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성인 성녀와 세례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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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정식 | 작성일2005-01-05 | 조회수1,370 | 추천수0 | 신고 |
질문하신 내용은 세실리아, 클레멘스, 바오로, 아뽈리나, 엘리사 성인들의 일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으신데, 기본적으로 자신의 세레명과 맞는 정확한 수호성인의 내용을 알아 보려면 제일 먼저 교적에 등록되어 있는 자신의 영명축일을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요한이란 성인은 약 50명 정도가 계신데 누가 자신의 수호성인인지 하는 문제는 축일로서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실리아나 세시리아는 옛날 표기 방식이며 지금은 스콜라 라틴어 발음법으로 체칠리아로 표기합니다. 2명의 체칠리아 중에서 한 분을 소개합니다. 성녀 체칠리아, Cecilia (11월 22일) 연대미상 로마 동정, 순교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230 ? 순교) 축일 : 11월 22일 체칠리아는 '옛 로마인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체칠리아는 로마의 순교자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이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정확한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초대 교회가 그녀에게 바친 영예에 대한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4세기 후반의 단편적인 기록이 그녀의 이름을 딴 교회를 언급하고 있고 그녀의 축일은 적어도 545년에 와서 경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체칠리아는 발레리아노라는 로마인과 약혼한 높은 신분의 젊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영향으로 발레리아노도 개종하고 그의 형제와 함께 순교했다. 체칠리아의 죽음에 관한 전설은 칼로 그녀의 목을 세 번이나 친 뒤에도 3일 동안이나 살아 있다가 교황에게 자기 집을 교회로 바꾸어 주기를 청하고 죽었다고 한다. 문예 부흥기 이후 그녀는 흔히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설명 : 다른 착한 그리스도인처럼 체칠리아도 마음 속으로, 때로는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녀는 훌륭한 음악이 전례의 내적 요소이며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교회에 크나큰 가치가 있다는 교회의 확신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 음악의 혼란 상태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 마디 말을 상기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인용 : "부제들이 보좌하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전례의식을 노래로 성대히 집전할 때, 그 전례 의식은 더욱 고귀한 외양을 갖춘다. …성가대가 부단히 육성되어야 하는 바, 특히 주교좌 성당에서 그렇다. 그와 동시에 주교들과 기타 영혼의 목자들은 노래로 거행되는 어떠한 전례 의식에 있어서든지, 모든 신자들의 무리가 그들에게 속한 부분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힘써 돌보아야 한다. …성교회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로마식 전례의 고유한 성가로 인정한다. 따라서 같은 조건이라면 이 성가가 전례 행위(의식)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종류의 교회음악 특히 다음곡(多音曲)도 전례 의식의 정신과 부합하는 한, 전례 집전에서 결코 배척되지 않는다. …신심 행사 중에나 바로 전례 의식 중에라도 신자들의 소리가 울릴 수 있도록, 종교적 대중 가곡을 적극 장려하여야 한다.(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13-118항) 수호성인 또는 세례명 선택을 위한 참고 주제어: 음악가, 오르간 제작자, 시인, 성악가, 가수 클레멘스는 5명이 계신데 그 분들 중에서 교황이셨던 한 분을 소개합니다. 성 클레멘스 1세, Clemens I (11월 23일) 100년경 로마 교황, 순교 성클레멘스 1세 교황 순교자 축일 : 11월 23일 클레멘스는 라틴어로 '자비로운'이란 뜻이다. 로마의 클레멘스는 성베드로의 세 번째 후계자이며 1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교황이었던 사람이다. 역사에서 보면 그가 101년에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는 4세기나 5세기에 만들어진 전설이다. 아마도 로마에서 가장 초기 본당 중의 하나인 성클레멘스 대성당은 클레멘스의 집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던 것 같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는-오늘날 가(假)클레멘스라고 불리는 작가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혔으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많은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에게서 갈라져 나간 분열에 관하여 클레멘스가 고린토에 있는 교회에 쓴 로마 교회의 편지로 되어 있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용납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는 분열을 몹시 슬퍼하면서 그들에게 일치를 호소한다. 그는 그 싸움의 원인을'시기와 질투'때문이라고 하였다. 설명 :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애덕을 강조한다. 그것은 "애덕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모든 교회는 '옛 것'과 '새 것'사이의 양극화를 체험하고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바오로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클레멘스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골로 3,14) 인용 :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줍니다. …사랑에는 비천한 것도 없고 오만한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아무런 분열도 모르고 아무런 반역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화목한 가운데서 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이 뽑은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49장) 성 바오로는 모두 17명이 계신데 그 중에서 바오로 사도를 소개합니다. 