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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천주교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점들을 풀어주세요!!!!!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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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성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0 조회수598 추천수0 신고

* 사랑의 메아리 *(답 1)

 

성모님께 너무 메달리면 예수님이 가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저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주체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가려지고 성모님만 너무 부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이죠! 그럼 맥락이라면 저도 형제님과 전적으로 동감과 동의를 표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신심의 주체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만약 성모신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분명 잘못된 신심입니다. 성모신심이 그런 것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성모신심의 확산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해하지 마세요! 인간사이 에서도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해서는 전적인 헌신을 보입니다. 이것이 모성입니다. 성모신심은 온전히 예수성심께 지향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 성모님처럼 예수님의 수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도 성모님처럼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것! 한마디로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신심의 모든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역사상 예수님을 가장 잘 따른 가장 훌륭한 제자! 예수님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성모님아니였습니까? 성서에 중요부분에는 어김없이 성모님이 등장합니다.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보십시오! 가나안 혼인잔치를 보십시오.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함께한 골고타언덕의 성모님과 예수님의 유언을 들으십시오! 성모님은 성서에 가려진 것이 아닙니다. 성모신심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결코 빈약한 것이 아닙니다. 빈약하다면 주님의 그 깊을 뜻을 헤아리지 못한 내 가슴이 빈약한 것입니다. 성모신심은 또한 교회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체험에서 성장하고 틀이 잡힌 것입니다. 어느 일순간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합시다. 해가지고 그냥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론이 너무 장황해졌지만 마지막으로 교황님의 고백을 시작으로 답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교황요한바오로 2세의 체험담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황님도 역시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셨죠!

"제 자신의 사제 성소의 기원에 대해 말씀 드리면서 성모님의 도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가정에서 그리고 바도비체 본당에서 성모님께 대한 전통적인 신심을 배웠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님께 봉헌된 작은 성당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저희 학교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되기 전 그 성당을 방문해서 잠시 기도하곤 했지요. 오후에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많은 학생들이 그곳으로 가서 복되신 동정녀께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바도비체의 언덕 위에는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깊은 가르멜 수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도비체 주민들은 종종 무리 지어 그곳에 가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가르멜 산의 동정녀가 그려진 스카풀라 목걸이를 착용하는 신심이 널리 퍼져 있었지요. 저도 스카풀라를 받아서 열 살 때부터 착용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 스카풀라를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도비체 본당과 가르멜 수도원의 성당은 제 어린 시절로부터 중?고등학교 시기를 거치는 청소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제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 저의 사제 성소의 씨앗은 더욱 자랐는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얀 티라노프스키 신부님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에 전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께서 저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어머니께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 성모님께 대한 신심에 한가지 의혹이 떠올랐는데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너무나 커지면 혹시 그리스도께 마땅히 바쳐야 할 흠숭이 흐려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복되신 동정녀께 드리는 참다운 신심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서 저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성모님의 신비 가운데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가 쓴 이 책은 화려한 문체의 복고풍이었기에 조금은 황당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기본 신학적 진실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뛰어난 신학자였습니다. 그분의 성모님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삼위일체의 신비와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어 오신 육화의 신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은총과 신비』, 심종혁 역(서울: 김영사, 1997), 41-43. -



첫 번째 질문

성모님께서 평생 동정이셨다는 점!


마리아께서 예수를 낳으시기까지 동정녀로 계셨다는 사실은 복음 성서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으며(마태 1, 25 참조) 그 후에도 계속하여 동정녀이시었음이 초대교회안에서 고백되었습니다. 사도 신경과 니체아신경에도 마리아를 ‘동정녀’라 불렀습니다.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 사도들에 의해 기초되어진 신앙고백문입니다.
사도들이 누구입니까? 성모님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19,26-27절을 보면 평생 함께 살았습니다. 특히 사도 요한이 성모님을 온전히 모셨습니다. 그 사도들에 의해 증언되었고 사도들은 신앙고백문에 이것을 집어넣었습니다. 성모님의 동정을 믿고 이해하기 위해 설마 의사의 진단서 같은 증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참으로 평생 동정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초세기의 이 두 신경은 성모 마리아께서 돌아가신 뒤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의 미사 경문은 사도 시대로부터 전래된 것인데, 거기에 성모 마리아를 ‘영광의 평생 동정녀’라 하였다. 이는 참으로 성모께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관념입니다.

“동정”이라는 용어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즉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펴보면, 동정이라는 말은 “어떠한 의혹도 섞이지 않는” 믿음의 표지이며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헌신의 표지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과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에 빠지면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온전히 바치고 싶어 합니다. 티 없는 상태로 봉헌하고픈 것입니다. 조선후기 때 유중철 베드로와 이순이 루갈다라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혼 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평생을 동정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유교문화였죠!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놀라운 결심을 합니다. 서로 혼인은 하지만 몸은 서로 지켜주기로 한 것입니다. 4년을 넘게 한 집안 한 방에서 살았지만 그들은 동정을 지켰습니다. 유혹이 없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 순수한 지향에 하느님의 은총이 개입한 것입니다.

성모님의 태는 하느님을 잉태한 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입니까?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이 낳으신 예수님은 인간 예수님만을 낳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때 성모님의 피를 당신의 피로, 성모님의 살을 당신의 살로 취하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동정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의 평생 동정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해 고백된 것입니다.

영국 감독 교회 불(Bull) 목사는 “하느님의 궁전이 되기 위하여 한번 성별되었던 그릇(성모의 육신)이, 후에 인간 사욕(邪慾)의 그릇으로 더렵혀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부당한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로티우스(Grotius) 칼빈(Calvin) 등 프로테스탄트 저자들조차 같은 의견을 발표하였습니다.

