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진리를 떠나가게 된 슬픈 역사
1세기의 교회 에베소 교회, 흰 말 - 초대 교회의 승리 시대
사도시대 이래 처음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계에는 요사이 말하는 그런 형태의 교파는 없었다. 1세기 말에 쓰인 요한계시록에 나타난대로, 교회는 단순히 그 위치에 따라,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등으로 불리웠을 뿐이다(계 2:1, 8, 12). 1세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들이 이러한 교회들을 다스렸고, 그 후에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도교부들이 일어나서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켰다.
2,3 세기의 교회 서머나 교회, 붉은 말 - 로마제국의 핍박과 순교 시대
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제국의 황제에 대한 예배가 강요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자, 교부들이 일어나 교회를 보호했다. 로마제국의 끔찍한 핍박은 2백년 이상이나 계속되었지만 교회는 그래도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며 순교자들의 피를 씨앗으로 하여 로마제국 전역으로 세차게 번져 나갔다.
4,5 세기의 교회 버가모 교회, 검은 말 - 교회의 세속화와 진리의 타협시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함
여러 세기 동안 수 만 명의 크리스챤들 순교자의 피가 흘려진 곳마다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가혹한 핍박 하에서도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되었다. 순교를 당했으나, 신앙과 기독교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순교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 흘릴 수록 더 많은 크리스챤들이 생겨났다. 핍박과 고문과 죽음은 그리스도교를 없앨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피로 인쳤고,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은 더 널리 전파되었다. 정치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껴안음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황제는 정책을 바꾸어 종교자유를 허락하는 관용 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제 핍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겉으로 볼 때 크리스챤들에게 평화스러운 듯이 보이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교도들과 크리스챤들을 모두 수용하여 국가를 통합하려는 정책으로 그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던 토요일 안식일을 이교도들이 태양신을 경배하던 일요일로 바꾸어 그 날을 공식적인 국가의 예배일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인 넷째 계명이 사람의 권한으로 바뀌어지는 일이 생겼다. 이런 일들과 함께 기독교에는 많은 이교의 가르침과 예배 형식이 스며들었고, 핍박을 받을 때는 순결하던 하나님의 참 교회는 세속과 타협하게 되었다.
또한 이 일은 사도 바울의 예언한 것처럼 법왕권의 일어남과 그것이 초래할 큰 배도에 대한 길을 열어주었고, 또 교회 안에 스며 들어온 오류들로 법왕권의 가르침이 더욱 확립되도록 만들었다. 일찍이 바울은 법왕권과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살후 2:3,4)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계속하여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살후 2:7)다고 형제들에게 경고하였다.
이교의 관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양보와 순응주의적 정신은 교회가 이교 아래서 견뎌낸 맹렬한 박해로 말미암아 한동안 방지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박해가 그치고 그리스도교가 왕궁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겸손한 단순성을 버리고 이교의 제사장이나 방백들의 교만과 허식을 따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이론과 유전으로 대체시켰다. “불법의 비밀”은 처음에는 조금씩 비밀리에 진전되었으나, 나중에는 세력이 커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더욱 공공연하게 기만적이요, 참람된 교리를 진척시켰다.
콘스탄틴이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여 융화정책을 폈다. 그리하여 주후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종교 자유를 허락하는 밀란의 칙령을 내렸으며, 같은 해 그리스도교회 성직자들에게는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면제하고 사법상의 특혜를 베풀고, 국고에서 하사금을 지급하는 등의 특별 혜택이 주어졌다. 315년에는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는 쉽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고, 교회가 유산을 증여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교회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했다. 324년 황제는 자신은 미침자이면서도 침례받는 로마 시민에게는 특전을 베풀어 한 해 동안 로마에서는 12,000명이 침례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325년 황제는 신하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도록 조치했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종교정책의 변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신속한 타락을 몰고 왔다. 저마다 성직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속된 야망은 성직 매매를 초래했고, 도시 교회의 감독 임명시에는 거리의 폭력배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교회는 온갖 퇴폐와 부정의 온상이 되었고, 정치의 시녀가 된 교회는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는 일에도 황제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증언은 4세기 그리스도교의 진상에 대한 적절한 요약이다.
"4세기 초 서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고... 324년,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결과로 신자가 되면 누릴 수 있는 특전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이교도들이 교회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교회가 미처 가르치고 동화시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화려한 이교 의식에 익숙한 이교도들에게 단순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만족을 주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교적인 신조와 종교 행사들을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점점 성경의 진리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고, 진리에 대한 신자들의 무지로 인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교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의 교회라고 불러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교의 행습을 본받아 교회 안에는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고 제사를 드리는 사제와 화려한 의식, 돌과 나무로 새긴 각종 성상들, 성수, 분향, 수사들과 수녀들, 연옥의 교리, 구원은 은혜보다는 행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이교적 신앙이 일반 신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로마제국 전역의 교회들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로마에 있는 교회는 더 이상 사도적인 교회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종교적 기형체가 되었다." Liraine Boettner, Roman Catholicism, 11.
