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 |
한자 |
安重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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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1879∼1910). 의사(義士). 본관(本貫)은 순흥(順興). 아명(兒名)은 응칠(應七). 세례명은 토마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진사(進士) 안태훈(安泰勳)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우며 사격 · 승마 · 궁술 등 문무(文武)를 고루 익혔다. 1894년 결혼, 2남 1녀를 두고 1895년 영세 입교한 후, 아버지와 함께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를 전교하는 한편, 동학혁명 후 화적떼로 변한 동학패잔병과 싸워 명성을 떨쳤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민족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907년 진남포(鎭南浦)에 삼흥학교(三興學校),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운 뒤, 1908년 만주를 거쳐 연해주(沿海州)로 망명,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군사령(俄領地區軍司令)으로 의병을 이끌고 국내에 들어와 함북 경흥(慶興)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등과 함께, 러시아 장상(藏相) 코코프체프(Kokovtsev)와의 회담차 하얼삔(哈爾賓)에 오는 이또오(伊藤博文)를 살해하기로 결의, 9월 26일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하얼삔 역에 잠입하여 이또오를 사살하고 하얼삔 총영사 가와까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까(田中太郞) 등에 중상을 입히고 체포되었다.
재판 중 자신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다가 체포된 포로일 뿐이며 자신의 행위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대의를 위한 정당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1915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후 영세신부인 빌렘신부에게 모든 성사(聖事)를 받고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과 장남 분도를 성직자로 키워 줄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남긴 뒤 1910년 3월 26일 성화(聖畵)를 몸에 지닌 채 총살되어 순국하였다. 서예(書藝)에 뛰어나 재옥 중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고 또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과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 1979년 발견) 등을 저술하였는데 ≪안응칠 역사≫에서는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이라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1962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고 19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성대히 거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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