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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금송아지상과 예수님 십자고상의 차이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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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26 조회수632 추천수4 신고

문의하신 금송아지상과 예수님 십자고상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1.사람이 맘대로 만든 것과 하느님이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의 차이이다. 

  금송아지상은 사람이 하느님을 형상 안에 집어넣어 제한시킴으로 우상을 만들어 낸 것이며

   이는 대죄에 해당되어 레위인에 의해 삼천명이 척살되었다. 반면에 십자고상에 계신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자신을 형상 안으로 제한하시어 오신 것이며 이는 신비이지만

  역사적 사실이고 성경적 진리이다. 즉, 금송아지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을 제한시키셨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이 제 멋대로 금송아지상을 만들어

  우상숭배하는 것은 대죄이지만,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역사적으로나 성경의 진리로나

  분명히 사람의 형상 안에 신비로 거하셨음을 부인해서는 안되겠다. 

 

2.예수님은 참하느님이심과 동시에 참사람이시다.

  강생의 신비, 구속의 신비, 부활의 신비를 거치시어 승천하시고 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재기도를

  해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신적위격만 지니고 계심에도 참사람이시기도 하다. 즉,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신 신인양성이시고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즉 신인양의를 지니심에도

  위격적으로는 하느님의 신적위격만 가지신다.  신적위격만 가지시는 이유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오신 것이지

  사람이 하느님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신과 인간으로 분리할 수는 없지만 구별할 수는 있으며

  아직까지도 예수님께서는 참사람이시기도 한 것이다.  사람의 형상 안으로 스스로를 제한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갈망(사랑)때문에 자신을 형상 속에 집어 넣으시고 강생의 신비를 베푸신 것이다.

  이러한 형상 안에서 33년 반을 사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육신적 형상은 우리에게 두가지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데, 하나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하느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 것이고 두번째는 대제사장(구약의

  멜기체덱과 아론이 신약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표임)이 되신 것으로서 하느님의 모든 요구를 유일회적으로

  십자가 희생제사를 통해 충족시키셨다. 이는 예수님의 성혈로 이루어진 용서와 그분의 죽음으로 치루어진 죄의

  삯으로서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은총의 샘이 되는 것이다.(성체성사의 신비)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자신의 인성을 드러내시고 어떤 때에는 신성을 드러내셨으며

  자신의 인간적 뜻을 분명히 가지고 계시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심으로써 인간적 의지와

  신적의지를 겸비하고 계심을 복음서에서 분명히 보여주시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3.천주성은 형상 안에 제한될 수 없다.

  조심할 것은 우리가 형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천주성(신성)을 제한한다면 이는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속성에 제한을 일으켜서 우상숭배자로 전락하는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상 안에 스스로를

  제한시키신 주님의 사랑(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어주심)을 깨닫는 것에 한정하여 주님의

  육신적 형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육신적 형상 안에 천주성을 제한시켜서는 안되겠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

  것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이므로, 형상 안으로 스스로를 제한하여 오신 참하느님이시자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한 부분(신성, 참하느님)만 보고 다른 부분(인성, 형상 안에 계셨던 예수님)을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이단에 빠져서는 안되겠다. 형상 안에 제한되어 시공간에 오신 성자하느님의 형상은 구원을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육신의 형상으로 오시어 십자가 구속의 신비를 완성하신

  주님께서는 육신의 형상으로 제한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는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심으로 죄인을 위한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전능하심 안에서 스스로를 사람의 몸으로 제한하시어 오시었지만, 우리는

  맘대로 주님의 천주성을 형상 안으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천주성은 문자나 형상을 포함한 시공간의

  어떠한 것으로도 제한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도 천주성의 신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성(하느님)에 관한 것은 우리의 상상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성경에 계시된 내용대로만 이해해야 한다.

 

4.부활하신 주님의 영화로운 몸도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육신을 지니셨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가지셨는데 이러한

  부활의 몸은 우리의 상상으로  형상 안에 제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을

  사람(제자,  막달라 마리아)들이 알아보지 못하였고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고 문이 닫혀있어도

  들어오셨으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시었기 때문이다.

