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비신자들 중에는 무신론자에서 입교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 흔한 개신교에서 대충 성경 글귀나 목사의 가톨릭 비방에 선입견을 갖고
나름대로 성경 지식을 가졌다고 하면서 가톨릭에 입문을 하여 교사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종종 봅니다.
우리 가톨릭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인 성화와 성상을
우상숭배 한다는 것에 대해 역사적인 시각에서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잘못 왜곡된 진실을 바로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화와 성상
성상 제작 풍습은 고대 유다 민족 사이에서는 오늘날처럼 성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상숭배의 경향이 짙은 당시 유다 민족에게, 또는 지리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 민족에게 둘러쌓여 있던 유다 민족에게는 성상공경의 본뜻에 대한
오해가 일어날 우려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도 성상 제조와 이방인들에게 그것을 공개하기를
매우 조심했었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성상이 이교도의 우상과 혼동될까 우려하였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가톨릭 내부에서는 신앙에 관한 상징적인 것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초기 3세기 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밀회소인 로마 카타콤바의 유적을 보면
성령의 상징인 흰 비둘기를 그린 벽면과 유리병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거기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형상과 어린 양을 메신 그의 형상을 새기기도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상징인 어린양과 믿음의 표시인 닻 모양과 교회를 의미하는
큰 배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성상에 대한 최초의 반대자요 폭행자는 8세기의 콘스탄티노플 황제 레오 이사우리안입니다.
레오는 예수 성화와 성인들의 성화를 성당 벽면에서 철거하여 불사르라 명하고
성당에서든 집에서든 성화와 성물을 강탈하고, 금, 은, 동, 철제 성상을 깨뜨려
자기 초상을 새긴 화폐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헨리8세와 크롬웰처럼 겉으로는 신앙의 순결을 외치면서 이면의 동기는 탐욕으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레오 황제는 황궁도서관 학자들에게 그 성상 파괴 칙령에 대한 찬사를 쓰라고 명하였으나
정의의 양심을 지닌 그들은 거절하였습니다.
레오는 몹시 화가 나 그들을 도서관에 가두고 불질러 버렸습니다.
삼만 권의 책과 귀중한 그림들을 지닌 도서관은 그 안에 감금된 석학들과 함께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다음 황제 콘스탄티누스 코프로니무스도 부친 레오의 만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당시 용감한 수도자 스테파노는, 황제의 초상을 새긴 동전 한 닢을 내밀며
"폐하,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라고 묻고는 "짐의 초상이다."라는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것을 내던지고 짓밟았습니다.
수사는 즉각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형장에서 그는 황제에게 "아, 내가 한 국왕의 모습을 모욕하여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태워 없앤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
라고 하였습니다.
성상 파괴의 독성 행위는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자들도 저질렀습니다.
특히 영국, 독일, 네덜란드에서 성화와 성상을 난폭하게 파멸하는 독성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 방지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8세기의 성상 파괴자들이
성상의 금은을 욕심냈듯이, 16세기의 성상 파괴자들도 성상과 성화를 없애고는
성전을 온통 점유해 버렸습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수많은 개신교 예배당 중에는 당시 점거한 가톨릭 성당
그대로의 것도 많습니다.
유명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그 좋은 예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교회의 벽면에는 파손된 성상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만행은 다만 극도의 독성죄가 될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러한 만행이 남부 유럽에까지 침범하였더라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불후의 대작들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상에 대한 가톨릭 교리는 트리덴티노 대공의회에서 명백히 선언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상과 그 동정 성모와 성인들의 성상을 모시며,
특히 성당 내에 모시는 것이 옳다.
또 모든 성상에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이는 성상자체에 무슨 신성이나 덕능이 있어서가 아니며.
또 성물 자체에 무슨 기도를 드리려 해서가 아니다.
일찌기 이교도들이 우상에게 무슨 희망을 두듯이,
성상에게 무슨 미신적 신뢰를 두어서가 아니다.
다만 성상이 상징하는 대상에게 존경의 뜻을 표시할 뿐이다.
즉 우리가 성상에 입맞추거나 그 앞에서 모자를 벗거나 무릎을 꿇는 것은
그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성모와 여러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Sess. XXV)
가톨릭 신자치고서 이교의 우상과 가톨릭의 성상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이교인들은 우상 자체에 무슨 신적 영험이 있거니 하고 그를 숭배하므로
그야말로 우상숭배 행위가 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누구든지 성상 자체에는
아무 지성이나 도울 능력이 없음을 잘 압니다.