마리아 평생 동정 교리에 대하여 헬비디우스(Helvidius)와 요비니안(Jovinian)과 같이 오늘날에도 프로테스탄트 교인 중 이를 불신하는 이가 가끔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복음 성서에 기록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마태 1, 25)라는 말로, 그들은 예수 외에도 마리아에게서 다른 자녀들이 태어난 것으로 추측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까지’라는 한정사는 결코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과의 정결한 동거 상태가 예수 탄생까지만 계속되고 그 후에는 변경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이사야 예언자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이사 7, 14)라고 한 예언이 적중되었음을 명시하였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의 후커(Hooker)도, 마태오 복음의 이 ‘까지’를 곡해하는 자가 있어 성모 마리아의 존엄성을 욕되게 하려는 점에 통탄하여 “어떠한 일이 어떤 사건이 발생될 때까지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함은 결코 그 사건이 발생된 후에는 필연적으로 그 일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Book V., ch. XIV)라고 하였습니다.
성서에는 이러한 예가 많이 있는데, 노아 홍수 때에 “까마귀는 땅에서 물이 다 마를 때까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창세 8, 7)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그 까마귀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2사무 6, 23)라는 것은 미갈이 죽은 뒤에도 물론 자식을 두지 못한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시편 109‘ 마르 12, 36)라는 말씀은 주 예수께 대한 말씀인데, 이는 예수께서는 그 원수들을 정복하신 뒤에도 늘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마르 5, 13-14; 마태 28, 20; 1, 25 참조).

2) 또 예수를 마리아의 맏아들이라고 했으니, 마리아가 다른 자녀를 낳은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인이 ‘첫아기’를 낳고 죽었다든가, 과부가 되었다는 말을 우리는 가끔 듣는다. 그렇다고 반드시 과부 된 다음 다른 아이를 낳았다 할 수가 없고, 죽은 다음 둘째 셋째 아이를 낳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다 풍속에는 처음 태어난 아들은, 그 후 다른 자녀가 있든지 없든지 ‘맏아들’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맏아들에게는 특별한 권리가 있고 또 맏아들을 하느님게 봉헌하는 법이 있었으므로(출애 13, 2;34, 19 참조). 성모 마리아도 그 법을 따라 예수 아기를 주께 봉헌하셨다(루가 2, 21 참조). 외아들이라는 말보다 ‘맏아들’이란 말이 더 적당한 법률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므나쎄의 아들 마길도 독자였지만 마길은 “므나쎄의 맏아들이자…”(여호 17, 1)라고 하여 ‘맏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주 예수는 그 천주성으로 성부의 ‘독생 성자’, 즉 외아들이지만(요한 1, 14-18 참조) 역시 ‘맏아들’이라 불렀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히브 1, 6)라고 하였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이 택하신 백성은 이스라엘뿐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출애 4, 22)라고 하였다.

3) 성서에 ‘예수의 형제’라는 말이 있으므로(마태 12, 46;13, 55; 마르 6, 3; 요한 2, 12; 7, 3-5; 사도 1, 14; 갈라 1, 19; 1고린 9, 5 참조) 예수 외에 마리아의 다른 자녀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성서에는 이 ‘형제’가 넓은 의미의 호칭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친척을 형제라 부르기도 하고(욥기 19, 13 참조) 숙질간, 당숙?당질간, 외숙?생질간에도 ‘형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즉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저마다 들고 있는 향로에 불을 담고… 불이 나와 그들을 삼키자… 죽었다. 이것을 보고 모세는 아론의 삼촌 우찌엘의 두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놓고 ‘어서 가서 너의 형제들을 성소에서 진지 밖으로 끌어 내어라’하고 일렀다”(레위 10, 4)라고 하였다. 이는 ‘조카’를 ‘형제’라고 부른 예입니다.

아브람의 조카가 롯임은 분명한데(창세 11, 27-31 참조) 아브람은 롯에게 “너와 나는 한 형제가 아니냐? 네 목자들과 내 목자들이 서로 다투어서야 되겠느냐”(창세 13, 8)라고 하였다. “아브람이 적군을 무찌른 뒤 형제(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부녀자들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되찾아 냈다”(창세 14, 16)라고 한 것은 삼촌과 조카를 ‘형제’라 부른 예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라헬의 아버지가 자기 외삼촌이며 자기 어머니가 리브가라고 말하자…”(창세 29, 12)라고 한 것은 외삼촌과 조카를 ‘형제’라고 부른 예입니다.
(한국어판 프로테스탄트 성서에는 이를 모두 ‘골육’ ‘친족’ ‘조카’ ‘생질’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원전에는 다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

성 마리아는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하느님께 이미 맹세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 그레고리오 니싸, 성 베다, 성 베르나르도, 성 안셀모 등의 학자들이 제시하는 성서적 근거는 가브리엘 천사가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할 때, 이미 성 요셉과 약혼한 성 마리아는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 34)라고 고백한 구절입니다. 만일 자식 낳을 목적으로 하는 평범한 혼인이라면, 더구나 이미 약혼까지 한 여자로서 어떻게 “이 몸은 처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아들을 낳는다는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놀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그 상황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약혼자였다는 것에 주목하시면 될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초대 교회로부터 일치하여 인정되어 오는 바입니다. 이미 4세기에 성 에피파니오는 말하기를 “어느 시대든지 누가 자원하여 마리아라는 이름에 ‘동정’이란 말을 함께 부르지 않는 자가 있었느냐…. ‘동정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다. 성모는 영원히 동정으로 계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로부터 전하여 오는 기도문에는 “우리 지극히 영화로우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고 쓰여있습니다(Bibilitheca Max. Patrum, t. 2. p. 3).




