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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서방교회 동방교회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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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세일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14 조회수637 추천수1 신고

가톨릭 사전에서 옮겨 왔습니다. 참고 되셨으면 합니다.

 

정교회

라틴어 Ecclesia orthodoxa
한자 正敎會
영어 orthodox Churches

   동방교회, 정교회, 하리스트스 정교회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들의 총칭. 고대 말기 동로마제국의 교회에서 생겨난 많은 민족 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정교회는 고대

 콘스탄티노프, 안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 4개의 총주교 관구(Patriarchatus)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가지며, 부분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다. 정교회가 성립된 순서별로 보면   시리아, 불가리아 (917년), 세르비아(1346년), 러시아(1589년), 그리스(1830년), 루마니아(1925년), 알바니아(1937년)의 순이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퍼져있으며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신봉하는 콥트교회, 아비시나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야곱파교회,  남인도의 말라바르교회, 한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펴졌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도 모두 동방 정교회의   이단이다. 이들 교회의 신자는 통틀어 약3억명 정도다. 정교회는 5∼6세기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1054년에는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면서 동서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서로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그 뒤 분열의 폭은 더욱 깊어졌다. 동방 정교회의 중핵은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다. 이들 정교회들은 둘 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떨어져 나온 교회다. 콘스탄티노플를 함락 후에 시작된  러시아교회는 모스크바 대주교를 독립시켜 총주교로 삼았다(1589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  정교회의 신학과 전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61년 동방 정교회는 세계교회협희회(W.C.C.)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동방교회의 특징은 신학과 전례에서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교회가 각 국민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례와 성서는 일찍부터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문학이 발흥하였다.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는 수도지

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며, 성직은 사도전승에 따라 주교·사제부제 등을 모두 고대의 성직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의 전례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주로 성 크리소스토모(Chrisostomus)의 전례를 사용하지만 1년  중 10번은 성 바실리오 전례를, 한번은 성 야곱전례를 사용한다. 교회생활의 중심은 삼위일체의 예배이고, 여기에 성모와 여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첨가된다. ①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그리스 지방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사도 바울로에  의해서다.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속국이었고, 고린토를 비롯한 주요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서로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중부 그리스지방이 마케도니아에 통합되었고 지방구로 설정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재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콘스탄티노플 분열(486∼516년)때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고 성화상논쟁(聖畵像論爭, 725∼842년)때에 성화상 공경을  옹호

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054년을 기하여 서방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리스 정교회도 터키인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발칸제국은 독립을 얻었고,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27년)에서 승리하여 독립하였다.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1833년), 총주교는  결국 승인을 하였다(1850년). 1852년 그리스 국회는 그리스 정교회를 구교로 정했고, 아테네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주교회의(Holy  synod)를 설치하였다.

②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9세기경 키에프 주민들이 콘스탄티노플과 접촉하면서 복음이  전해진 러시아에는 공주 올가(Olga)의 입교(957년),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1세와 황제 바실리오 1세의 딸 안나와의 결혼으로 전도가  활발하였다. 13세기 타타르인이 러시아에 침입하면서 러시아인들이 동북부로 이주하였고, 교회의 중심도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넘겨졌다(1328). 1589년 모스크바의 주교 욥(Job)이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로부터 총주교의 칭호를 부여받은 뒤부터 모스크바는 소위  제3의 로마로서 당시 터키인의 지배 아래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하여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교회를 국가의 지배아래 두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은 표트르대제였다. 그는 총대주교 제도를 폐지하고(1700년), 12인의 위원을 두어 주교회의(Holy Synod)를  관장케 하였다. 이 제도는 러시아혁명까지 존속하였다. 혁명 후 2차대전 시작(1941년)까지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마르크스 유물론과 반종교정책으로 교회가 차르 체제를 지탱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 탄압하였다. 교회재산을 몰수되었고,  성직자는 투옥, 처형당하였다. 1929년 이후 정부는 조직적인 반종교투쟁을 감행했고, 이는 1941년 대독일전쟁 개시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은 반종교정책을 완화시켰다. 반종교선전이 중지되고 1943년에는 주교회의 개최가 허락되었다. 뒤퐁이 죽은 뒤  (1924년) 공석으로 남아 있던 총주교좌에 세리키가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는 서서히 힘을 회복하였고 성직자 교육과 신학연구를  위한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서냉전이 강화됨에 따라 정부의 대종교정책도 강화되었지만 신자의 공직취임 금지조치  이외에는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로 인정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선교사업에 현저한 업적을 남겼고, 1961년  뉴델리의 세계 교회회의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에도 가입하였다. ③ 루마니아 정교회(Rumanian orthodox church): 1856년

