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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카톨릭은 왜 술 먹는데 관대한가요?? 그리고 연옥에 관한 부분은 성경에 어디 있나요??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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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해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7-11-15 조회수541 추천수1 신고
 

성서의 세계 : 술

 

 

성서의 땅 가나안은 인접한 시리아와 함께 ’물보다 술이 더 많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술이 풍부한 고장이었다. 지중해변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에서 술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주로 포도주를 가리킨다.

 

술의 용도

 

성서의 땅에서 임금을 비롯한 귀족들과 부유한 이들은 식사 때마다 포도주를 마셨다. 특히 포도주를 빵과 함께 마셨는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반주(飯酒)가 아니라 ’국’의 구실도 한 것이다. 곧 우리 나라의 ’밥과 국’처럼 성서의 땅에서는 ’빵과 물’ 또는 ’빵과 포도주’가 기본 음식이 된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보리)빵과 물’은 ’(보리)밥과 된장국’이고 ’(밀)빵과 포도주’는 ’(쌀)밥과 고깃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술을 특별한 계기에 마신다. 이 특별한 계기는 ’기쁨’이 그 특징을 이루는 때이다. 사실 술은 즐거움의 상징이다(시편 104,15). 포도를 수확하고 그 즙을 짜서 포도주를 만드는 일부터 기쁨의 환호 속에, 흥겨운 노래 속에 이루어진다(이사 16,10). 그리고 우리말의 ’잔치’나 ’연희’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자체가 본디 ’(술을) 마심’이라는 뜻을 지닌다(창세 21,8). 곧 모든 잔치나 연회에 술이 가장 중요한 음식이었다.

 

술은 선물로도 쓰인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선물하고(창세 14,18),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 나발을 죽이려고 오는 다윗에게 여러 가지 양식과 함께 술을 바치며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린다(1사무 25,18).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 건립에 필요한 나무를 베는 띠로 기술자들의 급료를 곡식과 기름과 함께 포도주로 지불한다(2역대 2,9). 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것이 국제 무역의 주요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에제 27,18).

 

물론 종류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포도주는 사람의 입이 느끼는 네 가지 맛의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즐기는 기호품이 되는 것이다. 포도주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 영양 섭취에 필요한 음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포도주는 에너지의 빠른 공급원일뿐더러, 피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철분과 생명 유지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주요 광물질을 함유한다. 그리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이러한 포도주가 강장제와 치료약으로도 쓰였다(2사무 16,2; 잠언 31,6; 루가 10,34; 1디모 5,23).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중요한 것, 하느님 덕분으로 자기들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분께 (도로) 바친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매일 바치는 제사를 비롯하여(출애 29,38-42) 온갖 형태의 전례 때에 다른 것들과 함께 술을 신주(神酒) 또는 제주(祭酒)로 바쳤다. 이렇게 술은 인간의 가정, 사회, 그리고 종교 생활【?큰 구실을 하는 주요 음식이었다.

 

술에 대한 평가

 

술은 물과 우유와 함께 인간의 삼대 음료로서(이사 55,1), 어떤 윤리적·종교적 반성이 있기 전, 이미 원시 시대부터 있어 왔다. 그래서 나중에 술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때, 그것을 우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평가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사악은 죽기 전에, 하느님께서 땅을 기름지게 하시어 곡식과 술을 풍성히 해주시기를 야곱에게 기원한다(창세 27,18). 이렇게 술은 다른 농축산물과 함께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진다(신명 7,13; 시편 104,5; 호세 2,10).

 

자기 포도나무 밑에서 그 열매와 거기에서 나오는 술을 즐기는 것은 평화와 행복의 상징이다(2열왕 18,31-32). 그것은 또한 장차 하느님께서 이루실 메시아 왕국의 표징이기도 하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사람마다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미가 4,3-4).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음주 그 자체에 윤리적·종교적으로 처음부터 어떤 부정적 가치 판단이 내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출애 24,9-11).

 

