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요한금구 성인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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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임영 | 작성일2003-09-27 | 조회수573 | 추천수0 | 신고 |
요한 금구 성인 이콘입니다.
요한 금구 성인 소개
요한 금구 성인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동일인물입니다. 워낙 설교와 강론으로 유명해서 붙은 별명이 요한 "크리소스토모(황금의 입이라는 뜻)"입니다. 금구(金口)는 크리소스토모를 그 뜻을 살려서 한자로 옮긴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라틴식 발음이고 정교회에서는 크리소스톰이라고 합니다. 347년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생하여 당대에 유명했던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법률학과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양성하게 됩니다. 유명한 법률가이도 했고 정치가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23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례를 받고 374년부터 386년까지 안티오키아 남쪽 산에서 수도하고 386년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사제가 됩니다.
397년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한 후 금구성인은 398년 2월 26일, 황제 아카디우스(Arcadius)의 명령에 마지못해 복종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티오키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하여 404년까지 활동하였습니다.
고트족(Goths)이 콘스탄티노플을 침입했을 때 교구의 그리스도인들을 돌보는 한편 고트족을 위해 성서를 번역하기도 했지요. 고트족과 다뉴브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인 스케테인(Scythian)들에게 선교사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성직자들과 관료들이 성적인 난잡함에 빠져 있고 우매한 것을 서슴없이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적들이 생깁니다. 대주교의 저택에 있는 값비싼 물품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자신이 수도생활에서 배운 것들을 적용하려 하였고 실제로 자신의 봉급을 털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만찬에 초대되는 것을 거절하고 자신이 기거하던 작은 오두막에서 초라한 식사를 하였고 또한 호화스런 공중목욕탕과 교회 주변과 길거리에 즐비한 거지들은 외면한 채 화려한 궁궐과 교회 안에서 부와 화려한 옷과 좋은 음식을 즐기는 관행에 젖어있던 당시의 부도덕을 질타하고 또한 당시에 독신 성직자가 거처에 "영적 자매들"(spiritual sisters)이라 불리는 여성들과 함께 기거하던 관습을 비판하였습니다. 이 관습은 치쁘리아노 성인(Cyprianus)에 의해 강력히 비판을 받았고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금지되었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대주교로서 안락한 생활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황제가 실정을 할때에는 그에 대한 비판과 독설을 거침없이 퍼부어서 황제와 황후에게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가 됩니다. 물론 당시의 신앙인들에게는 감동과 깊은 인상을 남겼지요. 당연히 민중들에게는 황실가족들 보다 금구성인이 더 명성이 높았으므로 황권주의자들은 금구 성인을 증오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차에 황후 유독시아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금구성인은 광적인 군중들의 아첨을 개탄하는 설교를 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하지만 폰투스(Pontus)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성인은 407년 9월 14일경에 추방지에서 사망했는데, 유언은 "모든 만물들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지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로서도 유명하지만 더욱 유명한 것은 그에게서 유래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 성찬예배"(The Divine Liturgy of the Saints John Chrysosto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방교회가 드리는 성찬예배 세 가지 중 가장 대표적인 예배형식이고, 세계의 모든 동방교회들은 ’성 크리소스톰 성찬예배’의 양식에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동방교회의 예배는 Divine Liturgy라고 부르는데 동방교회의 교인들은 이 예배를 ’천상의 예배’라고 부르더군요.
강론자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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