  (비록 몸에 못자국과 창구멍을 지니시고 식사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현재에도 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재기도를 해주시고 또한 삼위일체의 분리되지 아니하시는 신비에 의해 성도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계시는 주님이시기도 하다.

 우리가 주님의 신성을 형상 안에만 제한시킬 경우 우리의 심령에 살아계신 신비로운 주님을 체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다(고린토1서 14장7절).

  이 때 "영이 되셨다" 라는  표현은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복음 4장24절)" 라고 말할 때 바로 그 영(천주성)

  되신 것이다.

 

5.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인간의 구원을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금송아지상은 하느님의 계시의 초보단계인 출애굽사건(약 3천4백년전)과 관련되어 천주성(신성)을

  인간의 상상에 의해 금송아지 형상 안으로 제한시키는 우상숭배의 대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그후 신약의

  계시로 넘어와서 스스로를 형상 안에  제한시키시어  사람의 몸(강생의 신비)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시기도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성경에 계시된 진리마저  외면해서는 안되겠다.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은 예수님의 형상(인성) 안에 신성의 모든 것을 제한시켜서는 안되고, 그러한 형상

  안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제한시켜 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는 다만 감사해야 하겠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자 하는 한 가지 이유로 하느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십자가  구속공로를 세우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를 세우시고 오늘날에도 구원으로 모든

  이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6.나무나 돌 등의 형상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금송아지상을 만들어 하느님을 형상 안으로 제한시킨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의 대죄를 물어 삼천명이

  칼로 쳐죽임 당하는 대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상을 만들어서 형상을 우상숭배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을 상으로 만든 것은 그 자체로는 우상숭배라고 할 수 없다.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상상으로 만들었을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역사적으로 실재하신 예수님을

   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형상 자체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듯이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형상) 안에 계시지 아니하고(사도행전 17장24절), 주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믿는 이의 심령 안에

  생명으로  살아계시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 있는 믿는 이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외적인  형상의 하느님을 흠숭하기 보다 내적으로 살아계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외적인 형상을 믿는 단계에서 내 안에 생명이 되신 하느님을 믿는 단계로 인도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러한 상태에 있는 믿는 이에게서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행이 나오게 된다.

 

위의 답변은 성경과 교리서(성상이나 성화를 만들어 표현하는 것은 교리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 그리고

개인적 묵상이 감안된 것이므로 만일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본 글의 내용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된 것임을 밝혀둡니다.개인적으로는 돌이나 나무로 뭔가를 만들어 마치 그 안에 신적인 무엇인가

라도 있는 것처럼 떠받드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생각함을 밝혀둡니다. 설령 그것이 예수님상이건 성모님상이건

성인상이건 천사상이건 간에 어떠한 형상 안에도 신적인 것은 없으며 단지 표현에 불과한 것(성물)이라 믿습니다.

성경 또는 성물등은 거룩하신 하느님(그리스도)을 표현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숭배하거나 특별한 신적인 의미를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고상을 볼 때, 우리를 위해 피흘리고 돌아가시어 그러한 진리를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연상하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십자고상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숭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만일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 안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만일 그러한 형상을 숭배하고

싶은 맘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일 것입니다.  

 

이하 임종연님의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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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성경 공부 하는 중에 궁금하여 질의하니 알려주세요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40일이 되도록 연락이 없자
이스라엘 백성은 겁이 나서
자기들의 불안감을 없애고 공허감을 매워 주는 해결책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상으로 금송아지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훼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첫째 계명을 깨뜨리는 행위로
하느님을 진노케 하고 큰 벌을 받습니다.
오늘날 성당안에는 예수님 성상이 있는데,
탈출기에 나와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만들지 말라는 그 하느님의 모습과
오늘날의 성당안에 있는 예수님의 성상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요?
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은 큰벌을 받았는데
하느님이신 예수님 성상을 만든 오늘날 우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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