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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도행 | 작성일2005-08-17 | 조회수387 | 추천수0 | 신고 |
* 제가 가지고 있는 신학논문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어 옮겨 드립니다.. 도움이 되실지..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신다면 따로 쪽지를 주시면 다른 내용을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인자표현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인하며, 후대에 초대교회가 재구성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자말씀의 기본적인 친언성을 인정한다."
공관복음안에서의 예수와 인자 서 론 역사적 예수는 그리스도론적 지존칭호를 자신에게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스 콜첼만(불트만의 제자)은 불트만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그의 저서 “신약성서 신학”에서 예수는 전권의식을 가지고 함축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때문에 예수의 표현은 간접적인 그리스도론을 구성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그리스도론을 역사적 예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시아”칭호는 예수께서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부여(대사제 앞에서 인정)하셨으며, 자신이 “누구다”라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MK 8, 21). “주님”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론적 입장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며, 후대 초대교회의 부활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인자”라는 이 말은 예수께서 직접 사용하신 것인가? 아니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가?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이 친언성을 인정하면서도 해석이 다양하게 대두된다. 인자의 역사성, 친언성에서 인자 표현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론의 기원, 부활사건 이전의 예수와 부활사건이후의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연결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의 자기 표현은 예수의 인격, 사명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1. 공관복음의 인자 용법 불트만 이후 학계는 공관복음의 인자 용법을 세 가지 그룹으로 구별한다. ① 지상활동의 인자 : MK 2, 10; 2, 28 , LK 734; 9,58 ② 수난과 부활의 인자 : MK 8,31; 9,9; 12,31; 10,33; 14,21,41; MT 36,2; LK 22,48 ③ 종말의 인자 : MK 8,38; 13,26; 14,62; MT 10,23; 13,41; 16,27.28; 19,28; 24,30; 25,31; LK 12,8; 17,22.30 Q 12,40; 17,24.26 위의 자료를 개괄적으로 볼 때 몇 가지 특이한 사례가 나타난다. 복음서에 “인자”는 82번 나오는데, 이것은 언제나 예수께서만 사용하시며, 모두 주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아닌 다른 인물이 예수를 가리키는 표현은 Act 7, 56과 묵시록 1, 13; 14,14절이다. < 특징 > ① 복음서에서 오로지 예수만 사용 (Act 7, 56과 묵시록 1, 13; 14,14절 외에는). ② 오로지 주어로만 사용됨(서술어나 빈사로 사용되지 않음). ③ 인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한번도 나오지 않으므로 따라서 예비적 이해가 전제된 듯하다. 2. 인자의 어의적(Semantic) 논의 2.1 일반사람을 총칭하는 의미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총칭적 의미이다. 시편 8, 5절을 원문대로 하면 사람의 아들이 된다. ὁ υἱο τού ἀνθρωπού는 히브리어의 ben adem(םאָ - וב)또는 아람어 bar enash(אשׁ - ר) 번역인데, 요한5,27절을 제외하고 늘 ὁ υἱο τού ἀνθρωπού에 이중관사가 있어 강조형인(아람어에서) bar enash(אשׁ - ר)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인자는 본래 칭호가 아니며, 사람 일반을 지칭한다. 구약의 ben adam은 시편 8, 5; 80,18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한계를 강조한 표현으로 등장한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이 에제키엘을 부르는 호격으로 90회 이상 사용되며, 그리스어 위경 중에 ὁ υἱο ἀνθρωπού가 복수 형태로 27번 나오는데 사람 일반을 지칭한다. 그러나 2번 나오는 단수는 하느님을 설명하는 비교 대상으로 씌어졌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자처럼 ...