설상가상으로 당시 로마제국에 유행하던 페르샤의 태양신 미드라 숭배에 익숙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321년 3월 7일 그 유명한 "일요일 휴업령"을 반포했다. "존경할 만한 이 태양의 날에 모든 판사들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휴업하도록 하라" 는 황제의 칙령은 단번에 이교도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로마 황제는 "일요일 휴업령"을 통해서 토요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기독교인들과 일요일에 태양신에게 예배드리던 이교도인들의 예배 날짜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보다 쉽게 개종하도록 유도하였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는 폭동으로 인해 로마제국의 증오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유대인들과 구별되기 원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2세기 이래 예배일인 토요일 외에 일요일에도 산발적인 모임을 가져왔다. 이미 로마제국의 호의에 길들여진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시한 성직자들은 거침없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서기 364년 라오디게아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안식일 준수를 유대교 신앙행위로 규정하여 이를 저주하고 일요일 성수를 교회법으로 정식 채택함으로써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이 공식적인 성일로 확정되었다.
354년에는 그 동안 태양신의 아들 담무스의 생일로 기념되던 12월 25일이 최초로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둔갑하여 로마 교회 달력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때까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켜오던 유월절 행사가 이교적 배경을 가진 "이스터", 곧 부활절-일요일 축제로 날짜를 바꾸어 지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 이다. 참으로 급속한 변화였고 신속한 변절이었다. 2백년 이상 계속된 끔찍한 핍박에서 승리함으로 살아남았던 교회가 일개 로마 황제의 정치적 관용과 선심 공세와 세속적 번영에는 단시일 내에 힘없이 무너진 것이다.
중세 로마 교황권의 확립
처음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에는 지금과 같은 교파는 없었지만, 그리스도교의 본산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로마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교회들이 신학적 차이를 빙자로 서로 우위를 겨루는 주도권 분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역사는 로마 교회의 편에 있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지라는 전통적인 자부심과 함께 대대로마제국의 수도라는 정치적 강점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가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면서 로마 교회 감독은 정치적 권력도 갖게 되었다. 392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정치와 종교의 유착이 가속되는 가운데 시작된 게르만 민족의 로마 침입을 외교를 통해 막아낸 로마교회 감독 레오는 최초로 "아버지"를 뜻하는 오늘날의 교황의 명칭인 "Pope" 타이틀을 451년 로마 제국의 정부로부터 공인 받음으로써 최초의 교황이 탄생한 셈이다.
6~16 세기 초의 교회 두아디라 교회, 청황색 말 - 종교 암흑시대
538년 저스티니안 로마 황제는 게르만 민족에게 유린된 서로마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하여, 서로마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로마교회의 감독을 전 세계 교회의 머리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에 장애가 되는 게르만 부족들인 헤룰리(493년), 반달(534년), 동 고드(538년)를 각각 제거함으로써 바야흐로 로마 교회가 주도하는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가 6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몰락되기까지 12세기 이상(126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비슷할 때인 서기 622년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마호멧의 이슬람도 로마교회의 주도권 확립에 큰 몫을 했다. 로마교회의 경쟁 상대였던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동방의 3대 교회가 7세기 초에 모두 이슬람의 수중으로 넘어감으로써 로마교회의 존재는 한층 고유하게 되었다. 또한 732년에는 유럽을 서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이슬람 세력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전공을 앞세워, 찰스 마텔은 게르만 민족이 세운 최대 왕국인 프랑크의 왕위를 불법으로 찬탈했다. 그가 이룩한 카롤링기안 왕가 출신의 피핀을 도덕적으로 합당한 통치자로 인정하고 왕관을 씌워준 보답으로, 로마교황은 756년 이태리에 있는 동 로마제국의 땅 일부를 기증받음으로써 오늘날처럼 영토까지 갖춘 최초의 종교 국가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오래 동안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와는 성만찬 예식에 사용하는 빵에 누룩을 넣는 여부를 놓고 맞부딪쳐 서기 1054년 서로를 파문함으로써 희랍정교로 알려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이처럼 영토와 교권을 확보한 교황권은 11세기에 이르러 중세기 봉건제도에서 정치와 경제의 노른자인 서임권마저 뜻대로 쟁취함으로써 중세기 절대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논리는 교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이미 4세기에 일어난 배도에 앞장섰던 로마교회는 급속도로 퇴폐와 타락의 길을 치달았다.
