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년 색슨(Saxon)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적인 가정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성 에드문두스(Edmundus, 또는 에드문도)는 865년 젊은 나이에 이스트 앵글리아(East Anglia)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869년에 덴마크의 바이킹족이 노퍽(Norfolk)의 테트포드를 공격하자, 에드문두스는 자기의 군대를 데리고 용감하게 맞섰다. 잉글랜드(England)는 패하고 에드문두스 역시 살해되었는데, 아마도 포로생활 중에 죽은 듯하다.
그는 서퍽(Suffolk)의 혹슨(Hoxne)에서 체포되었는데, 그리스도교 왕국을 분할하라는 요구에 대하여 완강히 부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다가 나무에 묶인 채 화살을 맞고 운명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으며, 중세 시대에는 그를 공경하는 지역이 전 유럽으로까지 퍼졌다. 성인의 유해는 헬레스돈(Hellesdon)의 작은 목조 경당 옆에 묻혔다. 915년경 부패되지 않은 채 발견된 에드문두스의 유해는 베드릭스워스(Bedricsworth)로 옮겨졌다. 그 후 이곳은 ‘에드먼드 베리(Edmund Bury)라고 불렀다.
1020년 덴마크의 크누트 2세(Knut II)가 에드먼드 베리에 석조 성당을 건축하고 자기 동족들이 저지른 일을 보상함으로써 덴마크인과 앵글로 색슨인들 간의 화해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 일환으로 왕은 베네딕토회에게 그 인근 지방에 대한 관할권을 위임하고 상당한 토지를 하사하여 베네딕토회는 영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에드문두스의 문장을 화살이다.
영국 잉글랜드(England) 버크셔(Berkshire)의 애빙던(Abingdon)에서 출생한 성 에드문두스 리치(Edmundus Rich, 또는 에드문도)는 옥스퍼드와 파리(Paris)에서 수학한 뒤에 옥스퍼드에서 예술과 수학을 강의하였다. 또 그는 옥스퍼드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8년 동안 신학을 가르치다가 1222년경에 솔즈베리(Salisbury) 대성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그는 화술이 좋은 대중적인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1227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의 요청에 따라 사라센을 대항하는 십자군을 상대로 설교하러 다녔고, 1234년에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캔터베리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왕 헨리 3세의 자문관으로 활약하던 중에, 1237년의 대헌장 인준 시에 헨리 왕을 보좌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헨리가 자신의 주교권을 침해하여 오토 추기경을 영국의 교황 대사로 임명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극렬히 반대하였다. 헨리의 지지를 받고 있던 캔터베리의 그리스도 교회 수도자들 역시 그의 권리를 밝히도록 요구하자 그는 1237년에 로마(Rome)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헨리 왕과의 격렬한 논쟁에 빠져들게 되었고, 1240년에 잉글랜드를 떠나 폰티니의 시토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그는 그해 11월 16일에 프랑스의 수아송(Soissons)에서 운명하였고, 1247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옥스퍼드에서 중세기의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그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무덤 위에 세운 것이라는 전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유식하고 또 거룩한 사람이었으나 주교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그는 “저는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찾지 않았습니다.” 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저서 “성교회의 거울”은 중세의 영국 신비주의를 밝히는데 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