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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지금은 장례 미사도 연도도 가능합니다.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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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정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04 조회수1,142 추천수1 신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한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장례미사도 못하고 연도도 못하도록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관련 교회법도 바뀌었지요. 질문에 대하여 저가 다른 사이트에서 답변을 했던 내용이 기억이 나서 아래에 붙여드립니다.

 

그러한 자살한 사람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는 금지사항으로서 부정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1983년 이후에는 교회법이 개정되어서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부님들의 의견을 종합 정리하여 올려드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1) 박 희중 신부님의 견해 (인천 교구법원)

 

1917년에 만들어지 교회법에서는 장례미사를 금지하는 사람으로 이단자, 이교자, 배교자 그리고 자살한 사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3년 법전에는 자살한 사람에 대한 조항이 삭제되었습니다.

 

형법의 조항은 좁게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따라서 자살한 사람에 대하여도 연미사는 물론 장례미사도 드릴 수 있습니다.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훼손하였다는 점에서 대죄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죄를 지은 영혼이기에 더 많은 기도를 드려야 하겠지요.

 

(2) 백 기태 신부님의 견해 (성 바오로 수도회)

 

자살은 자신에게 베푸는 하느님의 은혜를 결정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이고,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심을 완전히 믿지 않는 결정적인 인간의 행위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하염없이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단지 인간이 그것을 자살로서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그것은 한편으로 볼 때는 단죄로, 벌로 보이지요. 그것이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거기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죽은 뒤에는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스스로가 완전히 거부하였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살한 사람의 최후의 순간울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걸면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연미사나 위령기도를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섭리를 우리가 감히 짐작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단죄보다는 사랑을 하고, 포용하고, 화해하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지요. 비록 자살한 사람이라도 그를 위해서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도록 하면 좋은 것입니다.

 

(3) 김 영배 신부님의 견해 (분당 요한 성당/ 전임)

 

자살은 홀로 생사 대권을 가지신 하느님을 모욕하는 죄가 됩니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신명 32,39.),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직접 자살은 대죄이므로 교우가 자살을 하였으면 그는 대죄 중에 죽었고 또 아무런 회개의 표시도 없었으므로 교회 예식으로 장례를 지내지 못했습니다. 즉 그를 위하여 공식적으로 미사를 드리거나 고별예식을 행하거나 교회 묘지에 안장하거나 여럿이 모여 입관, 하관 예절이나 연도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만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예외가 있을까 하여 그를 위하여 사사로이 기도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습니다. (윤형중 신부저. 상해 천주교 요리 90면 참조).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해설에 보면 "사제는 공개적인 교회 장례식이 거부되는 자를 위해서라도 비공개적으로 위령미사를 봉헌해 줄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386면)

이는 자살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 전과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인 것을 자살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과연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했다면 그는 본정신에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살을 한다는 심리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① 계명이 있고 ② 거스르면 죄가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③ 자유로 이 자기가 선택해서 저질렀을 때 죄가 됩니다. 국가법에서도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죄는 벌하지 않고 오히려 병을 고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통제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자살을 했다면 자살이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며 인간이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살한 모든 사람을 자연사나 병사한 사람과 똑같이 대한다면 자살을 방조하거나 권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는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법 1184조 3항에서 "신자들의 공개적 추문이 없이는 교회의 장례식을 허가해 줄 수 없는 분명한 죄인"의 교회 장례예식이 거부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살을 했더라도 "공개적 추문이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 생기면 교구 직권자에게 문의하여 그 판단을 따라야 한다"고한 4항의 규정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자살한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할 수 있으면 신부님과 상의하셔서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사사로이 위령미사를 봉헌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4) 김 정우 신부님의 견해 (대구 효성 가톨릭대학교 교수/ 윤리학)

 

제목: 한국의 자살 실태와 교회의 대처 방안

 

우리나라 경제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이후 들려오는 소식들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실업과 기업의 도산에 따른 자살이다. 가장(家長)의 자살, 가족 동반 자살, 남편의 실업을 비관한 아내의 자살 등 우리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물론 자살자들의 생활고나 심리적인 고통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제 이러한 자살 분위기가 오늘날 경제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미노 현상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또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면 그렇게 자살했을까 하는, 자살을 묵인하는 풍조가 사회 속에 번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사실 이전까지의 자살은 입시에 대한 강박감과 이성 문제로 충격을 받은 청소년층, 삶에 대한 회의에 휩싸인 노인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요즘은 30-50대가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이 시대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되어 가는 현사회의 문제를 떠맡아 기초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의 몫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자살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그 대처 방안을 살펴보자.

 

1. 자살에 대한 일반적 이해

 

역사적으로 볼 때 자살에 대해서는 지역의 문화와 시대적 사상에 따라 다른 입장을 보여 왔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불행한 처사로 생각하여 특별한 경우로 취급하였다. 군신들의 경우, 충성의 표시로 사용되기도 하며 황족에 대한 처형의 예우(禮遇)로 요구되기도 하였다. 한편, 같은 희랍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소크라테스(Socrates)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같은 철학자는 자살을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행위로 보았고, 스토이즘(Stoicism)에 속한 사람들은 자유인의 상징이며 권리로 보았다. 세네카(Seneca)는 자살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권리며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고상한 행위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이 지배하였던 중세기 서구 사회에서는 자살을 죄악으로 보아 금지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반(反)그리스도교 학자들은 계몽주의 이후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현대로 넘어 오면서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D. Hume, P. de Montesquiu, J. J. Rousseau, A. Schopenhauer, E. von Hartmann, F. Nietzsche등) 그러나 칸트(I. Kant0는 윤리성의 주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윤리성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라하여 자살을 배격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초 괴테(Gothe)의 '젊은 베드테르의 슬픔'등과 같은 문학의 낭만주의 사조는 자살을 미화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물질주의 사조의 팽창과 함께 자살이 놀랄 정도로 유행하고 있으며,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진 급진적 정치 행동주의나 마약 복용은 궁극적 희망을 줄 수 있는 초월적인 가치들과 일상적으로 단절됨으로써 결국 자살로 이끄는 새로운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사회 경제 문화면에서, 너무 유용성과 시간성 안에서만 측정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나 평가를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유용성이나 현재의 가치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자살이나 안락사 등을 더 나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자살에 대한 사회적 상황을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 자살에 대한 교회의 견해