로마 천주교의 등장과 세력
크리스챤들의 교회는 벌써 오래 전에 이교도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리가 적당히 섞여진 채로 로마는 기독교 국가처럼 행세하였고, 고대제국의 영역 안에서 거의 모든 세계는 로마를 신앙의 지상도성으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에 법왕권은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그의 권좌는 로마에 위치하게 되었고, 로마의 감독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공포되었다. 그들은 교황을 하늘의 가시적 중재자로 보았다. 이교는 그의 지위를 법왕에게 넘겨 주었다. 곧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계 13:2)를 준 것이다. 이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된 1260 년간의 법왕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단 7:25; 계 13:5-7 참조).
이제 교회와 교회의 의식, 감독, 성직자들을 위하여 세워진 듯한 로마는 크리스챤들을 다스리는 거대한 힘을 강화시켰으며, 교회는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과 가장 높은 교회의 공직을 차지한 사람들을 폭군으로 만듦으로써 그 사명의 끝을 맺었다. 어느새 교황의 힘과 그가 임명한 사람들의 힘은 절대적이 되었고, 그들이 세운 교회의 법이나 의식을 항거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한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을 지키는 크리스챤들은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전권적 율형에 대항하여 감히 그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자마자 “이단”이 되었다.
교황권이 하나님의 법을 변경시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였던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면서 기독교회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는데,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수많은 정치인들과 이교도들이 황제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기독교회로 새로 개종한 황제는 이교도들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풍습과 전통인 우상을 만들어서 신전에 세우는 관습과, 그들이 태양신에게 예배 드리는 날을 기독교회가 수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교황권의 지도자들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을 변경시킴으로써 황제의 요구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4세기 이래 성서 신앙의 닻줄이 끊긴 로마교회는 6세기에 확립된 교황권을 앞세워 세속적 조류에 진로를 맡긴 채, 중세기 영적 암흑시대를 향하여 기나긴 배도의 표류를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중세 교회의 배도는 그 후 1,260년 동안 계속되어 그 내역을 쌓아갔다. 다음의 목록은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저서에서 간추린 것이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배도의 깊은 골짜기를 누가 메울 것인가?
십계명의 변조
아마도 세기에 걸쳐 천주교가 만든 종교의 가장 큰 변조는 성경 출애굽기 20장 3~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바꾼 것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중요한 법인 십계명을 천주교에서 변경시켰다. 성경에 쓰여 있는 십계명과 천주교가 새롭게 변경한 십계명을 비교해 보자.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1.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
2.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라.
5. 사람을 죽이지 말라.
6. 간음하지 말라.
7. 도둑질하지 말라.
8. 거짓증언을 하지말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중세기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배도의 역사와 내역
364년, 안식일을 저주하고 그 신성성을 일요일로 옮김(Laodicea 종교회의). 넷째 계명의 파기
375년, 천사와 죽은 성자들 숭배, 성상사용
431년,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높이기 시작함(Ephesus 종교회의)
500년, 이교 제사장들의 본을 따른 복장으로 집전함.
593년, 교황 그레고리 1세에 의하여 연옥 교리가 소개됨.
600년, 마리아나 죽은 성자들에게 직접 기도드림.
756년, 프랑크왕 피핀(Pepin)에 의해 교황에게 영토와 세속권이 부여됨.
786년, 속죄와 예배의 수단으로 십자가, 성상 및 유물 숭배. 둘째 계명의 파기
787년,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와 죽은 성자들에게 기도드리는 일이 인정됨(Nicea종교회의)
850년, 사제에 의해 축성된 성수사용
890년, 요셉(마리아 남편) 숭배.
995년, 교황 요한 15세에 의해 처음으로 죽은 성자들을 시성함
11세기, 예배가 아니라 제사로서의 미사가 드려짐
11세기, 교황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확립됨
12세기, 물에 잠그는 침례 대신 물을 뿌리는 세례를 인가함.