성모님 승천은 우리에게 당혹스런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당연한 사건입니다.

열왕기 하권 2,11절을 보면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길을 가는데, 난데 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예언자가 하늘로 승천했다면 예언자들의 모후 주님의 어머니께서 승천하신 것은 더욱 쉬운 것입니다. 성모님 승천 교리는 교황님이 믿으라고 해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초세기부터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것을 하도 딴지를 걸어서(실증주의 자들 -증거를 보아야만 믿는 이들)교회가 선언한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예술가들은 이에 대하여 시와 문장 그림 조각 등의 많은 작품은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은 교황님이 성모승천 선언하기 전에 아주 오래전에부터 표현되고 고백되어진 것들입니다.

성모승천에 대한이야기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니체포로 카리스티에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동로마 황제 마르시아노의 황후 프루케리아는 전부터 성모님을 위한 성당을 건축하고 그 성당에다 성모님의 유해를 안치할 생각으로 칼케돈 공의회(451년에 열림) 에 온 예루살렘의 주교 유베날리스를 만났습니다. 그 주교에게 성모님의 유해의 소재지를 탐문하자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모님의 서거하심에 대해서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부터 내려오는 믿을만한 전설에 의하면 성모님이 임종하시자 사도들은 그들의 포교지인 사방에서 모이게 되어 성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임종하시자 사도들은 기도와 성가로서 성모님의 덕을 찬양하며 성모님의 육신을 동굴에 정성스럽게 매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토마가 제일 나중에 도착 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지 3일인데 토마스 사도는 돌아가신 성모님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뵙고 싶어서 그 무덤을 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모님의 몸을 사라지고 그 염포는 한 쪽에 잘 개어져 있고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사방에 풍겼던 것입니다. 이현상을 목격한 사도들은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 어머니를 부활시켜 그 정결한 육신을 데리고 가셨다’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유해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증언이 없다 하더라도 성모님의 승천은 지극히 당연한 법칙으로 다가옵니다.
하늘로의 복귀(하늘나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가톨릭 교회교리 27항 참조 하세요) 이것을 예언자 엘리야는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시지만 또한 온전히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교부 성 이레네오는 성모님을 제2의 하와라고 주장했습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성인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합니다.

즉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류의 죄가 들어왔듯이 이것의 회복도 역시 새로운 아담(예수님)과 하와에 의해 극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 법칙에 부합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2차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교회헌장” 56항은 이레네요 교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묶어놓은 것을 동정녀 마리아께서 믿음을 통하여 풀어주셨다.”


공의회문헌 “교회헌장” 59항에서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께서도 주님의 탄생 예고 때에 이미 당신을 덮어 그느르셨던 성령의 은혜를 당신의 기도로 간청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묵시 19,16)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죽음은 죄의 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선 원죄와 본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만약 원죄와 본죄가 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원죄에 물든 여인의 젖을 당신의 살로 취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빛과 어둠은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결코 보통 사람들처럼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모의 죽음은 천국에 대한 갈망이 치열함으로 인하여 그 거룩한 영혼이 정결한 육신을 떠난 것 뿐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셨음같이 성모 마리아도 죽으신 후 곧 부활하여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국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초대로부터 지금까지 믿어 내려온 것이다.”

결정적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운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과 육의 온전한 구원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성좌의 고유한 권위에 따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모친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으셨다는 교의를 하느님이 계시하신 대로 공언하고 선언하며 분명히 정의하는 바이다." 이 말씀으로써, 교황의 무류권을 행사하신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성모 몽소승천이 믿을 교리임을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교황의 선언대로 승천 교리를 게시 진리로 믿게 되었다(참조. 사도적 헌장, 무니피첸띠시무스 데우스).

1. 교의(Dogma)의 내용
ㄱ) 정의는 그 대상의 내용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마리아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영광을 받으셨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장차 얻게 될 신분을 이미 받았다는 뜻이다. 또한 지상적인 삶의 고유한 형태인 육체적 조건이 영생이 고유한 형태인 신비스럽고도 실제적인 신분으로 변화되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마리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승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고 표현된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는 "하늘로 올라가셨다"(승천)고 표현되는 것과 비교가 될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을 받으셨다. 따라서 마리아의 승천은 몽소승천(蒙召昇天)이다.

ㄴ) 비오 12세는 교회의 통상적인 교도권의 확고한 동의를 얻은 뒤에, 그리고 필수적인 조처를 취한 후에 마리아의 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신조는 교도권의 가르침에 대한 신자들의 동의로 보편화되지만, 역사를 보면, 신자들이 교도권에 영향을 끼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의 의식"도 "신학적 원천" 이 되는 것이다.

ㄷ) 성모 몽소승천은 새로운 계시인가? 비오 12세의 선언대로, "하느님이 계시하신 교의"라고 하면, 계시의 원천을 밝혀야 한다. 사도적 헌장 "무니피첸띠시무스 데우스"는 이 점을 인식하고, "확정된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는 성서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서 안에 있다고 해서 승천 교리가 성서 속에 직접 그리고 명시적인 형태로 기술되어 있어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의 현재 입장은 "하느님이 계시하셨다"는 표현은 실제로 또 명시적으로 계시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과 다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승천 교리의 내적 논리에서 보면, 승천 교의는 신약 성서의 증언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으로 학자들이 인정한다.