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요셉과 아네셋 18,9에 “인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인자처럼”은 모두 보통사람을 지칭하는 셈어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ὁ υἱο ἀνθρωπού는 복음서의 ὁ υἱο τού ἀνθρωπού 와 비교하여 볼 때 문법적 차이와 함께 의미론적 차이가 발견된다. 즉 위경서의 인자 용법에는 발언하는 자를 지칭하는 완곡어법이 발견되지 않는다. 2.2 완곡어법 이론(Circumlocution of I). Vermes는『Jesus the Jew』에서 아람어 강조형 bar enash는 한 사람, 어떤 사람을 지칭하며, 갈릴래아 아람어에서 א(알렙)이 탈락되어 bar nasha로 쓰인다고 주장하였다. Vermes는 인자 연구의 역사에서 인자의 완곡어법에 대한 새로운 토론을 불러있으켰다. 그는 bar nasha 가 hahu gabra(이 사람)처럼 ‘나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코복음의 인자는 지나티게 거만스럽게 보일수 있는 ’나‘의 완곡한 표현이다. “우리는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군중의 반응(마르2, 12)은 예수의 에두른 표현이 이해되어 이런일이 예수 한 개인에게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Vermes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소개되는 마르 2, 28의 인자 역시 완곡어법의 용례로 이해한다. 마태오 16, 13과 루가 8,27절 9, 18절의(나)는 병행구절이다. 완곡어법으로서의 인자는 역사적 예수에 기인하고, 종말론적 인자표상은 초대교회의 미드라쉬적인 구약의 독서법의 창작이라고 주장한다(Vermas는 유다인으로 예수를 인간적으로 한 형제로 본다.). 2.3 종말론적 인자 인자에 대한 비칭호적 해석들은 비 메시아적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언어학적 측면에서 시작된다. 강조형으로 bar nasha는, 아람어 성서와 쿰란 문헌에서는 규정적 의미를 보존하였으나, 후기 랍비 문헌에는 없다. ‘나’의 완곡어법의 용례가 나오는 랍비문헌은 연대가 매우 늦기 때문이다. 희랍어에서 이중 관사는 화자를 명시적으로 지칭한다. 신약성서에서는 3곳을 빼고 모두 이중관사이다. 인자 표현은 신앙고백 ․ 기도문 ․ 케리그마에 나오지 않음을 볼 때, 이 현상은 2중 관사의 인자가 부활 후, 초대교회가 다니엘 서를 재해석하면서 생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복음사가들은, 예수자신을 지칭하고 bar enasha의 특수성을 보존하려 한 것이다. 예수의 ‘나’의 완곡어법은 청중이 잘못 알아듣기도 했다(MK 3, 28을 ‘하느님의 아들들’로 오인하는 등). 그러나 완곡어법으로 제한하여 종말론적 인자를 그리스도론적 창작으로 배척할 수는 없다. 예수의 bar enasha는 다니엘서의 인자와 관계가 있다. 2.4 다니엘의 인자 기원전 157년 안티오쿠스왕이 유다점령시, 희랍문화로 개조하기 위해 유다교 성전을 파괴,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모셨으며, 유대인들을 개종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따라서 이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이 다니엘서 이다. 태고적부터 계신 분이 최종적으로 네 마리의 짐승을 파괴하고 새로운 창조를 이룬다. 따라서 다윗 왕권(사무엘 하권 7, 14절, 시편 89, 4, 28, 30; 132, 11)의 영원함이 실현됨을 암시한다. Vermes는 화자 자신을 에둘러 표현하는 인자의 용법은 역사적 예수에게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다니엘서 7, 13절의 종말론적 인자를 표상하는 용례는 모두 초대교회의 미드라쉬적인 구약성서 독서법이 만들어낸 창작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서 7, 13절 의 “사람의 모습을 한 이가 태고적부터” 라는 표현의, 이 사람의 아들은 누구인가? ① 집단적 의미 : 7, 25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이 하느님이 주신 시련을 극복하고, 7, 27에서 하느님의 주권을 극복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이들이다. 집단적 의미로 이해하고자 했던 이들의 근거이다. ② 개인적 의미 : 인간이 인간이지 못하고 짐승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람과 같은 꼭 같은 사람인데 하나는 사람이고, 하나는 짐승, 최초의 아담이 타락하였지만, 그러나 나중에 아들은 이것을 회복하고, 다윗 왕권을 실현한다. 따라서 Adam King은 회복된 인간이다. 그러므로 유대 묵시주의에 인자가 나타나게 된다. “사람의 아들” 표현은 에녹서 37-71장까지가 “사람의 아들”, 에즈라서 13장 “사람”이며, 다니엘서 7, 13절의 근거에 대하여 에녹은 “네가 본 인자” 이것은 메시아와 동일시 된다. 그러나 다윗가문의 메시아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다니엘서 7장은 심판의 과정에 인자가 직접 참여하지만, 에디오피아 에녹은 직접 왕들이 심판한다. 에즈라서 13장의 “사람”은 다니엘서에 근거한다. 에즈라서 13장은 다윗의 인자, 그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선재했던 존재는 아니다. 군사적인 특징이 있는 인자의 모습, 최후의 심판은 전쟁으로 나타난다. 에즈라서는 70년 이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쓰여졌다. 그래서 군사적 보복을 강조한다. 에디오피아 에녹서는 37 - 71장을 볼 때, 70년 이전에 쓰여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인자가 발전하지 않았으나, 묵시주의 안에는 일부 나타났다. 그러므로 신약성서 안에 다니엘서 7, 13절의 표상이 있으며, 이것이 공관복음의 인자 표상이 된다. 다니엘의 인자는 바로 이중관사로 지시되고 있는 것이다. 3. 