 

성서에서는 자살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나타나 있지 않다. (판관 9,54;16,30;2 마태14,41-46). 성서에서는 자살을 직접 금하거나 종용한 적이 없다. 때로는 공동선(公同善)과 조국이나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기도 하였다. 판관기 16장 30절에는 삼손이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많은 적군을 죽인 사실을 말하며, 사무엘 상권 31장 4-5절에서는 사울과 그 시종 사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태오 복음 27장 5절에는 유다스가 자기의 죄책감 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성서에 나타나는 자살의 직접적인 사례들은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실로서 언급할 뿐이지 그 윤리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밖에 간접적 자살이나 선의의 자살 사례도 있지만 그 당사자들은 자기를 죽이도록 신적 영감을 받은 것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가톨릭의 공통 견해는 자살은 그 자체가 죄며, 따라서 항상 부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자살은 십계명의 제5계인 "살인하지 마라"를 직접 어기는 행위다. 곧 자신을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의 모든 형태는 직접 살인에 해당한다.

 

둘째 생명에 대해서는 하느님만이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는데(신명 32,39참조). 자살은 이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육체와 생명에 대하여 주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진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자살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살인은 인간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지상권의 침해다.

 

셋째,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자연 법칙에 반대되며 자신을 완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며, 더 이상의 인격 성장을 막아 버려 하느님께서 부르신 자기 완성을 향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넷째, 사회적인 대인 관계에서 공동 책임과 서로의 영향 등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로 자살은 공동체와 구성원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쉽게 자살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여러 사람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 독재자에게 항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맨주먹으로 무력 앞에 인간의 자유를 시위하는 일 등은 현시대의 특성이기도 하며, 이런 경우에는 어느 한편만을 정당하다고 말하기 전에 '자살'이라는 범위에서 제외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놓은 부모들의 사랑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려는 군인들의 조국애 등은 특별한 종류로 보아 '자살이다' '불가(不可)하다'라고 쉽사리 평가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생명은 최고의 선(善)이지만 절대적인 선은 아니기에 더 높은선을 향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서 나오는 숭고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의 동기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문화, 국가 정치, 성(性), 연령, 절기, 사회 조건-에서 생긴다. 곧 일정한 조건에서 자살자의 수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자살은 소외, 마음의 고통, 고립, 분노, 죄책감, 심한 우울증 같은 감정들의 결과로서,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무력감을 느껴 자살하기도 한다. 자살 사례 가운데는 우발적인 충동에서라기보다는 계속되는 사회 경제적 압박에 따른 자살이 두드러져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은 바로 이러한 유형의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

 

많은 경우 자살은 사회적 죽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곧 자살 기도는 흔히 최후의 방편으로서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에게 통교와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다. 또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버림을 받았거나 사회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함으로써 도와 달라고 외치는 마지막 절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이러한 자살을 방지하는 데 노력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먼저 개인에 대한 윤리 교육을 실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신성 불가침성을 강조하고 이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참된 교육에 힘써야 하며, 정신 질환이나 심리적 불안정 요인을 치료할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돌보아 주어야 하고, 사회적 측면에서는 인구 분산과 노동 조건의 개선 그리고 소외 계층에 대한 사회 복지적 배려 등에 신경을 써야겠다.

 

또한 자살을 방지하는 일이 자살 기도자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라는 일부 현실주의자들의 비난은 수용될 수 없다. 자살 기도는 대부분의 경우 더 많은 관심과 사랑, 그리고 더욱 효과 있는 도움을 호소하는 최후의 부르짖음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방지하는 방법은 지속적인 감시가 아니라 사랑에 찬 관심과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사랑이 자살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방지해야 하는 의무는 광범위하다. 자살의 깊은 원인을 발견해야 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그 원인을 없애야 한다. 따라서 자살을 방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진정제를 투여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의 일반적인 악조건까지도 없애는 작업을 포함한다. 곧 윤리 원칙들이 문화에 적응할 것이 아니라 문화가 가장 고상하고도 영원한 가치인 윤리적 가치에 따라 쇄신되어야 할 것이다.

 

죄가 되는 자살 행위란 개인적으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완전히 자유 의지로 끊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은 현세 생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큰 잘못이 된다고도 할 수 있지만, 현실 생활을 해 나아가는 동안 "하느님께 받은 소명"을 봉사의 정신과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보존하려 들지 않고,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태도라는 것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앞에서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았듯이 그 원인 면에서 볼 때, 자살자에 대해 무조건 단죄하기보다는 사목적인 면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교회법에 따라 자살자가 주위에 악한 표양을 보이지 않았다면 공개적 죄인 취급을 하기보다는 그 인간적 행위의 장애 요인을 참작하여 유가족을 위로하고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사목적 태도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살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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