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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레 비오(Padre Pio, 1887 ~1968)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 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파드레는 이탈리아어로 신부를 뜻하는 존칭이다. 비오는 그의 주보성인인 교황 성 비오 5세의 이탈리아어 이름으로 그가 수도회에 들어갈 때 새 주보성인의 이름으로 지은 수도명이다.
아버지 그라치오 포르지오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세파 데 눈치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2살 때 견진성사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다. 1903년 1월 6일 그는 모르코네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했고 그곳에서 1월 22일 비오 수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1916년까지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해 9월 산 조반니 로톤도로 간 그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와 미사로 유명하다. 사회적인 봉사활동에 있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집을 1956년 5월 5일 설립했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다.
50년 이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사목활동으로, 그에게 받는 고해성사로, 그와 나눈 상담으로, 그리고 그의 위로로 의지할 바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신부는 언제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1971년 2월 20일 비오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교황 바오로 6세는 카푸친회 장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얻은 명성을 보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니요. 그는 겸손하게 바치는 미사,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해소에 머물고 주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몇 년 동안 그의 성덕과 기적들은 거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카푸친회는 교회법에 따라서 비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했다. 비오 신부는 이에 따라 1999년 5월 2일 시복됐고 지난 2월 28일 시성이 결정됐다.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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