2. 마리아의 몽소승천의 의미
ㄱ) 마리아는 그의 구세사적 목표에 이르렀다. 마리아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다" 그래서 "정녕 복되시다"(루가1,45). 이 주님의 약속이 마리아께 성취된 것이다.

영혼과 육신이 영광받으시고 현양받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의 결과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상에서 불리신 소명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은혜를 입으셨다. 그래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평생 동정은 초자연적 모성이라 부르는 것처럼,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당신의 승천과도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당신 태중에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데, 그 낳으신 육신이 어떻게 무덤 속에서 부패되어야 하는가? 원죄에 물듦이 없는 티없이 깨끗한 육신이 아닌가? 그리고 평생 동정이신 당신의 육신은 성자와 성자의 구세사적 목표에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하느님의 구세 목표는 곧 인간 구원, 즉 우리와 하느님과의 일치가 아닌가? 따라서 마리아가 천주의 모친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천상 영광을 미리 입은 것은 종말론적 충만 곧 구세사적 목표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세상 종말에서의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교회 헌장 8장(61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의 화신(化身)과 함께 하느님의 모친으로 예정된 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 섭리의 계획을 따라 세상에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좋은 어머니로서 남보다 각별히 친절한 주님의 동반자요 겸손한 종이시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우리에게 계시던 그대로-마리아는 당신 태중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마리아는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위한 것 외의 다른 목적은 전혀 없었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 위에 확립된 이 일치는 구세 사업에서 "독특한" 협력으로 발전되었다. 영보 때의 "예"로부터 갈바리아의 괴로운 승낙까지,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당신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 신비에 봉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교회. 56). 만일 끝까지 하나도 잘못 없이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마리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드님은 당신 모친을-영혼과 육신과 함께-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마리아께 주어진 보상이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에 직접 그리고 완전한 참여 이상으로 마리아께 알맞는 것은 없을 것이다.

ㄴ)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마리아는 지금 영생 가운데 계신다. 마리아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빛이요 생명이며 사랑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기쁨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완전한 일치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해 주시는 모든 이들과의 충만한 일치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봉사"가 끝났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마리아의 봉사는 오히려 보편적 차원으로 더더욱 확대되었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언급한다: "마리아의 모성은...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 주신다"(교회 62). 그렇다. 마리아는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행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교회. 62). 그러므로 마리아의 현양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라 부르는 것이다.

3. 몽소승천과 우리

ㄱ) 마리아께 "일어난" 모든 일들은 당신이 지체이시고 전형이시며 어머니이신 교회와 직접 관련된다. 주님이 마리아의 승천에서 행하신 일은 곧 교회에 대한 완전한 영광의 표시이자 약속이다.

ㄴ) 마리아의 태중에서 당신이 강생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당신 자신과 합일시킴으로써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다시 봉헌코자 원하신다. 따라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가 없다. 주님은 당신 어머니께 특별한 소명에 따라 승천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 그 여행길을 걷게 하셨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승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더욱 능동적인 봉사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ㄷ) 마리아에게 있어서 당신의 승천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우리와 상관없는 특권이 아니라 우리와 더욱 가깝게 해주는 특권이다. 당신 아들을 믿은 충실한 제자이신 마리아와 일치하면 할수록, 그분과의 일치는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확인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사제 직무의 수행이며 공적 예배 행위인 거룩한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라는것을 거듭 확인하는 한편, 영성 생활은"! 오로지 거룩한 전례의 참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공동으로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또한 자기 골방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여야 하며, 더욱이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한다. " 는 것 또한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 고유한 특성으로 묵주기도는 "끊임없이" 바치는 수많은 기도의 정점에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묵주기도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관상입니다. 묵주기도는 구세주의 삶의 신비들에 잠겨, 그분께서 하신 일과 전례가 재현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우리 삶에 동화시켜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뛰어난 스승이시며, 계시하시는 분이시자 계시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가르치신 것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을 배우는 것' 이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 편에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진리로 이끄시는 내적 스승이십니다. 그러나 피조물가운데에서 성모님보다 그리스도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깨닫도록 우리를 더 잘 이끌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기적을 이루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이르실 때에 분명히 스승의 모습으로 드러나십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기다리시며 최초의 사도 파견에서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셨을 때에도 스승의 역할을 하셨다고 마음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 한단 한단을 성모님과 함께 건너가는 것은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읽고 그분의 신비를 깨닫고 그분의 복음을 배우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친히 학교를 여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풍부히 얻어 주시며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스승으로서 "신앙의 나그네 길"에서 모범으로 가르치신다고 여길 때에, 이 성모님의 학교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자의 신비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당신께서 주님 탄생 예고 때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는 질문을 하고 언제나 신앙의 순종으로 대답을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송 해설

천사의 방문인사(성모송)는 매우 천상적이며, 복자 알리노께서 “그것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조물은 없다”고 표현하신 것처럼 성모송은 그 의미에서, 우리의 이해를 능가하는 것이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루도비꼬 성인은 말합니다.

성모송의 탁월한 가치는, 무엇보다도 이 기도문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천상으로부터 나오게 된, 말씀의 강생에 대한 취지와 목적을 이야기한 가브리엘 대천사에 의해 고백되어진 것이고 엘리사벳의 찬양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근거한 중재로 만들어진 기도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인사”는 가톨릭 신학이 복되신 동정녀에 관해 가르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간결한 요약입니다.

