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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그리스도교의 성립과 발전 및 분열 과정의 약술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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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정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22 조회수331 추천수1 신고
형제님이 인용하신 글은 개신교의 사도성을 주장한다기보다....
가톨릭교회의 교회사안에서 가톨릭교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받은 이단종파들의 역사로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인용글이 너무 길므로 교회의 발전과 분열에대한 간략하지만 긴~~@@ 글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1. 기독교(그리스도교)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도 베드로 위에 설립이 되었고(마테16.17 이하),
성령강림 후 사도들은 힘차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강림 후 사도들은 각기 여러지역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등의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가서 교회를 성장시키고 로마에서 순교를 합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순교를 하셨으며,
토마스 사도는 동방지역을 거쳐 인도까지 갔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서 복음믈 전하였으며, 그리스, 고린토를 지나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각 지역(교구)을 중심으로 성장 발전을 하였으며
사도들 중 으뜸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로 사도가 로마에서 순교하셨고,
특히 로마교회(로마를 중심으로 발전한 교회)의 주교(사도들의 후계자)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였음에 다른 지역의 모든 지역 교회들로부터 맏형으로서 지위를 얻었으며 또한 모든 교회의 중심으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교회는 지역을 중심으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어느 시기던 어느 계층이건 누구나 보편적으로 믿을 진리라 하여,
기독교의 교회를 <가톨릭(보편)교회>라고, "서기 100년" 대부터 불러왔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의 서간 일곱편지 중
''스미나르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기독교교회는 가톨릭교회라고 부른다라는 진술이 나옴. 성 이냐시오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3대 주교, 안티오키아=안디옥 교회는 베드로에 의하여 건립된 교회임.) 
 
주 후 100년경에는 이미 
가톨릭교회가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교회 등 4개의 큰 지역교회로,
이단들과 투쟁을 하며 <사도로 부터 전해 받은 신앙>과
다른 신앙을 주장하는 집단 즉 "반삼위일체 신봉자"을 교회에서 쫓아 내면서 발전을 하였습니다.
 
2. 가톨릭교회의 중심은 <로마교회>였습니다.
이는 로마교회를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로마교회를 발전시키셨고 더욱이 로마에서 순교하셨으며
베드로의 계승자가 로마교회의 주교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의 주교를 보통 교황 혹은 교종이라고 부릅니다.
다시말하면
바울로와 베드로의 순교 위에서
또한 예수님이 직접 베드로에게 부여하신 <베드로의 권한 : 마태 16.17 이하, 요한 22장 이하 참조>에 따라
베드로의 사도직 계승자(로마 주교=교종=교황)들에 의하여 로마 교회가 존속하여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305년도까지 진행되었으나 306년도부터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는 중지가 됩니다.
그 즈음 로마제국안에서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는데 그 중의 중심인물이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반대자로부터 심각한 정치적 군사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 어머니 핼레나는 신자였습니다.
이 권력 투쟁에서 위기에 몰린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환시를 경험하는데 그 요지는 <십자가 표지로 너는 승리하리라>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기의 군대의 깃발을 모두 십자가 문장으로 바꾸고 반대자와 투쟁을 한 결과 승리하였습니다.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제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을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황제가 된 후 313년도에는,
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의 신앙과,
자신이 십자가 표지로 승리를 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기독교를 로마제국안에서 신앙 자유를 공식으로 인정>을 해 줍니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 공식적으로 공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는 황제로서 지금까지 행사하여온 황제의 권한, 자신의 제국안의 모든 종교들은 당연히 황제인 자신이 지배하여야 한다고 믿어왔으며 실제로 황제는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어 왔습니다.
하여
로마 황제는 로마교회의 주교(베드로직 수행 즉 교황)가 전체 교회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 로마주교(교황)에게 라테란 대성당(궁전)을 지어 선물로 주기도 하였지만
로마의 주교(교황) 역시 자신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황제의 모든 명령에 수동적으로만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교회(의 교리와 직제등)에 관하여서는 교황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중심인 로마교회의 태도와
또한 로마제국안의 원로원의 황제에 대한 비판과 견제에 대항하여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수도(서울)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황제의 도시라는 뜻임)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사는,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에 자리잡은 황제가 다니는 새로운 교회 즉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 황제의 보호하에 <전체 교회의 2위>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이제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공식적으로 국교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재는 임종시 그의 침대에서 기독교(가톨릭교회)로 개종을 하였고 기독교 신자로서 죽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를 비롯한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통일성 못지 않게 기독교(가톨릭교회)의 통일을 원했습니다.
 
