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540-604)
축일 : 9월 3일
그레고리오는 희랍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란 뜻이다.
다가올 사건들의 그림자가 미리 드리운다. 그레고리오는 30세가 되기도 전에 로마 총독(Praefectus urbis)이 되었다. 5년간 공직에 있다가 사임하고 시칠리아에 여섯 개의 수도원을 세웠으며, 로마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되었다.
서품을 받고 교황 펠라지오 2세의 일굡부제 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는 로마 교황 대사로서 동양에서 6년간 봉사했다. 그는 아빠스가 되기 위해 소환되었고 50세에 사제와 로마 시민들이 교황으로 추대했다.
그는 성품이 곧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무능한 사제는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봉사에 대해 돈을 받는 것을 금했고, 롬바르디아의 죄수들을 석방시켰으며, 박해받는 유대인과 흑사병에 걸린 병자와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교황의 금고를 비웠다.
그는 영국의 개종에 관해 매우 관심이 많아 자신이 세운 수도원에서 40명의 수사를 뽑아 보냈다. 그는 교리에 대한 존경심을 강화 시킨 것과 전례를 개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레고리오 성가'의 개편에 크게 관여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레고리오가 살았던 시대는 롬바르디아의 침입과 끝없는 싸움, 동양과의 어려운 관게에 놓여 있었다. 로마가 공격을 당했을 때 롬바르디아 왕과 면담하기 위해 간 사람은 바로 그였다.
영국의 한 역사가는 "중세기에 교황이 없었다면 중세의 혼란 상태, 불법, 혼잡이 어떠했을지 생각조차 불가능하며, 중세 교황 중의 진정한 교황은 대그레고리오 교황뿐이다."라고 서술했다.
주교의 의무와 자격에 관한 그의 저서 '목자의 관심사'는 그가 죽은 후 수세기 동안 읽혀져 왔다. 그는 주교를 '규율을 강화하고 설교하는 중요한 임무를 지닌 의사'로 묘사했다. 그레고리오는 청중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솔직한 설교 속에 그날 복음을 적용하는 데 능란했다. 대그레고리오라고 불리는 것은 서방교회의 중요한 4대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오,예로니모와 쌍벽을 이루기 때문이다.
설명 : 그레고리오는 수사가 되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그를 필요로 할 때에는 여러 방법으로 교회를 위해 기꺼이 봉사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특히 그가 로마 주교가 되도록 부름받았을 때에도 자신의 이익을 희생했다. 그는 일단 공적 일에 부름을 받으면 심혈을 기울여 그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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