인자표현의 친언성 과연 예수께서는 인자라는 표현을 직접 발설하셨는가? ▶ 비역사성 주장 비역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신중심의 하느님 나라이다. 따라서 신중심의 하느님에 인자라는 중간적 존재가 개입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메시지에 인자라는 언급이 없었으므로, 따라서 인자전승과 하느님나라 전승은 별개의 것이다.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여 중간적 존재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장된 학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중개자를 내세우는 것은, 이스라엘 사고 방식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직접 만나서 다스리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였다. 또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가운데 다니엘서 7, 13절을 재해석하였다고, 비역사성을 주장하는 자들인 주장한다. 이에 강력하게 반발할 수 있는 근거는, 공관복음에는 항상 예수의 입에서만 발설되며, 그리고 항상 주어(83회 나옴)로만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는 처음부터 끝가지 두 개의 관사가 일관성있게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문 안에는 인자 표현이 정식으로 채택되어 있지 않다. 오직 예수만이 주어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서적 근거에 입각하여 비역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올바르지 않다. ▶ 역사성 주장 ① 종말론적 인자만 역사적 : 불트만의 주장, LK 12, 8에 근거하여, 8절 전반부는 “나”이고, 후반부는 “인자”이다. 왜 하나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인가? 불트만의 의문, 따라서 동일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수도 인자의 도래를 기다렸다고 본다. 에디오피아의 에녹서가 말하는 인자를, 자기가 아닌 그 누구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고 주장한다. 과연 예수께서 이 인자를 자신이 아닌 그 누구를 제시했는가? 모든 인자는 초대교회가 예수의 삶으로 소급하여 적용시킨 것이다 라고 불트만은 주장한다. < 불트만의 주장에 대한 반론 > 기본적으로 예수의 “나”는 인자라고 한 것은 예수의 언어적 독창성이며, 예수의 나는 일반적 사람의 총칭이다. 현재의 나와 장차 인자의 종말론적 예를 구별되게 표현하였다. 즉 자신의 종말론적인 것을 표현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의 전권주장은(LK 10, 22)은 무의미하다. LK 10,22의 전권의식을 살펴볼 때, 예수께서는 제3자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미래적 존재로써의 인자를 표현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불트만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② “지상의 인자” : 다니엘서 7, 13절을 근거로 초대교회가 재해석(Vermes가 주장) ③ 종말과 지상의 인자 긍정 그러나 수난과 죽음, 부활은 초대교회가 예수의 예언을 꾸며놓은 것이다(Theiben의 주장). ④ 종말/수난/부활을 모두 긍정(뼤로, 요아킴 예레미야스 등). 결론적으로 인자표현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기인하며, 후대에 초대교회가 재구성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자말씀의 기본적인 친언성을 인정한다. 인자 표현에서 총칭적 표현으로 알아들은 사람들이 있었다. MK 2, 10절의 인자, 죄의 용서 MK 2, 12절 군중의 반응 MT 9, 8절은 MK의 2, 12절과 다른 반응이다. 즉 인자 표현에 대한 총칭적 표현으로 알아들었다. MK 3, 28절 모든 죄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용서받음(총칭적 의미). LK 12, 10절과 어록 MT 12, 32절은 단독적으로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인자표현의 이중관사는 특정한 인자, 이는 다니엘서 7, 13절의 의미를 가리킨다. 예수는 인자표현을 당신의 운명에 암시하여 적용하였으며, 초대교회는 예수의 인자표현을 다니엘의 7, 31절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다. 병의 치유와 하느님나라의 도래는 밀접히 연관시킨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귀신축출, 병의 치유, 심판 등에 제자들이 동참한다. Gerd Theiben은 예수의 메시아니즘은 집단적 성격을 지닌다. 집단적인 메시아니즘은, 본래 예수의 인자는 당신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예수와 같이 그 운명을 동참하는 이들을에게도 해당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인자는 확장적인 개념이다. 로마서 5장과 고린토 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지상의 아담과 천상의 아담을 구별하면서 그리스도론 아담론을 표현한다. 인자 그리스도론에서 바울로에게는 아담그리스도론이다. 예수의 인자는 인자그리스도론에서 인간그리스도론이며, 하느님 나라의 묵시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운명과 메시지를 엮어내었다.