그렇지만 특정한 때에, 또 특정한 사람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 사제는 직무를 수행하러 성전에 가기 전에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레위 10,9-11). 특히 당시의 주변 종교들에서는 술에 취한 채 매우 관능적인 종교 의식을 거행하였다(이사 28,7-13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의 성전에서는 취기가 용납될 수 없었다. ’법적’으로 술을 멀리해야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또는 선택을 받아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이다. 물론 서원 기간이 끝나면 술을 다시 마실 수 있다(민수 6장). 이스라엘의 한 씨족인 레갑인들도 술을 멀리하였다(예레 35장). 이들은 선택된 백성의 이상적 삶이 옛 조상들의 생활, 곧 포도나무도 포도주도 없는 ’순수한’ 광야 생활로 구현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규정과 관습은 올바른 직무 수행과 이상적 삶에 술이 방해가 됨을 뜻한다. 성서는 술의 부정적인 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포도를 처음으로 가꾸었다는 노아는 술에 취하여 대낮부터 벌거벗은 채 잠든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가나안 땅이 저주를 받게 된다(창세 9,20-25). 처음부터 술에는 위험과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술이나 음주 자체가 아니라 절제 없는 과음이 단죄를 받는다. 특히 잠언은 과음을 집중적으로 경고한다. "술은 빈정꾼, 독주는 소란꾼/ 그것에 취하는 자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20,1. 그리고 21,17; 23,20-21. 29-35 참조). 지도자들에게는 금주도 권고한다. "술을 마시면 법을 잊어버리고 고통받는 모든 이의 권리를 해치게" 되기 때문이다(잠언 31,4-5. 그리고 집회 19,1-3 참조). 사실 예언자들은 백성의 지도층이 술을 과하게 마심으로써 직무를 유기하였다고 통렬히 비난한다(이사 5,11-12; 56,11-12; 아모 6,6 등).

 

술과 예수님

 

술에 대한 구약성서의 생각은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우리의 눈길을 먼저 끄는 것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대조적인 입장이다(마태 11,18-19). 요한은 나지르인의 전통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는다(루가 1,15).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특히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술자리를 같이하신다. 그분께서는 반대자들이 당신을 "술꾼"이라고 불러도 별로 개의치 않으신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꾸신다. 혼인에 복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잔치에 사용되는 술의 긍정적인 면을 최대한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술의 관계가 절정을 이루는 것이, 미사 때마다 재현되는 최후 만찬 중의 성찬 제정이다(1고린 11,23-26; 마르 14,22-24). 이로써 술은 그리스도교의 중심 전례인 성찬에서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우선,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인 성찬에서 (붉은) 포도주는 그분께서 흘리신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피를 상징한다. 성찬례는 또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형제 자매들이,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과 함께 영적 음식을 나누는 친교의 식탁이다. 그리고 이 전례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마태 8,11; 마르 14,25 참조) 대한 희망의 표지로서, 포도주는 그 잔치에서 마실 영원한 기쁨의 술을 가리킨다.

 

술과 그리스도인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술의 역기능을 무시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께서도 과음을 단죄하신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루가 21,34). 특히 바오로 사도는 술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한다. 주교를 비롯하여 교회에서 일하는 이들은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하고 과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1디모 3,3.8). 주님을 본받아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술에 취해서는 안될뿐더러(에페 5,18), 형제를 죄짓게 하는 위험이 있으면 아예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로마 14,21). 과음하는 이는 결국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합당한 구성원이 될 수 없다(1고린 5,11-13).

 

"제때에 술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은/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유쾌해진다./ 술을 지나치게 마신 자는 기분이 상하고/ 흥분하여 남들과 싸우게 된다"(집회 31,28-29). 술 자체는 인간에게 선물이고 음주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것은 과음이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가 신명기 21,20에 나온다. 패륜아를 다스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부모가 아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 "이 우리 아들은 … 방탕아이고 술꾼입니다." 하고 단죄하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아무도 처음부터 술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음주도 하느님 나라와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의 대원칙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술에 취하고 진탕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것은 이교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베드로 전서는 엄하게 경고한다(4,3).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1고린 6,10) 곧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로마 14,21) 필요하다면, 일시적이든 항구적이든, 술을 멀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임승필 요셉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2000년 7월호>

 ps. 형제님께서 천주교 신자와 신부님께서 술을 엄청많이 마신다고 그러셨는데 어떤면을 보고 그런말씀하신줄 몰라도 일부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테니까요.

 

 

연옥에 대하여

연옥 교리는 그 근거를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연옥이란 것에 대한 정의부터 정리합니다.
(연옥에 대하여 간혹 다른 생각을 피력하는 분들이 있어 보여서요^^)

((가톨릭교회교리서))

III. 마지막 정화 - 연옥

1030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1031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전혀 다르다.
교회는 연옥에 관한 신앙 교리를 특히 피렌체 공의회와( 피렌체 공의회, 「그리스 교회에 대한 교령」: DS 1304 )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트리엔트 공의회, 제25회기, 「연옥에 대한 교령」: DS 1820;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c. 30: 1580) 확정하였다.
교회의 전승은 성서의 어떤 대목들을(1고린 3,15; 1베드 1,7) 참고하여 정화하는 불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마태 12,32)이라고 진리이신 분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가벼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심판하기 전에 정화하는 불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어떤 죄들은 현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지만 다른 어떤 죄들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성 대 그레고리오, 「대화집」, 4, 41, 3: SC 265, 148(4, 39: PL 77, 396))

1032 이러한 가르침은 성서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관습에도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 성제를 드렸다.( 제2차 리옹 공의회, 「미카엘 팔레올로구스 황제의 신앙 고백」: DS 856)
그것은 그들이 정화되어 지복직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大赦)와 보속도 권한다.

