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안 중근의사께서 ...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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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옥 | 작성일2007-03-27 | 조회수303 | 추천수0 | 신고 |
제 목 : 되돌아보는 교회사 = 안중근 의사 방송일 : 2000. 4. 18
(앵 커)
다음은 대희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역사를 짚어보는 ’되돌아보는 교회사’ 순섭니다.
오늘은 그 열여섯번째 시간으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당시 한국 교회의 움직임"에 대해 알아봅니다.
(기 사)
천9백5년, 대륙침략을 꿈꾸던 일본에 의해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사이에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됩니다.
그러자 이에 항거하는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마침내 천9백9년, 만주 하얼삔에서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한일합방을 위해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온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세계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소식에 놀랐고, 특히 안중근 의사가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회에 큰 논란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들은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이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의거를 살인행위라고 규정하는 한편, 살인자는 결코 천주교 신자일 수 없다고 강변한 것입니다.
뮈텔 주교는 게다가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게 종부성사를 주기 위해서 여순 감옥에 갔던 빌렘신부에게 2개월간의 성무집행 정지처분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당시 교회의 이같은 처사는 일제의 박해 아래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려진 부득이한 결정이었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어쨌건 간에 이후 한국 교회 안에서는 안 의사의 의거와 당시 교회의 태도를 놓고 논란이 계속돼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안의사의 의거가 결코 개인적인 살인 행위가 아닌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결단이었으며, 따라서 당시 교회의 태도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는 반성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준비 중인 ’한국 교회의 과거사’ 반성과 관련한 문헌에서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문제가 언급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피비씨 뉴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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