성모송은 크게 찬미와 청원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마리아의 위대하심을 이루게 한 모든 것을 보여주며(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 루가 1,28과 엘리사벳의 찬양,루가 1,42)

두 번째 부분은 성모님의 착하심을 통해 받으려고 기대해도 좋을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이 부분은 1440년에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에 의해 처음으로 덧붙여 졌습니다)

지극히 복되신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그 첫 부분을 우리에게 계시하여주셨으며 다음 부분은 성령의 감도를 받으신 성녀 엘리사벳의 찬양을 첨가한 것입니다. 자모이신 성교회는 네스토리오 이단을 단죄하였던 430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그 결론을 내렸는데 복되신 동정녀는 진실로 하느님의 모친이시라고 결정 하였습니다. 이 때에 공의회는 성모에게 이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기도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빌으소서“
이 세상의 온 역사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사건은 이 세상이 구원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다시 놓여지게 된 영원한 말씀의 강생입니다.

성모님은 이 놀라운 사건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서 선택되시었고 그 사건은 천사의 방문인사로 축하를 받으셨던 그 결과로서 성모송은 이루워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의 방문 인사(성모송)”로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으며 동정녀는 하느님의 모친이 되셨으며 의인들의 영혼들은 임보(Limbo)에서 구원함을 받았고 천상의 빈 좌석은 채워졌습니다. 더 나아가 죄는 용서를 받았고 은총은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병든 사람은 건강해졌고 죽은자들은 생명에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의노는 진정되고 인류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결국 천사의 방문인사는 하늘의 무지개이며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주신 은총과 자비의 표시입니다.(복자 알라노)



우리가 이 성모송을 기도함으로써 성모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것이며 성모님은 성 엘리사벳에게서 찬양받으셨을 때 응답 하셨던 똑같은 방법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께 이 찬미를
돌려 드립니다.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지극히 높으신 지위로 성모님을 더없이 찬미한다면 성모님은 즉시 이 찬미를 당신 이 아름다운 마니피캇(찬송)으로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마치 천사의 방문인사가 지극히 복되신 성삼위에게 영광을 드렸음같이 또한 성모송은 성모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찬미가입니다.

다음은 성모송에 대한 몽포르의 루도비꼬 성인의 가르침중 열 일곱 번째입니다.

열 일곱 번째 장미
<성모송-열매>

복되신 동정녀께 매우 깊은 신심을 드렸던 복자 알라노께서는 성모님에게서 매우 많은 계시를 받았으며 우리는 그분이 장엄한 맹세로서 이들 계시의 진리를 확고하게 해주셨다
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 중 3가지는 특별한 동감을 불러일으키며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첫째는 사람이 만일 성모송(이 세상을 구원하게된, 천사의 인사)을 주의를 기울이
지 않고 바친다면 그들이 미적미적하거나 아니면 그걸 미워하기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진실로 영원한 징벌로 얼마 안가서 단죄 받는다는 표시가 됩니다.

둘째 진리는 이 하느님의 인사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영원한 구원에 예정되는 특별한 특징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다해 섬기는 각별한 은총을 주신 사람들은, 성모님께서 그들이 획득한 영광의 지위로 그들을 당신 성자에 의해 천상에 올려놓으실 때
까지, 계속 성모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복자 알라노 9장 2절)
악마의 자식들이며 하느님의 배격의 표시를 명백히 갖고 있는 이단자들 모두는 성모송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주의 기도를 말하지만 결코 성모송은 바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카폴라를 착용하거나 묵주를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목에 독기를 품은 뱀을 두르고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 중에도 하느님이 책망하시는 표시를 지니고 있는 자들은 묵주에 대해(5단이든 15단이든 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묵주 기도를 아예 하지않거나 빨리 해치우거나 미적미적한 태도로 하고 맙니다.

만일 내가 복자 알라노에게 계시하신 바를 믿지 않는다 해도 내 자신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이런 무서운 사실을 어쩔수 없이 느끼게 해주지만 한편 위안되는 진리를 확신케 해주
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것같이 보이는 신심이 영원한 구원의 그르칠 수 없는 표시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신심의 결여가 하느님의 영원한 불만의 표시가 되는지 나는 모르
며 또한 명백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것도 그보다 더한 사실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시대에 와서는 사람들이 자모이신 성교회가 과거 비난했던 새로운 교리들을 설명하는, 아주 조그마한 표면의 신심이라도 갖도록 설명한다는 것을 봅니다만 그들은 로사리오를 멸시하며 자주 친숙한 로사리오 기도를 단념시키고 로사리오에 대한 애착과 신심을 파괴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세속의 눈에 좋게 보인다는 변명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사리오와 스카폴라를 칼빈주의자처럼 비난하는데 매우 주의 깊지는 않지만, 그런 신심을 공박하려고 작정했던 방법은 원래가 그것이 교활한 것이
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것은 더욱 무서운 짓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의 성모송, 나의 15단이나 5단의 로사리오 기도는 악마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로부터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인도된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수 있는 기도문이며 속일 수 없는 시금석입니다. 나는 높은 명성으로 독수리같이 아주 높은 데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영혼들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아직도 악마에 의해 가련하게도 샛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성모송과 로사리오를 자기들보다 훨씬 밑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멸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나만은 깨닫게 외었습니다.

