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람의 아들의 의미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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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정식 | 작성일2006-08-21 | 조회수817 | 추천수0 | 신고 |
질문하신 ‘사람의 아들’은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될 개념입니다. 본 사이트에 올려져있는 글들 중에서 다음의 내용이 질문에 대하여 참고가 될 것입니다.
....... 작성자 이인옥(smalllark) 번호 7494 작성일 2004-07-16 독서: 이사 38,1-6.21-22.7-8 복음: 마태 12,1-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 로 지칭하신다. 이 대목 외에도 복음서에 '사람의 아들'이란 단어가 무려 70번이나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호칭은 꽤나 중요한 의미로 쓰여졌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종종 '사람의 아들'이 어떤 뜻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 기회에 성서에서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해보며 그 뜻을 새기고자 한다. (여기선 복잡하지 않도록 세부적인 성서 구절은 생략했으니 필요하신 분은 '성서신학대사전', 광주가톨릭대학, 1984를 참조하세요.) 구약에서 '사람의 아들'은 '인간'의 동의어로 사용되며 '인류의 한 구성원'을 가리킨다. 구약의 작가들은 이 표현을 사용할 때 인간의 우연성이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미소함, 심지어 죄인의 진상이나, 죽어야 할 인간의 형편을 강조하려고 했다. 묵시문학, 그중에서도 다니엘서 7장에서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하느님의 법정에서 보편적 왕권을 인수한다. 또한 '사람의 아들'은 괴물들(당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제국들을 상징)과 서로 맞서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왕권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차지할 것이다. 결국 '사람의 아들'이 맡을 직권은 다윗의 아들인 메시아의 직권을 능가하며, 다니엘서 7장 전체 문맥에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나라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특히 그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다교의 묵시문학(에녹서 등) 안에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 곁에 머무는 신비로운 존재로서 정의를 유지하고 마지막 시대까지 보류된 구원을 계시할 것이다. 그 때 '사람의 아들'은 영광의 옥좌에 좌정하여 최후 심판자로서, 부활하고 그와 함께 살아갈 의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지상적 출생이 없으며 고통을 당하지도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이같은 선지식(先知識)들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도 물론 이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주 동일시하셨다(예수님께서 특히 애용하신 표현).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아들'과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의 아들'과는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즉 묵시문학의 전승들이 두드러지게 예시하지 못했던 내용,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영광을 차지하기 위하여 배척과 죽음을 당할 것임을 명확하게 하신 것이다. 사실 다니엘서에서도 성인들의 영광에 박해가 수반되고 있듯이 그분도 비천과 고통 속에서 지상 생활을 영위해야 하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당신의 사명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세속적인 메시아 호칭보다 '사람의 아들'의 호칭을 즐겨 택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은 어떤 직권이 있는가? 죄의 용서(마태 9,6), 안식일에 관한 통제권(마태 12,8), 말씀의 선포(마태 13,37)가 그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계시를 어느 정도 드러내는 행위들이다. 그렇다.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서 마지막 날에 최후 심판권을 행사하실 분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그때에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 '사람의 아들'이 역설적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의 신비가 남김없이 계시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아들'은 오직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살과 피를 주심으로써 인간을 살게 하신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어떤 분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분의 직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하느님 법(神法=십계명), 안식일 법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다. 그분은 말할 것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래서 자칫 하느님의 법을 인본주의에 입각해서 맘대로 변경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마르꼬 복음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는 구절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어디까지나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엔 없는 '성전 보다 큰 이'를 또한 강조한다. 마태오는 예수를 율법을 폐기하러 온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온 분이라고 하였다. 가끔 우리도 교회의 법들에 대해, 휴머니즘을 들어, 또는 시대의 상황 변화에 따라 변경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낙태법, 인간 복제나 이혼에 관한 문제, 안락사의 문제, 동성애 문제 등등...인간의 기본 권리나 인본주의에 입각해서 특히 논란이 많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어떨 때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 무척 곤란하다. 그러나 적어도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그런 것이 휴머니즘에 의해서, 시대 상황에 의해 마구 변경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마르꼬 복음서에 의하면 그런 문제도 또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판단은 예수님의 권한을 이어받은 사도들, 그리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게 넘겨졌다. 교회의 해석, 역시 그것이 중요하다. 가끔은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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