3. 기독교안에서는 이미 사도시대부터 이단들이 나타났는바,
(요한 일서 이서, 바울로 서간을 보면 이미 이단들이 창궐하였고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해방된 후에는더욱 더 그 이단성을 드러내고 교회를 분열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럴때 황제는 자기 제국안의 종교적인 통일을 위하여 종교회의 열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종교회의(특히 세계공의회)는 로마주교의 승인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주교의 승인이나 추인이 없는 세계공의회란것은 기독교 교회사안에는 없습니다.
황제의 세계공의회의 개최 염원과 로마교회의 주교(교황)의 승인하에 기독교의 가톨릭교회는 여러차례 세계공의회를 개최하였는 바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 거듭 확인되고 선언된 세계공의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325년 니체아 공의회===>삼위일체교의의 확인 및 선언(반 삼위일체파 추방)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삼위일체 교의를 거듭 확인(반 삼위일체파 추방)
3) 에페소 공의회====>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확인 (네스토리우스 이단 추방)
4) 칼케톤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신조를 승인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교의를 최종적으로 확인 및 신조 선언.(단성론 이단 추방)
등등입니다.
 
이들 세계공의회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천주교회)는 물론, 정교회, 개신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 세계공의회입니다.
간략하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기독교의 기본 신앙(신조)이 확인 된 칼케톤 공의회때까지가 님께서 알고 싶은 질문의 요지로 생각됩니다.
이 후의 기독교(가톨릭교회)의 교회사는 아래에서 님의 전체 기독교의 발전과 분열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게 계속 설명해 드립니다.
 
4. 이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총대주교는 로마황제의 힘을 믿고 간혹 로마 교회의 주교(교황)에게 권위적 도전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교회간에는 감정적 앙금이 많이 싸여져 갔습니다.
또한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유럽(콘스탄티노플 교회)과 서유럽(로마 교회)에 위치한 고로 즉
지역적 차이로 전례(예배양식), 문화, 언어, 표현, 등등의 차이점을 보였습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이러한 표현력의 차이, 로마교회에 대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도전 등등이 쌓여 1054년도에는 상호 심각한 충돌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두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거쳐
두교회가 모두 참여한 1450년전후의 피렌체 연합 공의회 이후부터는 완전히 단절해 버립니다.
 
로마교회에 갈려 나간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그 총대주교의 영향을 받는 다른 동방의 많은 (가톨릭)교회들은 스스로 <정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신앙과 직분은 거의 같습니다. 서로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오늘에도 형님(로마교회), 아우(콘스탄티노플교회 등)하는 사이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서유럽의 여러 왕으로부터 많은 간섭과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왕들은 자기 나라의 정치의 통일을 위해서 기독교(가톨릭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왕은 하늘이 내린 자라하여 <교회의 성직자>들도 미음대로 세우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패를 제거하기 위해서,
교황은,
왕의 부당함에 대하여 싸웠기도 하였고, 그러나 대부분은 군사권력을 가진 왕에게 교황이 박해를 받거나 감금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흘려 들었던 교황하고는 좀 다르지요? "교황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모든 짓을 다하였다" 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거짓말이거나 과장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왕과 부패한 성직자들에 의해서 세속화 되어가자,
교회안에서 개혁을 위한 많은 성인성녀들이 출현하곤 하였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고 개혁되어져야 하는 법입니다.
 
그 사이에 많은 이단들이 출몰하였습니다.
이태리의 계곡에서 모여살면서 자기들만 구원을 받았다며 주장하였던 계곡파(왈덴스파) 이단
프랑스에선 자기들만 순결하다고 주장한 카타리이단
이런 이단들은 대부분 기존 교회를 마귀교회라 하고 자기들은 순결한 교회라 주장하였으며 천년왕국을 주로 신봉하였습니다. 이런 이단들은 주로 재침례를 주장하느 이단들입니다.
 