다만 하늘에 실재하시는 하느님과 성인들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할 뿐입니다.
여기 개신교 신자들을 위하여 말하려 하는 바는 성상 공경에 대한 개신교 학자
라이프니츠(Leibnitz)의 의견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비록 성상을 공경한다 하나 이는 무령무각(無靈無覺)한 상물(像物)을 공
경함이 아니고, 트리덴티노 공의회의 선언과 같이 다만 그 표상하는 존재에게의
공경일 뿐입니다.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성상에 대하여 그리스도
자신께 대한 공경과 동일한 공경을 드린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다...
우리는 성상을 통하여 더욱더 주 예수의 존재를 감각하고
주의 사정을 더욱 깊이 명상하게 되는 까닭이다.
성상에 대한 근본 관념이 이러한 이상, 미친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성상에게 ’상물이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목석(木石)이여,
당신께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는 자가 있겠는가.
신자의 바른 기도는 ’주여, 나는 주를 경배하나이다.
주께 감사하며 찬미의 노래를 드리나이다’하는 것이다.
그런즉 그 상징하는 존재에게 공경하지 않는 성상 공경은 없으며,
그 본뜻에 있어서는 하느님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타내는 존경과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이름도 하나의 표지이지만 표상 효력에 있어서는 상물만큼 직감적일 수 없으므로
상물에 비하여 표상가치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상 공경은 ’예수의 이름 아래는 모든 이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또는 ’주의 이름은 복되시도다’ ’주의 이름에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하는
거룩한 이름에 대한 경의 표시와 같은 취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형의 성상에 대한 경의표시와 무형의 내적 형상에 대한 경의 표시는
서로 다를 바 없다. 유형의 성상은 내적 심상의 물적 표현일 뿐이다"
(Systema Theologicum p.142)
하기야 라이프니츠의 이 말도 논리 정연한 것이지만 나는 여기에 좀더 명백한
설명을 붙이려고 합니다. 약 20여년 전 이탈리아 군인이 프랑스 국기를 모욕하였을 때,
프랑스 정부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욕당한 것은 하찮은 헝겊 조각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작은 헝겊 조각 때문에 그처럼 분개하여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였었던 것입니까?
어느 나라 국민이든 자기 나라 국기 앞에 경례를 합니다.
그런데 이 것이 국기가 표시하는 조국에 대한 경례가 아니고
그 국기를 만든 자료인 헝겊이나 색깔 자체에 대한 경례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 국기에 대한 모욕은 헝겊이나 색깔 자체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 국기로 표시되는 그 나라에 돌아가는 것이며,
국기 앞에서의 경례 역시 그 나라에 대한 경례라면,
오직 성상 앞에서의 경배만은 성상의 재료인 대리석이나 석고에 대한
경배로 규정짓는 이유는 대체 어디있다는 말입니까.
무릇 표시 행위는 ’말’로도 할 수 있고 ’글자’나 ’그림’이나 ’형상’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표시는 ’이순신’이라는 말이나 ’글자’로도 할 수 있고 그의
’초상화’나 ’동상’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
말’이나 ’글자’나 ’초상화’나 ’동상’이
표상하려는 그 자체는 물론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송하리라" (시편 43장 9절),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필립 2장 10절)
등의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말이 ’예수’라는 이름 그 소리 자체를 공경하라는 말이겠습니까.
그 소리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라는 말이겠습니까. 그
렇지 않으면 그 이름으로 표시되는 주 예수를 공경하라는 말이겠습니까.
어느 것이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통하여 그를 공경할 수 있다면, 그의 성화나 성상을 통하여
그를 공경할 수 도 있지 않겠습니까.
라이프니츠의 "유형의 성상에 대한 경의 표시와 무형의 내적 심상에 대한 경의
표시와는 서로 다를 바 없다"라는 말은 적절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에는 그 형상이 우리 머리 속에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 법입니다.
이를 내적 심상이라고 합니다.
내적 심상이 없이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형상이 어떤 식으로든지 머리 속에 나타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적심상 역시 결코 실물 자체는 아니고, 오직 그 실물의 한 표시일 뿐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내적 심상과 외적 표상, 즉, 말, 글자,
그림, 동상이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누구를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합니다.