성모송은 천상에서 선택된 영혼들에게 떨어진 축복받은 이슬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덕행에서 더욱 자랄 수 있도록 경이적인 영신의 풍요함을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영신의 정원은 이 기도에 의해 물이 주어지며 사람들의 지능도 훨씬 이 기도에 의해 밝아지게 되며 그들의 마음은 더욱 열절해지고 그들의 영신적 적들을 대항하는 무기는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성모송은 날카롭고 불타는 창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결합되어 꿰뚫어 버릴 수 있는 강한 힘을 전교자들에게 주어 그가 조금만 가졌다 해도 아주 굳어버린 마음을 움직이고 회개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결코 전교자들에게 자연적 선물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벌써 말하였듯이 이것은 성도미니꼬와 복자알라노에게 가르쳐 주시어 이단들과 죄인들을 회기시키게 한 위대한 비밀입니다.
안또니오 성인은 우리에게 많은 사제들이 강론을 시작하기 전에 성모송을 바치는 습관을 갖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내용출처 : 기타인터넷, 가톨릭신문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
 

+ 사랑의 메아리 +

사랑하는 성령가족 여러분 두루 두루 익혀 두셨다가 신앙에 도움이 되시어 성령 충만 하시기 바랍니다.

■ 천주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 특히 개신교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먼저 천주교나 개신교나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는 교회입니다. 일부 잘못 알고 있는 개신교신자분들이 천주교는 마리아믿는 교회라고 선전하고 다니는데 그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사를 한 번 참례해 보시면 알겠지만, 미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에 관한 전례로 구성되어있지 성모님에 관한 전례는 전혀 없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은 천주교는 성모님(마리아)를 공경하지만 개신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님을 신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잉태하신 "거룩한 몸"으로서,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공경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에게 기도할 때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혹은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성모님께 기도할 때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즉, 성모님이 하느님께 우리의 기도를 함께 빌어달라는 뜻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성모동상을 세우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얘기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성상과 성화"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1. 성모님을 공경하는 신학적 근거.

천주교에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는 근거는 신약성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나안에서 첫 기적을 행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술독에 술이 다 떨어진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 일을 기적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분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거절을 하셨지만, 끝내 어머니의 간청을 받아들여 영광스런 첫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요한 2,1-12). 즉 우리 혼자서 기도하는 것보다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더 효력(?)이 크기 때문에성모님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도 좀 어렵고 큰 기도는 목사님에게 부탁하곤 하지 않습니까? 그것또한 본인이 기도하는 것보다 목사님이 기도하는 것이 더 효력이 클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의 기도가 더 효력이 있다면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기도는 더할 나위 없겠지요. 마찬가지 입니다. 이를 근거로 천주교에서는 성모님께 저와 함께 "빌어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십자가 위에서 성모님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전 인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 그리하여 사도들도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셔 어머니로서 공경하였습니다(요한 19,25-27).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개신교에서 성모님을 중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을 어느 제자로부터 전해들었을때,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며, 내 누이이냐?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며, 내 누이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지 마리아를 당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근거는 위에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마리아가 당신의 어머니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어머니로서 공경하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인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무렵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은총을 가득히 입은 마리아님, 기뻐하세요.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십니다."라고 말하며, 그에 대해 마리아께서는 "이제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신 덕분입니다."(루가 1.48-49)라고 하는 마니피깟을 읊어 답례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미 구약의 사무엘서에 예언되어있는 구절로서 온 백성에게 공경받는 마리아님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시므온은 마리아께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 2.35)라고 예언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함께 겪는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구약성서에서도 성모님의 출현을 여러군데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성모님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복음서중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부분 성모님의 증언을 통해 취해졌음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모든 성서적 근거와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의 협조자이며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마땅히 인류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어머니로서 공경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여인을 성스럽지 않다고 말한다면, 하느님이 하신 일을 무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성모님을 "원죄없으신 분"이라 가르칩니다. 성모님이 원죄없으신 분이란 근거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잉태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시자 같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죄가 있는 더렵혀진 인간의 몸에 잉태하게 하실리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예수님이 잉태되기 전에 성모님으로 하여금 원죄가 씻어지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모 마리아가 원죄와 무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님도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특은으로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구원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뱃속에 잉태되시는 순간부터 예수님이 태어나는 순간까지 약 10달 동안 예수님께 살과 피를 제공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성모님이 원죄에 물들었다면, 죄인의 살과 피를 예수님께서 물려받으신 결과가 되는 데, 그럴리는 없겠죠? 이 말에 개신교분들은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10달동안 예수님께 살과 피를 제공하신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성령이다."라고. 하지만 그것 또한 옳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잉태의 신비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 이전에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셨으며 예수님이 잉태된 순간부터 성령님은 마리아를 감싸주셔서 마리아로 하여금 더이상 죄에 물듦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살과 피를 10달 동안 예수님께 제공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릴 때 "은총을 가득히 입은 마리아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가 1.28)라고 하였는데 "은총을 가득히 입은 "이란 말은 구체적으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은 단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뱃속에 있다는 장소적인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과 마리아가 모자(母子)로서 '하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천주교에서는 사실적인 교리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루르드(Lourdes)의 성모발현(1858)을 통해 확증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 중에 가장 깨끗하신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모 승천]

천주교의 성모님의 승천 교리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올바른 마리아의 위치와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는 마리아의 성덕과 품위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과 인간의 목적, 죄, 죽음, 육신의 부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성령님의 감쌈을 받아 원죄에 물들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루가 1. 35). 이 말씀은 마리아께서 예수님이 잉태되고 태어날 당시에만 성령님의 감쌈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리아를 일생동안 감싸 보호해 주시어 평생 죄에 더럽혀지지 않으신 분으로 남게 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이 창세기때부터 준비된 여인으로서("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여자의 후손의 발목을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위치와 품위에 걸맞는 해석일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부터 얻어진 것입니다. 그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구약을 잘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보호아래 원죄와 본죄에 전혀 물들지 않은 마리아는 다른 인간들처럼 죽음을 맞이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 올리셨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늘로 올림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의 능력으로 승천하셨지만, 죄에 물들지 않아 죽음을 맞이할 이유가 없으셨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불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에 단 3일 동안 머무셨던 무덤도 수백만이 찾아오는 순례지로서 추앙받습니다. 그런데 10달 동안이나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과 피를 주님께 제공해주신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모순이며, 심지어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참고]