1090년, 베드로(Peter)라는 이름의 은둔 수사에 의하여 성모에게 바치는 "장미 꽃다발"의 뜻인 "로사리오" 즉 묵주 기도가 고안됨
1184년, 종교재판(Inquisition)제도가 설정됨(Verona 종교회의)
1190년, 면죄부(Indulgences)판매
1215년, 화체설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해 선포됨
1215년, 하나님 대신 사제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가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해 선정됨(Lateran 종교회의)
1229년, 성경을 금서 목록에 넣어 평신자들의 접근을 금지함(Valencia 종교회의)
1414년, 성만찬시 평신도들에게 포도즙 잔을 금지시킴(Constance 종교회의)
1439년, 연옥이 정식 교리로 선포됨 (Florence 종교회의)
1513년, 교황 레오10세는 영혼 불멸을 교리로 확정하고 조건적 불멸 신앙을 이단으로 선언함 (Lateran 종교회의)
1545년,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함(Trent 종교회의)
1546년, 영감 받지 아니한 경외서들을 성경에 포함시킴(Trent 종교회의)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성모 마리아는 탄생 때부터 원죄도 없고 해산의 고통도 없었다는 성모무염시태를 교리로 선포함
186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로마 교회가 인정치 않는 각종 시민의 자유 (종교, 양심, 언론, 과학, 등)를 정죄하는 교서(Syllabus Errorum)를 발표함(Lateran 종교회의 비준)
1870년, 교황은 결코 오류나 잘못을 범할 수 없다는 교황 무오설을 선언함 (Vatican 종교회의)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죽은 직후 육신 그대로 승천했다는 성모 몽소승천을 교리로 선포함 (축일은 8월 15일)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됨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저서, Loraie Voettner, Roman Catholicism, (The Prebyterian and Refomed pub-Iishing Co., 1979). 7-9-
이 빗나간 가르침들을 어떻게 하면 다시 올바로 세워 놓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종교 개혁이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주체인 개신교의 피할 수 없는 책임과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이 깊은 배도의 골짜기를 메우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지금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와 가르침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성서 신앙에 어긋나는 배도의 내역들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1200여 년 동안에 걸쳐서 파내려간 깊은 배도의 계곡을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가 단번에 모두 메울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중세기의 기나긴 배도와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교회가 참으로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배도와 오류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진리의 완전한 회복, 바로 그것이 개신교회를 존재하게 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목적과 실제적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세기 로마 교회의 교황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이교적 교리들을 아무런 생각없이 따라가고 있는 개신교인들을 보노라면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배도의 역사와 내역을 살펴보았으므로, 다음 기사에서는 빗나간 가르침과 오류들이 진리의 등대지기들인 개혁자들에 의하여 올바로 회복되어 온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www.sostv.net)
종교 개혁의 시작과 발전 과정 - 개신교의 등장
영적 암흑이 칠흙같던 12세기, 참다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의 가르침이 중세기 로마 교회의 배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더 이상 구원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생명의 빵과 물을 구하는 애타는 영혼의 절규가 울려 퍼졌으며, 진리를 갈급하는 영혼들이 개혁의 선봉에 서기 시작하였다.
1. 개혁의 선두주자, 왈덴스인들 (종교 개혁의 밑거름)
언제나 먼저 목마르고 굶주린 것은 평신도였다.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는 역사가 윌리의 표현처럼 로마 천주교회의 전성기였던 12세기는 참으로 영적인 한 밤중이었다. 마침내 1170년경 프랑스 남부로부터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왈덴스인으로 불리는 일단의 평신도들이 일어나, (1) 로마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성서신앙을 제창했으며, (2) 연옥교리를 부정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반대했으며, (3)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기도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형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했다. (4) 로마 천주 교회는 결코 잘못할 수가 없다는 무류설을 반대하고 평신도의 전도할 권리를 요청했다. (5) 이들 가운데 성서적 안식일인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무리도 일어났음이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험준한 알프스 골짜기를 피난처로 삼고 행상을 하며 전도한 이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혹독한 핍박으로 수없는 희생자를 내며 유럽의 22개국으로 번져나갔다. 왈덴스인 교회는 아직도 이태리에 남아있는 최초의 개신교이다.
2. 종교 개혁의 새벽별, 영국의 위클립 (사데 교회 - 종교 개혁 시대의 시작)
왈덴스인들이 외롭게 이어 온 진리의 빛은 위클립에게 옮겨졌다. 왈덴스인의 개혁이 영국에까지 이른 무렵, 14세기 유럽의 최고 명문인 옥스포드 대학의 가장 유능한 학자요 국왕의 궁중 사제였던 위클립이 일어나 왈덴스인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선포했다. 그는 (1)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시며,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했다. (2) 연옥을 부정하고 성자 예배와 유물 숭배를 반대했으며, (3) 화체설을 공박했으며, (4) 고해성사와 교회의 무류를 부정하고, (5) 구원은 인간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쳤다. (6) 1382년, 금서였던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백성들의 영적 안목을 회복시켰으며, (7) 왈덴스인의 본을 따라 롤라드로 알려진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게 했다.
