는 훌륭한 음악이 전례의 내적 요소이며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교회에 크나큰 가치가 있다는 교회의 확신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 음악의 혼란 상태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 마디 말을 상기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인용 ; "부제들이 보좌하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전례 의식을 노래로 성대히 집전할 때, 그 전례 의식은 더욱 고귀한 외양을 갖춘다. …성가대가 부단히 육성되어야 하는 바, 특히 주교좌 성당에서 그렇다. 그와 동시에 주교들과 기타 영혼의 목자들은 노래로 거행되는 어떠한 전례 의식에 있어서든지, 모든 신자들의 무리가 그들에게 속한 부분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힘써 돌보아야 한다. …성교회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로마식 전례의 고유한 성가로 인정한다. 따라서 같은 조건이라면 이 성가가 전례 행위(의식)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종류의 교회음악 특히 다음곡(多音曲)도 전례 의식의 정신과 부합하는 한, 전례 집전에서 결코 배척되지 않는다. …신심 행사 중에나 바로 전례 의식 중에라도 신자들의 소리가 울릴 수 있도록, 종교적 대중 가곡을 적극 장려하여야 한다.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13-11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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