그들을 도와 주고, 그들을 기억합시다. 욥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번제로 정화되었다면,( 욥 1,5) 죽은 이들을 위한 우리의 봉헌 제물이 그들에게 위로를 준다는 것을 왜 의심하겠습니까? 주저하지 말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고린토 1서 강론」, 41, 5: PG 61, 361 )

위의 가르침을 보면 우선 신약성서에서 3가지 인용이 나옵니다.
그 인용 귀절을 직접 봅니다.

((고린토전서 3장))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 그 기초 위에 어떤 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13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태 12장))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32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교리서에서 인용한 3가지의 성경 귀절입니다.
고린토 전서 3장의 해당 귀절들은 연옥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고 믿습니다.
연옥은 정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정화에 대하여서는 전통적으로 <불>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이 지옥의 불을 상징하는 유황불^^인지
연옥의 영혼은 은총의 지위에 있는 영혼이기 때문 성령의 정화를 위한 불인지지는 추측 가능한 것입니다만,
고린토전서 3장의 귀절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1장의 귀절 역시
믿음안에서 님을 위한 갖가지 시련을 겪음에 대해여서도 심판(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시에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아 연옥을 유추하게 해 준다고 믿습니다.

흔히 생각하듯
연옥영혼들은 비참하거나 불쌍한 영혼들이라기보다는
은총의 지위에 놓인 영혼들이므로
하느님을 직접 뵈오며 영원한 복락을 얻기위하여 정화중이기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연옥영혼 역시 복을 받은 영혼들입니다.
연옥의 정화는 단순히 잠벌(이승에서 지은 죄에 대하여 충분히 보속하지 못하여 그것에 대하여 남아 있는 벌)로서 영혼에게 고통만을 주기 위한 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벌은 벌이지만 영원한 복락을 주기위한 정화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베드로전서의 귀절도 타당성이 있어보입니다.

마태오 복음 12장의 말씀도
연옥에서 죄의 사함을 받는다기보다는
은총의 지위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잘못을 범하였을 때 용서를 받고 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 귀절은 연옥에 대하여 오해를 줄수도 있는 귀절로 보입니다.
연옥은 교리서의 가르침대로 <정화>를 의미하며
죄에 대한 벌의 의미(즉 잠벌이라는 의미)로도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죄를 사해 주는 곳을 연옥이라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가톨릭은 불신자들이 죽은 후 연옥에서 구원을 받게 해준다 라고 과장되이 떠드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 연옥의 성격에 맞아 보입니다.

((마태복음 5장))
5.  21"''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   25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 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26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연옥은 정화를 의미하지만 또한 이승에서 보속을 다하지 못해 남아잇는 벌을 받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태복음 5.26의 말씀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님이 인용하신 루가 12.59.의 귀절과 상통하는 귀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다 길게 인용하고 싶은 것도 있으나 그런 것은 신약성서를 통독해 보시면서 깨닫도록 하시고
잘 보면 신약성서에서도 이승을 떠난 신자들을 언급하는 귀절이 있습니다.

((디모테오후서 1장)
1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4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15절 그대도 알다시피, 피겔로스와 헤르모게네스를 포함하여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나를 저버렸습니다.
16 주님께서 오네시포로스 집안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빕니다. 그는 여러 번 나에게 생기를 돋우어 주었으며,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17 오히려 로마에 와서는 열심히 나를 찾아 만나 주었습니다.
18 그날에 주님께서 허락하시어 그가 주님에게서 자비를 얻기 바랍니다. 에페소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였는지는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18절을 잘 보시길 바랍니다.
그는 오네시포로스를 가르칩니다.
바울로 사도가 그를 언급하고 있는 그 시점에 오네시포로스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로의 편지를 보면 오네시포로스가 아직 지복직관(하느님을 직접 뵈오며 영원힌 복락을 누림)에 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오네시포로스가 자비를 얻기를 바울로는 기원을 하고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참고 ) 개신교 표준새번역성서

((디모테오후서 1장))
14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을 힘입어,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것을 그대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습니다.
16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빕니다. 그는 여러 번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17    로마에 와서는 더욱 열심으로 나를 찾아 만나 주었습니다.
18    그 날에 주께서 그에게 자비를 내리시기를 빕니다. 그대는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많이 봉사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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