3. 종교 개혁의 큰 별, 마틴 루터와 루터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옥 교리를 소개하여 속죄의 필요를 역설한 중세 천주 교회는 고해성사와 함께 고행을 강조하며 면죄부로 자신의 죄의 형벌을 감면할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신속히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은 이미 요한 허스가 일으킨 개혁에 자극을 받아,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체험한 젊은 신부요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로 하여금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게 만들었다. 루터는 그 동안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괴롭혀 온 로마 천주 교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95개조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위턴베르그 성당문에 게시하였는데, 이로써 세계 역사를 바꾼 대 종교 개혁의 막이 올랐다. 마틴 루터는 즉시 교황권에 의해서 이단으로 고발되었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국회로 소환되어 1521년 4월 18일 심문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를 담대히 거부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분수령을 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성 로마제국에 잡히면 화형에 처해지는 이단의 선고를 받은 루터의 대표적 가르침은, (1) 신앙의 최종 권위는 로마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에 있으며, (2)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의 선행이나 로마교회의 사제가 나누어주는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며, (3) 구원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누리는 "오직 은혜"로 주신 선물이며, (4) 또한 신자들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을 제창했고, (5) 연옥 교리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조건적 불멸을 가르쳐 부활신앙을 강조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 교황권의 교리집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어 진다." 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6 ,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 신조. 루터의 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으며 후에 장로 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요한 칼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4. 재침례파가 비춘 보다 밝은 빛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독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요, 학자며 애국자였던 쯔윙글리는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확신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이교적인 예배의식과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극도에 달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하는 대담한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나 쯔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하는 일단의 개혁자들이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일어났다. 재침례파, 혹은 "형제들"로도 알려진 이들은, (1)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깊은 성경연구를 강조하고, (2)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으며, (3)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수도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베푸는 로마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인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성인 신자에게 이를 다시 베풀었때문에 재침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4)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을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고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강조하는 신앙을 받아 들였다. (5) 교회로부터 각종 성상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일체 제거할 것을 주장하고, (6)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맹서를 금했으며, (7) 전쟁을 반대하고 무기 사용을 금했으며,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지 않았으며, (8) 모든 교회는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믿고 다스려나가는 회중제도를 택했다.
5. 메노나이트가 발전시킨 진리의 등대빛
핍박을 받은 많은 재침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로 도피했는데,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가 카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화체설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가톨릭 신앙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 재침례파로 개종하여 그들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다. 재침례파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요한복음 13장의 교훈에 따라 성만찬 전에 서로 발을 씻기는 세족예식도 시작했다.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메노나이트 재침례파 신자들은 당시에 알려진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나 가톨릭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미처 그들을 신앙을이해치 못한 개신교도들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아 많은 순교자를 냈으나 때마침 열린 신대륙으로 건너가 1683년 이후부터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메노나이트와 같은 계통인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비무장 평화주의, 의료봉사를 통해 미국의 인권옹호와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6. 종교 개혁의 총아, 요한 칼빈과 개혁(장로) 교회
철저한 가톨릭 신봉 국가였던 프랑스는 루터의 개혁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대대적인 핍박을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20세의 젊은 청년 요한 칼빈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피난하여 제네바를 중심으로 신정정치까지 베풀며 루터의 개혁과 양대 주류를 이루는 개혁을 추진시켰다. 칼빈이 강조했던 점은, (1) 신앙은 성서에 기초해야 하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성서신앙을 강조하고, (2)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했다. (3) 예배 의식에서 중세 로마교회의 우상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여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놓았다. (4) 은총만을 치우치게 강조한 루터와는 달리 의와 성화의 표준으로 율법의 기능을 적절히 강조했다. (5)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감독제도와 회중제도의 중간인 장로제도를 채택했으며, (6) 루터와 쯔윙글리보다 성만찬의 영적 의미를 한층 깊게 했다. (7) 교육을 강조하고 직업을 소명으로 가르치는 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본적으로 칼빈의 개혁 신앙은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철저하게 규명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써 종교개혁의 진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칼빈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교회는 유럽에서는 "개혁 교회"로 알려졌고, 영국 등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장로 교회"로 불리워지고 있다.
7. 영국 국교회의 태동
16세기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루터파, 스위스의 재침례파, 칼빈의 개혁교회와 같은 세 주류를 이루며 진전되고 있는 동안,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별도의 이유로 별도의 개혁이 전개되고 있었다. 14세기 옥스포드의 학자인 위클립이 일으킨 개혁의 파문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허스를 통하여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막상 영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정치적 여건으로 개혁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개혁사상이 영국에서 문서로 소개되자 헨리 8세는 이를 글과 힘으로 분쇄하여 천주 교회의 교황으로부터 "믿음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교황이 자신과 스페인의 왕녀요 죽은 형의 미망인인 왕후 캐더린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영국 교회를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이리하여 성공회의 모체인 영국 국교회가 탄생했으나, 머리가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파 개혁자인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4세를 도와 칼빈의 개혁 신앙을 흡수하여 국교회를 크게 개혁해 나갔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가톨릭 왕후 캐더린이 낳은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은 역전되어 개혁신앙을 가진 3백명의 학자와 성직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8백여명은 대륙으로 피난했으며 1,200명의 성직자들은 직분을 빼앗겼다. 경건한 학자요 감독이었던 리들리와 라티머는 가톨릭 화체설과 이교의 제사 방식인 미사 예배 형식을 끝까지 반대한 죄로 1555년 10월 1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집행 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오래 기억되고 있다. "리들리 선생, 용기를 가지고 사내답게 처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확신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영국에 붙이게 될 것이요." 화형이 두려워 개혁 신앙을 취소했던 크랜머 대주교도 다음 해 자신의 개혁 신앙을 재천명한 뒤 화형주에 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그의 거짓 교리와 함께 적 그리스도로서 그를 거절한다"고 선언한 다음, 지난 날 개혁신앙 포기를 자술했던 오른 손을 먼저 불 속에 넣어 태우면서, "이 손이 범죄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며 불꽃에 사루어졌다. 이러한 뼈저린 희생을 치루며 지켜온 한가닥 한가닥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서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신앙적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가? 오늘날 누가 과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해 일어설 것인가?
