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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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여승구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08 조회수455 추천수1 신고
중세시대가 끝나갈 무렵, 북유럽의 일부 왕들은 스스로를 ‘교회의 양’들이라 자처했지만, 그들은 교회보다는 그들의 영토와 권력과 부가 우선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황들은 각 나라의 왕들로부터 정교협약(정치와 종교의 일치)이나 불리한 조약체결을 강요당해야 했다.

이 협약이나 조약으로 각국 왕들은 교회를 조종하여 거대한 수입을 거두어 들이는데 몰두함은 물론 성직자 임명에도 간섭하여 부패를 가중시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 신축공사에 필요한 모금을 위하여 대사령(Indulgence)를 반포하였는데 처음에는 논쟁으로 시작되었다가 결국에는 마르틴 루터와 같은 기회주의자들에게 소위 종교개혁이라는 빌미를 주게 되었다.

원래 ‘대사’라는 말은 영어로 Indulgence 즉, ‘관대한 용서’라는 뜻일 뿐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들먹이는 ‘면죄부’라는 말은 오역중에도 이만저만한 오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개신교인은 물론 중고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교과서에도 ‘천주교는 그 당시 종이 한 장으로 된 ‘면죄부’라는 것을 사면 지은 죄가 사해진다며 이 면죄부를 팔아서 성 베드로 성당과 같은 초호화판 성당을 건축하고 성직자들은 사치와 낭비와 방탕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 종교를 개혁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아마 이런 텍스트를 적어 낸 학자도 독선적인 개신교 신자였음에 틀림이 없고 감수에서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은 교육부(당시 문교부) 당사자도 개신교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어쩌랴 사탄의 힘은 이다지도 막강함을......이로써 한국에서 중고교때 세계사를 배운 모든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천주교가 과거에 그런 과오가 있었고, 그래서 소위 개신교가 생긴거고 개신교가 더 나은 종교이고 예수를 더 잘 믿는 종교이구나 하고 일반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대사령의 세번째 항을 보면 이렇게 씌여져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내는 것은 좋다. 다만,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금식으로 대사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3항이 바로 말로만 주여주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면죄부’로 둔갑한 것이다.

헌금을 걷기위하여 교황과 주교들은 대사령 설교가를 임명하였는데 독일의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하필 루터 신부와 사이가 안 좋은 도미니크수도회의 테첼 신부를 임명하였는데, 당시 독일내에서 저술가인 동시에 웅변가로 명성을 날리던 사람은 루터 신부였다. 루터가 아닌 테첼 신부의 임명은 루터를 따르던 많은 추종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음은 물론 루터 신부 자신도 자기보다 못한 테첼이 대사 설교가로 지명됨에 따른 울분과 반감이 일어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루터는 성직자답지 않게 시기심과 불만으로 새로 임명하여 오는 테첼 신부가 비텐베르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성당 문에 95개조항으로 된 반박문을 붙였다. 이에 질세라 테첼도 106개조의 반박 논문을 성당 문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여 대사 논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그 당시 일고있던 인본주의에 매혹된 일부 추종자들과 어떤 이유로든 당시 교회에 불평이 있던 사람들, 어려운 선행은 필요없고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달콤한 선전에 비상한 매력을 느끼는 무리들, 교리야 어찌됐든 독일사람은 독일만의 그리스도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국수주의자들, 그리고 교회에 헌금을 내기를 거부하고 자기의 물질적 부를 중시하는 제후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들이 루터를 따랐던 이유는 어찌 되었든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한 결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도 이렇게 소개되어있다.
“종교개혁의 종교적 요소가 현대적 견지에서 과대 평가되어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독일 제후들이 루터주의를 강행시키는데 있어서 그들의 이해관계가 없었더라면 루터는 분명 신비주의의 한 지도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루터 신부는 교황에게 순명하면서 실시하려던 종교개혁을 전면 수정하여 돌연,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의 모든 성사를 거부하고, 독일의 왕들과 제후들에게 각기 자기 나라에 독자적인 교회를 창설하도록 궐기 시키게 하였다. 그 이후 소위 종교개혁은 루터가 원하던 바와는 또 달리 진리를 거스르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성서 임의 축소 및 '오직 믿음만으로'를 주장하여 '좁은 길'을 넓게 확장하고 지순한 복종의 미덕을 없이 함)

사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수도자로서 마르틴 루터 자신의 죄스러운 양심을 속죄나 자기부정의 방법으로 찾지 못해 나름대로 마음의 평화와 하느님을 찾아 보려고 노력했던 일과 그 만의 고뇌는 긍정적으로 이해할 만하다. 그는 23세 되던 어느날 얼마 전 죽은 한 친구를 회상하며 현세의 무상함을 절감하면서 또 다른 친구와 산책을 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옆에 같이 산보하던 친구마저 졸지에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황급한 나머지 성녀 안나를 부르며 이번에 목숨을 구해주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2년간의 수도생활을 끝내고 1507년 하느님 대전과 모든 증인들 앞에서 청빈, 정결, 순명의 삼대서원을 마치고 마침내 수도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여러 제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문서마저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결국 하느님만을 믿고 따르겠다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16세 연하의 환속 수녀와 결혼까지 할 필요는 어디 있었으며, 개혁자를 자처한 그가 가톨릭에서 파문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그리도 급한 일이었을까? 그러나 이에 대하여 그의 동료 에라스므스는 이렇게 답변을 대신했다. “비극 같은 개혁운동은 희극(결혼)으로 끝났다."

또 그는 자기의 청빈 서원을 깨뜨리면서 자기가 기도하고 예배하던 수도원을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였고, 그곳에서 사는 동안 그의 동지와 제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지켜보면서 어둠에 싸인 가슴을 안고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그에 관하여 개신교 신학자 찰스 리어는 “루터의 반역 동기는 성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아주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라는 것은 간과하여도 무방하다. 실상 종교개혁의 목적은 개혁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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