이런 이단들이 교회를 비방하고 저주하고자 뿌려대는 문건이
바로 형제님께서 질문하시기 위하여 인용해 오신 바로 그런 홍모물입니다.
이 문건은 안식교등의 이단들도 자주 사용합니다.
 
5. 16세기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다가 돈이 부족하자 건축 기금을 헌금을 받도록 하였는데,
프랑스나 스페인 영국 같은 나라들은 이미 정치가 중앙잡권화 되고, 교회안이 비교적 개혁되어 있었기에 헌금이 잘 걷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일 같은 나라는 그 당시에는 아주 미개국이 되어 사람들이 헌금을 걷기가 딱 좋은 나라였지요.
거기에서 일부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교황이 반포한 대사에 부여한 대사증서를 빙자하여
헌금을 긁어 모으기 위하여 혹세무민을 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사증서가  
<헌금을 내면 죄가 사해진다는 증서로 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면죄부>라고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면죄부>란 없습니다.
다만 죄를 회개를 하게되면 죄는 용서를 받더라도,
<벌>을 받아야 하는데, 특정한 지향을 가지고 기도, 자선, 순례, 헌금등을 하게되면,
<그 벌을 탕감해 주는>,
<면벌> 혹은 <대사>라는 것은 있습니다. 이의 원어는 <인둘젠시아>라고 합니다.
 
대사 은전을 충족하고자 하면
지정된 성당이나 특정 고해사제에게 고백성사를 실천하는데 
대사은전에 충족할 조건을 채웠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서를 발급해 줍니다.
이 증서를 오히려 헌금을 많이 하도록 유인하였던  
무식한 일부 사제들의 행위가 독일 일부 지방에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자 신부(사제)이던 루터 등이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나섰습니다.
 
참고
 
당대에 교황이 발표한 대사에서
대사를 채우려면
특정 성당을 순례하거나
자선, 고행, 헌금등등을 하여야 하며(가난한 이들에게는 헌금이 면제되었음) 
또한 일반 사제들이 사해줄수 없는 죄들을 고백하려면 교구장(혹은 교황)이 임영한 특정 사제를 찾아가야 하는데
이들에게 이 증서를 보여주면
대사 은전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믿고, 대사를 위하여 성당을 방문한 것으로 여겨
특정 성당을 개방해 주고 또한 특별히 임명한 사제들이 이들에게 고해성사등을 주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6. 독일에서는 루터, 프랑스에서는 칼빈(칼뱅), 영국의 녹스, 쯔빙글리 등등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교회 개혁을 위해서 등장하였으나,
사사건건 교회의 지도부와 마찰을 하였고, 하여 <교황에게 반항하였다>하여 후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이제는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루터에게서 루터교가 생겼으며,
캘빈, 녹스 등에게서 장로교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자, 교황에게 이혼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습니다.
이에 헨리8세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인연을 끊고, 영국안에서 수장령을 발표하여,
영국의 교회는 교황이 아닌, 영국의 왕이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영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하였고,
우리가 아는 유명한 사람 즉 유토피아라는 책을 저술한 영국의 제상 <토마스 모어>도 이때 순교를 합니다.
여하튼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때에 영국교회는 교황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성공회>로 됩니다.
오늘날 성공회는 가톨릭교회와 재일치를 위하여 <공식적으로 일치 위원회를 두고 노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 신부였던 J 스미스(1554-1612)가 침례교를 만들었으며,
영국 성공회 신부였던 웨슬리(1791년 사망)가 죽은 후 그 제자들이 미국에서 감리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기타 개신교에 속하는 많은 종파(오순절 종파 등등)들은 1900년도 전후에 미국에서 거의 생겨났습니다.
요약을 하면,
가톨릭교회에서 우선 정교회가 분리되었으나 서로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다시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가 분리되었습니다.
루터교나 장로교나 성공회나 감리교는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교회들이기에,
근본적으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유산을 모두 받아 고백합니다.