공국 (公國)이 된 루마니아는 25년 두에 독립왕국이 되었다. 최초의 왕자 코사(Couza)는 교회를 독립시키기로 하여 국회의 동조를 구했고, 그에 따를 법률도 통과되었다. 1885년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요아킴 4세는 정식으로 루마니아 교회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1차 대전 후 영토와 국민이 증대하면서 교회의 지위도 강화되어 1925년에는 총주교좌가 설치되었다. ④ 불가리아 정교회(Bulgarian  orthodox church): 1204년에서 1393년까지 불가리아 교회는 독립된 주교좌를 갖고 있었지만, 터키인의 침략 이후 투르크제국이  멸망

할 때(1393∼1856년)까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지배아래 있었다. 주교 힐라리온(Hilarion)이 교회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1860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민족주의적 이단이라 하여 반대했고 다시 총대주교 안티모스(Anthimos)6세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파문하였다. 그 뒤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배려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파문을 풀면서 양교회의 관계는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⑤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 1219년 성 사바(Sava)에 의해 독립 주교좌가 되었고, 1346년 총주교좌  교회로 승격되었다. 1389년 이후 약 5세기간 터키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교회도 독립을 잃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재치권 아래  있었다. 1876년 국가가 완전 독립하면서 교회도 1879년에 자치를 회복하였다. ⑥ 알바니아 정교회(Albanian orthodox church): 1912년 터키로부터 독립한 뒤 교회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폈다.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추진된  이 투쟁은, 1908년부터 사제 놀리(Noli)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1920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회교인으로서 뒷날 국왕이 된 조구(Zogu)의 침입을 받아 놀리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37년에야 알바니아 정교회가 콘스타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 정식교회로 인정되었다. 그 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1951년), 폴란드 정교회(1925년) 등의 교회가   성립되었고,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헝가리·마케도니아·우크라이나 등에도 동방정교회 신자들이 살고 있다. 카톨릭과  정교회 사이는 15세기 이후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화해분위기 속에서 대회가 시도되었다. 500여년만이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만났다. 양측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기간 동안 정교회측의 업저버가 참관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1964년 제2차 정교회회의(Pan-Orthodox Conference)에 모인 14개 정교회 대표들은 로마와 교회일치적인 입장에서 계속 대화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가톨릭에서는 동방교회에 관한 문제를 관할하는 성(省)을 1917년에 독립시켜 동방교회성성(Congregation for  Oriental Church)이라 명명하고 있다. 한국의 정교회는 1897년 러시상 정교회의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암보로시 신부에 의해 주한 러시아공사관에서 시작된 선교는 1900년 황제 고종으로부터 정동의 땅1,000평을 하사받아 성 니톨라이  성당을 건립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2대 신부로 온 스케초프스키(Chrysanthus Sketkovsky)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6년 노일전쟁(露日戰爭)에서 러시아의 패전과 이에 따른 원조의 중단, 1917년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과 이에 따른 선교활동 중단 등으로 선교활동이 크게 위축된 데다가, 1945년 이후 정교회를 주관하던 폴리카르프  (Polycarp) 신부와 김의환(金義煥) 신부가 추방되거나 납북됨으로써 교회는 거의 문을 닫다시피 하였다. 1950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출전하였던 그리스군 군목들의 주선으로 1956년 소속이 그리스정교회 산하로

옮겨졌고, 1966년 성당도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으로   옮겼다.참고문헌: Nicolas Zernov, Estern CHristendom, 1961/A.Schmeman, The Historical Road of Eastern Othodoxy,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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