8.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진수, 청교도
1558년에 즉위한 메리 여왕의 이복 동생 엘리자벳 여왕은, 자신을 합법적인 후사로 인정치 않는 교황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적 이유로 개혁 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하에서 지난 날 대륙으로 피신했던 개혁자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속속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카톨릭 신앙에 칼빈과 루터의 개혁신앙을 혼합한 국교회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개혁하여 순결하게 하려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 이들로부터 일어났다. 1648년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헌장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성을 주도한 것도 청교도들이었다. 영국에서 진리의 맥은 청교도들이 이어갔다. 그들은 이교적인 예배의식, 사제들의 복장,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각종 제일들, 사제와 신부의 면죄 행위, 십자가 사용, 대부모 제도의 폐지와 함께 성일로 간주된 일요일의 철저한 준수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교황 대신 교회의 머리가 된 국왕이 감독들을 앞세워 교회를 다스리는 성공회의 감독제도를 반대했다.
9. 청교도 신앙의 진수, 회중교회
영국의 국왕이 머리로 남아있는 영국 국교회가 완전한 개혁을 받아들일 전망이 어두워지자, 영국 국교회를 떠나 완전한 분리를 원하는 보다 철저한 청교도들이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이들 청교도들은 국왕이 머리가 된 국교회를 부정하고, 여러가지 속박을 가져오는 칼빈의 장로제도도 배제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언약으로 연합된 회중이 자율적으로 목사 등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성경에 의하여 계발된 신앙양심의 판단에 따라 믿음을 행사하도록 촉구했다. 이리하여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의 진수에서 최초의 회중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10. 회중 교회의 장자, 침례 교회
엘리자벳 여왕 이후의 영국 왕들도 국교주의를 고집하며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회중교]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신자들은 고국을 떠나 보다 나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홀랜드로 피난했다. 당시 영국의 게인스보로에 있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목사에서 개종한 스미스 목사의 지도 아래 1608년 홀랜드의 암스텔담에 정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홀랜드의 재침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감명을 받았으며, 동시에 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서적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1609년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비롯하여 동료 헬위스 등 36명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침례를 베풀고 회중이 교회를 다스리는 최초의 침례교회가 홀랜드에 세워졌다. 그들은 1611년 영국으로 돌아와, 1612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다. 이처럼 최초의 침례교회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우던 청교도들의 모임이었던 회중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과 신대륙에서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 개신교 신앙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을 설교한 죄로 12년간 옥살이를 하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흑암과 빈곤의 대륙 인도 선교를 위해 몸을 사룬 윌리암 캐리, 신대륙 미국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원칙을 심어준 로저 윌리암스, 구속사적인 재림운동을 일으켜 세상을 각성시킨 윌리암 밀러 등이 모두 자랑스런 침례교인들이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2,900만의 신자를 가진 최대의 교파인 침례교는 다른 개혁 교회들처럼 고정된 신앙고백이 없이 신자들이 계발된 신앙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확신한 바대로 살도록 권장하고 있어 새로운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다. 침례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일반 개신교와 같지만, 그 밖에도 (1) 유아세례와 물을 뿌리는 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인정하며, (2) 회중제도의 교회조직과 (3) 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 (4)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극도로 존중히 여기는 점들은 루터나 칼빈 등이 추진한 개혁을 더욱 진전시켰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근원에 재침례파의 신앙이 포함되어 있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침례교의 근원으로부터 후에 종교개혁의 절정인 안식일 진리를 발견한 제칠일 침례교회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1. 회중 교회의 장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가 개종한 경건한 지도자 로빈슨 목사의 지도를 받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회중교]들은 1609년 핍박을 피하여 홀랜드로 건너가 레이든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생활의 안정이 어려워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왕도 없고 교황도 없는 땅인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1620년 9월 평신도 지도자 브루스터의 인도 아래 102명의 신자가 돛배인 메이플라워 호를 세내어 위험한 항로인 대서양을 건너 11월 21일 마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절반은 추위와 질병으로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이들이 바로 미국의 건국 조상이 된 "필그림 파아더즈"들이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출가시킨 위대한 맏딸이었다.