4. 마르코에 나타난 인자 표현 4.1 권능을 가진 지상의 인자 4.1.1 죄을 용서하는 권한(2,1-12) 마르코 복음에 인자 표현은 15개가 나타난다. 그 중 2개(MK 2, 10과 2, 28절)은 지상의 인자이다. 그리고 나머지 8개는 인자의 고난과 관계가 있다. MK9장은 인자의 무력과 권력, 그리고 동시에 고난과 죽음 즉 철저히 무능한 인자를 나타낸다. <불트만의 주장> 2, 10절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당신이 알도록”, 2, 1-12의 말씀은 늘 죄인을 받아들여 죄를 용서하신 분으로 나온다. 인자말씀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역사가가 있다. 6~7절 : 한분이신 하느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2, 1 ~ 5이 원래의 말씀 2, 6 ~ 10 초대교회에서 삽입. 11절로 끝이난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은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 지상에서 누가 사죄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땅 위에서”는 즉 예수께서는 땅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지상에서의 인자는 그 전권을 이어받았다. 유다교의 대사제가 속죄의 날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선포, 그런데 요한은 죄의 용서에 의한,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는 세례라고 하는 성사적 권한을 통하지 않고 죄를 용서하셨다. 유다교에서는 대사제만이 가능한 일이며, 요한은 자신이 속죄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상에서의 사회권을 주장하신다. 따라서 예수는 유다교의 기존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지상에서의 사죄권을 거부하는 유다교의 체제로부터 사죄권을 이행한다. 여기서는 초대교회상황이 어느 정도 채색된 것이 사실이나 예수에게 그 기원이 있다. 다니엘서 4, 31을 보면 모든 권한이 하느님께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 예수님의 직무 안에 드러난 은총은 하느님의 선행을 추구하며, 육신의 치유를 통해 영적 치유까지 나아간다. Criamus의 연쇄구조 A 도입(2,1-2) B, 영적인 치유(2, 3-5) C 논쟁(2, 6 - 10a) B' 육신의 치유(2, 10b - 12a) A' 결말(2, 12b) 보이지 않는 치유가 육적치유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3.1.2 안식일의 주인에 관한 논쟁(2, 23-28) 유다인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39가지로 규정해 놓았다. 따라서 바리사이파는, MK2, 23 - 28절에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가지고 예수께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의 답변은 2, 26절에서 “에비아달 대제관 때”라는 사무엘 전서 21, 1 - 10절을 인용하지만, 그것은 아비멜렉 시대이며, 그의 아들 에비아달로 착각하여 이야기 하신 것이다. 이것은 누구(예수 또는 복음사가)의 착각인가? 예수께서는 다윗은 사제만이 먹는 빵을 사제가 아닌 그의 부하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고 답변한다. 이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문제 제기한 것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다. 유다교에는 Halakah(규범)가 있으며, 이것은 행동의 기준이다. 여기에 안식일에 관한 9가지의 규범도 포함된다. 또한 Haggada(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은 다윗의 이야기처럼 그냥 이야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과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27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는 말씀은 토라를 옹호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2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으로 대 역전극의 결말을 맺으신다. 예수의 초점은 다윗의 권한을 강조하면서, 인자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안식일의 초점을 넘어서, 예수 자신의 최종적인 권리주장이다. 바리사이적인 실천 규범 속에서 예수는 이 규범을 넘어서 초연히 자기주장을 하신다. 그러므로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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