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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삶과 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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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안중근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토마, 1879~1910)은 1897년 이미 입교했던 부친 안태훈(베드로)의 인도로 전 가족과 함께 빌렘 신부(한국명 홍석구)에게 세례를 받고 신앙인의 길로 들어섰다. 세례 후 그는 철저한 기도생활과 수덕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여러지역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황해도 지역의 복음화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의병전쟁 중에도 하루도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기도생활에 철저했으며, 죽음이 임박한 동료에게 대세를 베풀기도 했다.
안중근은 함부로 인명을 해치는 것을 스스로 삼갔다. 의병 전쟁 중 일본군 두 명을 생포했을 때 그는 포로에 대한 즉결처분도 살인행위라고 말하며 즉결처분을 반대하고 그들을 석방했다. 이러한 태도는 살인을 금하던 천주교의 교리, 그리고 만국공법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신앙적 확신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때 총알에 십자가를 새겨 넣으며 자신의 의거가 성공할 수 있길 기도했고 거사가 성공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먼저 드리고 가슴에 성호를 그은 다음 비로소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중근은 가족에게 자신의 장남을 성직자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성직자들에게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노력을 당부했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처형을 성금요일에 집행하길 부탁했다.
그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에게 올린 옥중편지의 일부분. 어머님 전 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 이 세상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길러 주시기를 바라오며, 훗날에도 잊지 마시고 천주께 바치는 몸이 되도록 키워주소서.(...) 이 밖에도 드릴 말씀이 많사오나, 훗날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올 때 다른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오니, 신앙을 열심히 지키셔서 훗날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뵙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들 토마 올림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며 끝까지 나라의 독립과 일신의 구원을 의심치 않았던 안중근. 그는 사형장에서 빌렘 신부에게 이같은 유언을 남긴 뒤 3분간 기도한 후 사형대에 올라가 동양평화만세를 부르고 죽음을 맞이했다.
교회의 반응
안중근의 의거에 대한 당시 교회의 반응은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다. 사건 당시 뮈텔 주교와 선교사들은 이토의 암살범이 천주교인으로 판명되자 크게 실망감을 나타냈고 신문에 가능한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다. 이들은 교회의 존립에 관심을 기울였고 정교분리정책과 정치불간섭주의를 내세우며 정치권력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피하고자 했다. 일반 선교사들 역시 성속이원론에 따른 경건주의 신앙을 근거로 교회가 정치적 문제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안중근이 이토를 제거했을 때, 천주교회 공식 기관지였던 경향잡지는 공을 암살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함으로 하였다 하며,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제 생명을 바치기로 예비하였으니, 그 마음이 영특하고 용맹하다 하나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악한 일인즉, 악한 일이라 하노라하면서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 행위로 단죄했다. 또한 뮈텔 주교는 안중근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겠다는 빌렘 신부의 요청을 거부했고, 그럼에도 안중근에게 성사를 주었던 빌렘 신부에게 2개월 동안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 후 안중근은 교회 내에서 조명받지 못한 채 수십년 간이나 묻혀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1979년 9월 2일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식B과 추모미사가 거행됐고, 이후 안중근에 대한 연구논문 발표, 자료집 발간, 학술 심포지엄, 추모미사가 이어졌다. 1980년 서거 70주기 추모미사, 1986년 서거 76주기 추모미사, 1993년 가톨릭신문사가 후원한 한국교회사 연구발표회 100회 기념 안중근의사 학술 심포지엄 등은 안중근의 재조명 작업의 일환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한국교회는 전체 교회 차원의 정기적인 기념행사 하나 없이 안중근에 대해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입장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안중근 다시 보기
안중근은 자신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천주교 교리에서 금지한 죄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 뿐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이와 관련된 교회의 가르침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79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의회 문헌은 전쟁 중에도 인간의 기본권이 존중돼야 함을 주장하며 이런 권리(기본권)를 고의로 위반하는 행동과 그런 행동을 종용하는 명령은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으며, 맹목적 복종이 이런 명령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계획적으로 국민전체나 국가나 소수의 이민족을 전멸하는 행위를 물어야 하며, 이것은 무서운 범죄행위로 철저히 규탄돼야 한다. 반대로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반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용기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안중근의 의거는 현대 교회정신에 비춰 볼 때 타당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즉 그의 행동은 엄연한 정당방위이며, 비복음적이고 비그리스도교적인 폭력적 현실에 대한 저항행위로 설명된다.
노길명 교수(고려대)가 논문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운동에서도 밝혔듯 안중근은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이었으며, 또한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당시 교회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시키고자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선각자로 보여진다.
더불어 안중근은 그의 동양평화론에서도 볼 수 있듯 한국의 독립만이 아니라 동양평화라는 대의를 구현하고자 대항했다. 특히 동양 3국이 사소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서양의 침략에 대응하자는 그의 동양평화론은 서양의 자본에 의해 우리 경제가 잠식되고 있는 IMF 시대 상황에서 되새겨봄직하다.
김유진 기자 cathy@catholictimes.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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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일 : 1999-0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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