(성경, 신앙신조들 즉, 사도신경, 니체아 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칼케톤 신경 등등 이러한 신조문들은 믿음의 진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7. 루터와 중요한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요점
 
존 칼빈에 대하여

1. 칼빈은 1509년 북부 프랑스 <노와이온>시에서 태어났으며 루터와 달리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부유한 삶을 살았으며 또한 교육을 잘 받아 논리적인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철학을 전공하였고 문학사가 되었습니다.

칼빈은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여 루터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합니다만 루터의 신앙과는 어울릴수 없어 루터와 칼빈은 서로 갈라지고 맙니다.

2. 칼빈은 오늘날 장로교라면 모두가 읽는 다는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스위스 제네바에서 자기를 으뜸으로 하는 신정국가를 만들어 공포정치를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들은 자기들을 언행을 지적하고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교황을 두고 적그리스도니 뭐니 하였습니다만
그들 자신이 교황 못지않은 자리를 만들고 교황의 교황처럼 군림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개혁기 이후 소위 종교개혁을 주장한 사람들과 그 후계자들은 이상한 교리를 내세워 자기들을 교주화 하였고(특히 제침례교도들) 그런 짓들이 실패 한 후에야 전투대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들의 교를 전교하게 되었습니다.

3. 칼빈은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2) 무조건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 (Limin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table Grace)
5) 성도의 견인 (Persiverance of the Saint)

칼빈이 주장한 교리를 믿는 교회를 개혁교라고도 하나 보통 장로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장로교라 하면서도(칼빈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칼빈의 주장이 아니 것을 버젓이 신봉하는 장로교인들도 많아 보입니다.

4. 칼빈 역시 가톨릭교회의 기본 신앙들은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폐지하였고(루터는 미사를 유지하였음)
교회의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으며
교회의 성 미술 등을 우상이라 하며 폐지하였습니다.(루터는 유지)
위에서 언급한 5가지 교리는 우리와 좀 다릅니다 위의 교리는 "칼빈의 5대 강령"이라 하며 인터넷상에서 이 교리를 반대하는 많은 개신교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여 위의 교리는 자료가 풍부하므로^^인터넷에서 제 설명보다는 직접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한두줄로 설명을 할 성질의 교리가 아니기에 말입니다.^^)

쯔빙글리에 대하여

1. 쯔빙글리는 1483년도에 스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자는 사제서품을 받은 교구 사제였습니다.
당대 스위스는 용병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스위스의 용병 부대는 아주 용맹한 부대였다고 합니다.

쯔빙글리는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한 후에 이 제도를 반대함을 기치로 교회의 개혁도 부르짖었는데 가톨릭교회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2. 쯔빙글리는 가톨릭의 냄새가 나는 것들은 모두 없애버렸다 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개조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용병제도를 반대함으로서 교회 개혁을 내건 쯔빙글리가
스위스 안에서 가톨릭으로 남아 가톨릭신앙을 고수하고자 하는 스위스의 주들의 연맹과 전쟁을 벌리다가 죽었습니다.

3. 오늘날 반가톨릭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가톨릭을 비방하는 개신교 종파들은 쯔빙글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파들입니다.

4. 전반적으로 보면
종교개혁기에 활동하였던 종교개혁가들은 하나같이 개혁을 부르짖었으면서도
서로가 일치되지 못하고 갈라진 채 각자의 길들을 가게 되었습니다.
참고

청교도라 하면
영국에서 성공회가 확립이 되었을때 성공회를 반대한 가톨릭이나 장로교등은 모두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공회에서 침례교가 파생되어 비록 소수이지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성공회를 앞세워 영국 정치가 성공회 외의 교단들을 무자비하게 박해를 할 때 장로교와 침례교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지요.
이들을 "필그림 파더"라고 하며 "청교도"라고도 합니다.
이들에 의하여 미국 건설은 박차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 미국의 식민통치자로서의 영국인들(성공회신자들)도 미국으로 들어 옵니다. 물론 가톨릭도 이민 오지요.

하여 미국은
그 이래로 미국의 최고 시민자는 <백인 잉글란드인 개신교도며 성공회신자>들이 첫번째 계급을 이루게 되어 오늘까지 내려 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침례교가 성공을 하여 개신교안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19세기 이후 미국의 침례교에서 이단들이 특히 많이 출몰하기시작하였는데 안식교나 재림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 그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분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독립침례교 계통은 재침례교 계통으로 이들 역시 개신교에서도 안식교처럼 이단으로 단죄받고 있는 종파들입니다. 