12. 청교도 운동에서 시작된 십계명의 회복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이 창조한 새 역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회중교와 침례교의 산모가 되었으며, 신대륙에 이룩한 신앙과 양심의 요람인 미국을 건설한 조상을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은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인 안식일을 다시 "수축"하는(사 58:12, 13) 역꾼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임을 이해하게 되었다(출 19:5,6).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 유지의 수단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깨달았다. 또한 인간의 죗된 본성은 율법(계명)을 기뻐하지 않지만(롬 7:19, 20)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은 율법(계명)에 순종함으로 속박이 아니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음도 깨달았다(약 2:12). 왜냐하면 십계명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출 20:2) 후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언약의 내용으로 이해하게 되자, 언약을 보증하는 인 곧, "표징"이 되는 안식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로소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출 31:13,16,17).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하여 마침내 칼빈의 가르침처럼, 주일 중 하루가 특별히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 중에서 질서를 보존함에 필요한 방도로서 그 날을 지킨다"는 해석이 성경에 어긋남을 깨달았다. 그들의 조상보다 더 밝은 빛을 가진 자손이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청교도 지도자 바운드의 저술과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 그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인 창조시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창 2:3)다는 말씀과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라고 선언된 십계명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한,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스스로 실천함으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웠"음을 상기시키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안식일이 필요했을진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바된 세상은 더욱 더 안식일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칼빈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예배하는데 편리한 하루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 믿고, 주일에는 각종 오락을 금하고 속된 일을 삼가는 등 성수 규정까지 마련했다. 그들의 안식일 준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이고 경건한 고신 계통의 장로교 신자들의 주일 성수와 흡사하다.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의 진리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은, 개신교라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였던 종교개혁 시대를 나타내는 "사데[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계 3:4)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역사와 진리의 맥은 언제나 이 몇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계승된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지금 받은 빛과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더 크고 온전한 빛과 진리가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16세기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한계를 벗어나, 회중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가문을 잇는 또 다른 자손인 침례교에서 17세기에 참된 제칠일 안식일을 쉽사리 싹티울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였다.
13. 침례교회의 상속자, 제칠일 침례교회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일요일을 제칠일 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는 등 받은 바 빛에 충실하며 최선껏 살아온 청교도들에게 보다 밝은 참 빛이 이르러 온 것이다. 영국 국교회를 떠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는 1616년 런던의 밀 야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그를 따르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인 잭슨에게서 제칠일 안식일을 소개받고 상당수의 회중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게 되었다. 결과로 1617년 밀 야드 교회는 회중제도를 유지하며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최초의 제칠일 침례교가 된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극히 존중하고, 각 사람이 성령의 인도로 계발된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연구하고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 나가며, 신자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를 베푸는 등 정통 침례교의 모든 신조에 충실하면서, 성경상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제칠일 침례교야말로 침례교가 낳은 훌륭한 맏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단으로 고발된 트래스크 목사는 혹독한 고문과 해상 감옥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신념을 굽혔으나 그의 회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도로시는 16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참으로 고결한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역사의 기록에 남은 밀 야드 제칠일 침례교의 두번째 목사는, 영국의 세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와 2세의 궁중 의사였던 챔블린이었다. 제3대 목사는 제임스였는데, 그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설교 중에 체포되어 다음 달 26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목을 잘라 장대에 꽂은 뒤, 시무하던 밀 야드 교회 뜰에 전시하여 안식일 준수의 댓가로 위협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선(계 12:17) 사단의 분노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표현된 것이다. 다음 해인 1662년 개혁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던 영국 국교회 목사 뱀필드는 개인적인 성경연구 끝에 제칠일이 성서적인 안식일임을 깨닫고, 9년 간의 복형기간 동안 계속 전도하여, "제칠일 침례교 도르체스터 감옥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출감 후 또 다시 안식일을 가르친 죄목으로 1684년 70세의 고령으로 춥고 습한 뉴게이트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14. 미국으로 이민 간 넷째 계명의 빛
순교자의 죽음은 언제나 진리의 씨앗이 되어 더욱 불어나게 마련이다. 영국의 뱀필드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로부터 나온 열성있는 신자인 멈포드가 일어나 안식일 기별을 가지고 1664년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 있는 침례교에 나가며, 십계명의 불변성과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열심히 가르친 결과 몇 명의 청교도 신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곳의 침례교회마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자 1671년 12월 23일 멈포드 내외를 비롯한 7명의 신자들이 거기서 나와 신앙 공동체의 언약을 맺고 신대륙에서 첫번째가 되는 제칠일 침례교를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세웠다. 마침내 신대륙에 안식일의 진리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제칠일 침례교는 1840년대 중반에 일어난 초교파적인 재림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일단의 재림신자들에게 그들이 목숨을 바쳐 수호한 안식일 진리를 전달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의 빛은 계속해서 전수될 수 있었다. 이러한 등대지기들의 충성과 희생을 통하여 16세기에 일어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 질수 있게 되었다.