◑ 루르드의 성모발현 : 1858년 베르나데트라는 14세 소녀가 이곳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에서 18회에 걸쳐 성모마리아를 보고, 기도와 보속행위, 생활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들었다고 전해졌고, 그 이후 이곳은 해마다 300만이 넘는 순례자가 찾아오는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성모님께서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라~"고 하시어 천주교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교의가 진리임이 확증되었습니다.)


2. 성상과 성화



천주교에서는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교회에 장식을 하거나 세워 놓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 성상과 성화 자체를 놓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의미, 즉 그리스도를 섬기고 믿는 것입니다. 성모상 또한 성모상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의미 즉,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순명"을 본받기 위한 것이며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을 공경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 개신교에서 내세우는 성서구절을 봅시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출애 20, 3-5) 이 성서 내용은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물건을 또는 잡신을 하느님처럼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예수님 상)이나 성화와 성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를 한번 봅시다.

"속죄판은 마치로 두드려 늘여서 거룹(천사의 이름 저자 주)둘이 양쪽에 자리 잡게 만드는데 거룹 하나는 이쪽에 또 한 거룹은 맞은쪽에 자리 잡게 만들어라."(출애 25, 18-19)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민수 21, 6) 개신교 신자분들 보십시오. 천사 거룹도 만들라고 하셨고 구리뱀도 만들라는 성서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구약 시대 솔로몬도"한 거룹의 한쪽 날개가 한 벽에 닿았고 다른 거룹의 한쪽 날개가 다른 벽에 닿아 있었으며 각각 나머지 날개는 전의 중앙에서 서로 잇대어 있었다. 솔로몬은 거룹에 금을 입혔다. 그는 전의 온 벽을 돌아가며 거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 모양의 돌을 새김으로 새겨 놓았다. 또 성전 안팎의 바닥을 금으로 입혔다."(1열왕 6, 27-29).구약의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 이렇게 정성을 기울였다면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신약의 성전(교회)을 예수님의 상이나 성화 기타 사도들의 성상이나 성화로 장식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또한 성상과 성화는 신앙 교육에 있어서 시청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상 고통을 말로써 여러 번 되풀이하는 것보다 실상 그 고통의 십자가상을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개신교의 카브코(KAVCO-한국 기독교 시청각 )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성서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서 선교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충) 제사 인정의 여부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위패나 신주나 신방(방)을 놓고 지내는 제사는 천주교에서도 금하고 있습니다 . 그건 미신에 대한 우상숭배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패나 신주나 신방을 놓지 않은 제사는 어디까지나 우리 조상들에 대한 효행을 나타내는 우리 나라의 미풍양속으로서 인정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출애굽 20장 3-5절의 말씀만을 근거로 무조건 제사를 거부합니다

3. 연옥의 존재와 4. 성인의 통공(=개신교;성도들이 서로 교통)

천주교에서는 연옥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 성서적 근거는 먼저 구약의 여러군데에서 죽은 영혼을 위하여 기도했다는 구절이 있고 신약성서 베드로전서에 또한 명백한 연옥의 존재에 대한 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보면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영혼들의 감옥에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들의 감옥"이 바로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기약할 수 없는 영원한 불속인 지옥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실 리가 없으며 그렇다고 천국을 "영혼들의 감옥"이라 표현할 리는 없으므로 "영혼들의 감옥"은 구원을 기약할 수 있는, 남은 죄에 대한 잠벌을 씻는 연옥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또한 천주교는 성인들의 통공교리(사도신경에 포함되어있음)를 믿기에 지상의 인간이 연옥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므로서 죽은 영혼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연옥영혼들이 하루라도 빨리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교리를 믿으며, 천상에서 성인들(성모님 포함)도 지상의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를 함으로서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성인들의 기도에 대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신자들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지상의 인간의 교회와 천상의 성인들의 교회(건물의 의미가 아님)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일치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연옥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무조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2분법적 교리로서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가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간다고 가르칩니다.

<사도신경에 포함된 "성인의 통공"(천주교), "성도들의 교통"(개신교)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성도들의 교통에 대한 해석(살아있는 신자들끼리의 교통)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신도들끼리 함께 모여 하느님께 기도하거나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굳이 사도신경에 포함시켜 믿도록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살아있는 신자를 "성인"이나 "성도" 즉 "Saints"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하늘의 성인들(성모님포함)과 지상의 인간이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기도로서 돕고 일치될 수 있다는 천주교의 "성인의 통공"교리가 맞습니다. 그러면 왜 개신교에서 사도신경의 "성도들의 교통"을 잘못해석하는가! 그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근본적으로 연옥의 존재를 부인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개신교에서 어느 하나를 부인함으로서 그것과 연관된 많은 부분에 수정을 가해야 했고 그것은 비단 "성도들의 교통"해석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된다는 교리 하나로 인해 "고해성사"의 부인, "성체성사"의 부인, 심지어 "세례성사"의 부정까지도, 그리스도교에서 실로 중요시 여겨할 수많은 교리들이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구원되고 심지어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이미 용서받았다는 교리 하나로 나머지는 모두 필요없다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되므로 나머진 중요하지 않다는 주먹구구식 교리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되지 않은 개신교 입장에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할 권리가 없으므로 그것들을 일소에 모두 부정할 수 있는 파워풀한(?) 교리가 필요했고 그 때문에 그런 주먹구구식 교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주먹구구식 교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마련해 주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세례성사 등의 성사적 행위를 모두 필요없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 이는 개신교를 비방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최후의 만찬"을 보는 견해에서의 차이