여하튼 청교도란 영국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캘빈교도와 침례교도를 말합니다.
 
8. 참고로 루터교도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를 위해서 교회일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서로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감리교는 성공회 고교파(성공회에서 가톨릭신앙전승에 충실한 그룹) 출신인 요한 웨슬리의 감화에서 탄생을 하였기에,
가톨릭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닙니다.
침례교는 위의 개신교와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인정하는 <유아세례>를 부정한다거나. 침수례만을 주장한다거나 하는 것 등등.
 
참고로,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가 성직제도로 주교, 사제, 부제를 두고 있으며,
루터교에서는 사제라는 개념은 좀 희박하지만 비슷한 교직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대략,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들의 설립과정을 보았습니다.
 
개신교단들의 설립 혹은 창설과정은 위에서 보듯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의 개혁에서부터 시작(루터교, 장로교)하여,
신학적인 차이(특히 성화 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적 차이),
그리고 서로 사회를 바라다 보는 관점(사회 구원을 위한 투신 정도)에 따라,
혹은 다른 여러가지 이유등으로 인하여 분열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개신교안에서 세력이 큽니다만, 약 150여가지 장로교파로 분열이 되어 있으나 장로교 통합, 장로교합동이 전체 개신교안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감리교는 단일 종파를 유지해 왔으나 사이비 감리교도 존재합니다, 예수교 감리회라는 종파.

한국 침례교는 미국에서 온 남침례교 계통이라고합니다만 기독교참례회와 성서 침례교가 개신교 진영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기독교협의회 가맹교단(KNCC)과 한국루터회, 한국정교회 등의 10개 개신교단과 한국천주교회가 서로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하여 공식적으로 신학위원회를 창립하고 서로의 이해와 일치를 위해서 노력을 하기로 합의하였답니다.
 
기독교계 중 개신교안에서는 급격하게 핵분열을 하고 있는 경향도 있지만 전체 기독교계로 본다면 또한 서로 일치를 위하여 헌신하는 교단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치를 이룩하기 위하여 오늘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9. 가톨릭신앙(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이루는 핵심적인 신앙신경들과 사도신경등의 우리 교회의 핵심신앙교리)를 고백하는 개신교단들도 스스로 사도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러한 교단들은 대개가 가톨릭교회 즉 로마교회에서 로마교회의 지엽적인 부패에 대하여 개혁을 주장하며 등장하였다가 쫓겨났지만 
그 교단들의 신앙은 대부분 가톨릭신앙이므로 
자기들이야말로 부패를 없애고 신선하게 개혁된 초대교회적인 가톨릭교회라는 것이므로 사도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주장이 없다면 그들 교단들은 스스로 간판을 내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것을 근거로 
오늘날 가톨릭교회와 일치를 도모하고자 노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형제님께서 인용한 글의 교단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초대교회이후부터 교회에서 쫓겨나간 재침례등의 이단들과 근대이후 미국에서 발생한 안식교등이 포함된 개신교계통의 이단일 뿐임을 잘 인식하셔야 할 것입니다,
 
10. 사도성의 정통성은 온갖 미사여구로 주장한다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존재하였던 하나의 교회안에서 이루어진 사도적 직분(직제)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계승되어 오고 있는가?
초대교회에서부터 거행하여온 전례(예배)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계승되어 이루어지고 있는가?
초대교회에서 고백하였던 신앙들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고벡하고 있는가
그 신앙을 검증하고 그 신앙을 근거로 성경을 교회의 책으로 확정한 교회는 오늘날에도 위의 조건들을 충족시키고잇는가 등등이 면말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하나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보편된 교회로서  
사도들과 사도들로부터 계승받은 직분(직제)를 오늘날에도 계승해오고 있으며
수위사도인 베드로의 계승자에 의하여 초대교회에서부터 고백되어온 신앙과 전례와 직제를 원형대로 계승 발전시켜왔습니다.
 
교회사를 통한 역사성을 살펴볼때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방문서들은 그  자체가 거짓임이 드러날 뿐이라 믿습니다.   
 
 
사람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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