종교 개혁의 마지막 주자 (결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노아 홍수시대 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가 믿음을 지켜온 노독들의 생애와 그 신념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믿음 장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었고 믿음으로 타락과 부패를 헤치고 나아간 자들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하였고 믿음을 가지고 핍박과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번 호의 내용에 비추어 히 11:33-40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의 성경절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싸워온 선조들의 생애를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어떤 논리를 인정하는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살아 있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믿음은 능동적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가 타협되거나 바뀌어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아니한다. 종교 개혁을 가능케 한 것은 개혁자들이 가진 바로 이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알면서도 가만히 중립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사실상 믿음을 가졌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상이 있다. 그것은 이 지구 역사의 믿음의 싸움에 있어서 마지막 주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주자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의 싸움이, 아니 계속되어 가고 있는 종교개혁의 사업이 온전히 이루어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다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내세우며 보존하여 왔다.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는 일을 즐거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그 결과를 바라보기만 하였지 아직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믿음의 싸움의 결과와 끝은 세상의 종말에 살고 있는 마지막 주자인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40절 하단).
빛이란 점진적인 것이다. 아침의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자가 단번에 진리를 다 꿰어 차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진리를 이해해 나가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예수께서 세워 놓고 가신 초대 교회는 그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면에서 완전하였었다. 그들은 온전히 회개하였으며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후예들에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돈에 대한 사랑과 권력에 대한 다툼과 정치와 타협하고 진리를 쉽게 변조시켜버리는 일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은 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쳐 버린 경우들이 많게 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주의 종들이 그때마다 종교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것이었고 또한 그 진리들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게 되며 구원을 얻게 되는 기초석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세기에 진리는 그 빛을 잃게 되었다. 이 세상은 암흑 속으로 깊숙하게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 때에 하나님께서 개혁자들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들의 출현도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밝음을 비추이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역사의 흐름과 그 성정은 진리를 단번에 소화하거나 개혁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진리의 원수인 사단의 방해와 공격이 또한 큰 변수로 늘 작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이 종교개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진리의 빛이 온전한 분량에 도달 할 때까지 계속 전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시작한 진리의 개혁은 그 후예들에게 와서 중단되어 버렸다. 중단은 후퇴를 뜻하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는 모든 진리가 회복되었을 때, 그리고 교회가 그 모든 진리를 회복한 후에 그 회복된 진리로 인하여 성결케 될 때에 그 끝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곧 하나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삐뚤어지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의 빛은 온전한 분량까지 전진되어 나가야 한다. 아직도 채 개혁되지 못한 채 감추어져 있는 진리들이 여전히 그 빛을 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교회가 준비될 때에, 그리하여 어린 양의 신부가 드디어 준비되는 때에 예수께서 신랑으로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야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전쟁에서 진리로 승리하시게 되는 것이다. 진리가 어두움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사실이 온 우주에 증명된 이후에 끝이 오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전기를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어두움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전기의 발명 이후에 인류는 밝음의 자유를 누리며 얼마나 많은 발전을 도모해 왔는가!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완전하게 다시 회복하는데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마지막 주자들이다. 개혁자들의 후예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과연 무엇일까? 교회를 성장시키어 큰 건물을 짓는 것일까? 현세의 정치 제재를 바꾸기 위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농성을 벌이는 일일까? 아니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자선하는 일에 온 정력을 기울이는 일이란 말인가? 물론 그러한 일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업은 교회의 사명에 있어서 지엽적인 일이다.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고수하고 가르치는 일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우선순위를 바꾸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믿음은 단순한 동의나 인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뛰어나가는 능동적인 삶 그 자체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는 이 시대적인 사명과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예수께서 곧 오실 것이다. 우리는 종교 개혁의 마지막 주자들이다. 우리는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하거나 듣게 될 때에 빛으로, 빛으로 전진해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이익이나 평판보다 하나님의 명예가 더 중요시 되어야 하겠다!
끝으로 1620년도에 청교도들을 미국으로 떠나보내는 마당에서 설교한 회중교회의 청교도 지도자 로빈슨 목사의 고별 설교 내용을 다시 음미해 보도록 하자!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제 곧 헤어지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기회를 주시든 아니 주시든, 저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책임을 부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