성 바오로, Paulus (06월 29일) 64년(?) 타르소 사도 순교 성바오로 사도(64년 ? 순교) 축일 : 6월 29일 바오로는 라틴어 Paulus로 본래 '작은'이란 뜻이다. 만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갑자기, 미국은 공산주의를 택해야하며 헌법을 무시해야 한다고 설교하기 시작한다면 그에 대한 분노와 반발은 대단할 것이다. 그러한 분노와 반발은 바오로가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므로 이 예는 그의 일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실한 바리사이파였으며, 모세의 율법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그런데 이제 그가 이방인들을 환영하는 이단자로, 배반자이며 배교자로 자기 형제인 유대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바오로의 근본적인 확신은 하느님만이 홀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단순하고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가장 철저하게 율법을 기키는 것까지-도 죄에 대한 보상과 은총의 대가로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인간의 선행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구원되기 위하여 인간은 온전히 예수님의 구원 능력 앞에서 자신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없는 율법의 쓸모 없음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평생을 두고 논쟁했지만 자기 형제인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아직도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약속의 자녀들인 유대인을 원줄기로 하여 이방인들에게 접목된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일은 교회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그 어떠한 그리스도의 사절보다도 더 열성적이고 박력이 있으며 용감한 일꾼으로 만드는 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박해와 천대와 나약함은 매일매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였으며 더욱 승화될 수 있는 요소였다.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있었으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이방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일하다가 로마 황제 네로라는 이방인 권세자에 의해서 순교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설명 : 오로는 양극으로 대립된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를 일치 키기 위하여 타협 없이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가장 위대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모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하여 이방 교회에서 벌인 모금 운동이다. 그것은 우선 그들의 물질적 결핍을 구제하는 방법이었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공동 연대성을 상징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바오로는 아마도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의심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실패가 어떠한 것이든 율법의 노예에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도구이며, 유대인들의 고귀한 유산에 새로이 접목된 이방인들의 가지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인용 :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2고린 11,24-27;12,10) 성녀 아폴리나리스, apollinaris (01월 05일) 연대미상 에집트 동정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축일 : 1월 5일 로마 순교록에는 1월 5일, 에집트의 성녀 아폴리나리스, "동정"이라고 되어 있으나, 역사가들은 이 아폴리나리스가 황제 안테미우스의 딸로서 집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스스로 남장을 하고, 이름은 도로테우스로 하였ㅇ며, 은수자 마카리우스의 지도아래 은수 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한 번은 왕궁에 있던 동생이 악령에 시달리다가 사막에 있는 도로테오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녀가 궁성으로 불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부친인 황제로부터 이것 저것 질문을 당했을 때에도 신분을 드러내지 않다가, 자신의 기도로 동생의 병을 치유한 후 다시 사막으로 갔는데, 그녀가 여자인 것이 드러난 때는 그녀의 사망 후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엘리사에 대한 내용인데, 구약의 예언자 엘리사도 있지만 엘리사는 에리사벳의 다른 이름입니다. 여성 세례명 중에선 영어권의 엘리자베스(Elisabess), 베티(Betty) 리즈(Liz) 리사(Lisa) 엘리사(Elisa) 엘시(Elsie) 베스(Beth) 베시 (Bessie)는 모두 엘리사벳의 다른 표기입니다. 스페인에선 엘리사벳이 이사벨(Isabel)입니다. 위의 내용들을 참고하시고 엘리사벳을 비롯한 다른 성인들에 대하여 더 알고 싶으시면 성인 성녀들의 일생에 대하여 자세하게 나와 있는 사이트는 국내에서 제일 정리가 잘 된 성 바오로 수도회 웹 사이트입니다. 주소는 www.paol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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