천주교에서는 미사(missa)시간에 성체성사를 집전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의 길로 가시기 전날 저녁 2층 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린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하셨다(루가 22,19-21). 분명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계약 을 맺기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를 사도들에게 행하라고 하셨으므로 11사도는 제사를 집전하는 사제로서의 권리를 예수님으로 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때문에 천주교에서 사도들의 권한을 이어받은 주교와 신부를 이 새로운 계약을 맺는 '제사'를 집전하는 사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신품성사). 천주교에서는 2000여년 동안 이 예식을 행해 오고 있습니다.

(많은 개신교분들이 천주교의 신부를 '사제'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구약시대의 사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 제정하신 이 새롭고 거룩한 제사(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로서의 의미인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월절제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과월절제사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백성이 하느님의 지시대로 문설주에 어린 양 의 피를 발라 놓음으로서 재앙을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그런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며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제사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교하여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제가 되시고 동시에 어린 양이 되시어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께 제물로서 봉헌하시고 새로운 계약 을 맺으심으로써 우리 인간을 아담이 만든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심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제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최후의 만찬"은 구약의 과월절제사를 예수님께서 새로이 제정하시는 것("새로운 계약의 잔")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과월절에, 과월절 음식으로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사제가 되시고 동시에 어린 양이 되시어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거룩한 제사'가 되게 하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였으므로 천주교에서는 "최후의 만찬"을 사제(신부)의 손으로 바치는 거룩한 제사(미사)로서 거행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하느님께 제헌되는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밀떡과 포도주가 아닌 성령의 힘으로 성체와 성혈로 성화(거룩한 변화)되어야 하며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 56 designtimesp=10682>). 이를 성체성사 라 합니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 이 말씀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밀떡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성화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일치를 위해서는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고린토 11,27) 라는 성서말씀을 따름으로서 가능해 집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성체를 영함에 있어 깨끗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해야 하며,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세례(성세)성사를 받고 고해성사를 받은 신자들에 한하여 영성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지켜주고 깨끗하게 해 주는 "생명의 양식(요한 6. 48)"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최후의 만찬"을 단지 기념하는 차원 이지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사의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밀떡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에서는 요한 복음 6장의 "생명의 양식"에 대한 많은 양의 말씀을 다 어떻게 해석하는 지 궁금합니다.

[참고: 세례(성세)성사]

세례(성세)성사: 이 또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일곱 가지 은사(7성사) 중의 하나이며 이는"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요한 3,5) 의 성서구절로서 이해되며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서 원죄와 본죄가 사해지고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 합니다.

6. 고해성사

천주교에서는 죄의 경중(대죄 혹은 소죄)에 따라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아야하는 죄와 그냥 기도로서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죄로 구분됩니다. 대죄냐 소죄냐 하는 것에 대해선 법조항과 같이 뚜렷한 기준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작은 죄라 하더라도 "죄인지 알고서도 짓는 죄"는 대죄에 속하고 또 인륜적으로 큰 죄 또한 대죄로 받아드려집니다. 소죄는 사람이 살면서 흔히 지을 수 있는 죄 또는 다소 큰 죄라 하더라도 죄인지 모르고 짓는 죄는 소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일년에 두 번(성탄절, 부활절)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이를 판공성사라고도 합니다.

신부가 고해소에서 신자들의 죄를 사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죄권(죄를 사해주는 권한)을 받은 사도직인 신부로서 죄를 사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12사도(지금의 신부님)에게 사죄권을 주었고 그 사죄권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교회가 갖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며,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 사도들은 교회를 세울 분들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도들에게 사죄권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죄권은 인간구원을 위하여 세상끝날 때까지 교회에 주신 것이며, 교회의 사죄권은 예수님으로 부터 받은 사도들의 권한을 ?!--"<-->

 

형제여, 너무 페쇄적으로  신앙을 합리화 시키지 마세요'  개신교 신자들의 틀에 박힌 질문이고 생트집을 부려 가톨릭을 공격하기 위한 허구성 질문이죠"

 

하느님은 전지 전능 전선하신 분이시며 만선만덕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러한분이 교회를 하나 세우시지 여럿을 세웁니까? 

왜 고기를 먹습니까? 목숨이 있는 동물을 죽이면서까지 당신의 입맛과 뱃속을 채웁니까?

성 관계는 왜 합니까?  자동차나 비행기는 왜 만들었읍니까? 사고나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과학문명은 인류문명을 가져 왔지만 인류를 순식간에 망칠수 있는 핵 무기도 있읍니다.

술, 담배를 왜 먹느냐고요?  질문같은 질문을 하세요" 그리고 주님한테 여쭤 보세요

성경에 술을 마시라는 말은 있어도 먹지말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잔치에서 물을 술로 변케 하시는 기적까지 베프셨읍니다. 아브라함 이하 성조들은 술을 즐기신것 같은데요 또한 예수님도 세리들과 먹고 마시고 즐기셨다고 셩경은 증언 합니다  

 

그분은 목숨바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 하시는 분이십니다. 공염불 하지 마시고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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