이는 곧 그에 대한 내적 심상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정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나 미움은 그 내적 심상으로 표시되는 인물에게도 돌아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치의 말은 "그리스도 성상 공경 행위는
곧 그리스도 자신에게의 공경 행위와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그 내적 심상 앞에 공경을 드림이 허용된다면
또한 그 외적 형상 앞에 공경을 드림도 허용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 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출애굽 20,3-4)
이 구절을 개신교신자들은 모든 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와 해석을 달리하여 그는 어떤 상의 신격화를
금하는 계명이라고 합니다.
즉, 조상(彫像) 제작의 무조건 엄금이 아니고, 다만 이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행위를 금한 계명이라 합니다.
이 계명은 결코 조상의 제작을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여러 곳에 이를 금지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제작을 명하였으니
절대 금지란 안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순을 행하실리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순금으로 거룹 상을 둘 만들라고 하셨고(출애굽 25, 18 참조)
또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매달아 두면
뱀에 물린 자라도 그것을 보면 죽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수 21,8 참조)
거룹은 하늘의 천사이며 뱀은 땅과 물 속에 사는 양서 동물이니까,
이 거룹의 금상과 뱀의 동상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밑 물 속의 것의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만일 무조건 절대 금지라는 개신교 신자들의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모두 첫째 계명을 어긴 죄인이 될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든지 산 자나 죽은 이의 초상을 걸어두지 않은 집은 없습니다.
산 이의 초상은 ’땅 위의 것’이고 죽은 이의 초상은 ’하늘의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성 요한 다마세도(754년)는
"유대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경향이 심하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미신의 오류를 면하고 진리를 알게 되어
하느님을 모시고 오직 그 분께 흠숭지례를 드릴 줄 알며,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더 완전히 풍부히 가졌으므로
어린 시대를 지나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유치원생이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식별 능력을 받아,
형상 표시의 가능 불가능도 알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언젠가 개신교의 목사 한 분이 그의 가톨릭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 : "당신은 성상에 기도를 하지요?"
친구 : "우리는 성상 앞에서 기도를 하지만, 성상 그 자체에 기도하는 의향은
도무지 없소."
목사 : "그러나 속으로 가진 그런 의향을 누가 알아주나?"
친구 : "여보, 당신은 밤에 자리에 들 때 기도하지 않았소?"
목사 : "안할 수 있나? 침상 앞에서 하지."
친구 : "그렇지요, 침상 다리에 대고 기도하지요?"
목사 : "이 사람, 그럴 수 있나? 나는 그런 의향은 조금도 없네!"
친구 : "그러나 속으로 그런 의향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아 주나?"
목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도덕적 행위는 그 품은 의행을 살피지 않고는 결코
그 선악 사정의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톨릭 신자는 우상 숭배자라는 선입견을 품은 이가 많습니다.
성당 안에서, 길에서나 성상 앞에서 하는 가톨릭 신자의 기도 행위를 보고는
곧, 자기의 선입견이 적중했다고 속단하여 "가톨릭 신자는 과연 우상을 숭배한다"고
선전합니다.
이런 피상적 속단의 태도를 버리고 모름지기 그에게 나아가 기도의 정신을 물어보십시오.
그는 솔직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성상은 산 존재가 아니니까 내 기도를 들을 수 없다.
또 나를 도울 능력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앞에서 그가 표상하는 원존재에 대한 존경심을 더 깊게 할 뿐이다."
성상 공경을 반대하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개신교 신학자의 저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롯이 두 천사 앞에 꿇어 엎드린 것은 고귀한 손님에 대한 경의의 표시요 (창세 19,1 참조),
야곱이 에사오에게 경례함은 윗사람에 대한 아랫 사람의 복종의 표시요 (창세 33,3 참조),
솔로몬이 바쎄바에게 경배함은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효성의 표시이며(1열왕1,19 참조),
나단이 다윗 왕에 엎드림은 국왕에 대한 신하의 복종의 표시오(1열왕 1,23 참조),
사람이 하느님 앞에 엎드려 기도함은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흠숭의 표시다.
이런 모든 행위를 경배 혹은 흠숭이라 하나 그 행위의 정신을 살펴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참 뜻의 소재를 알 수 있다.
왕 앞에 엎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자라고 비난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일 한 조상 앞에 엎드렸다면 비록 그 동작은 이는 우상 숭배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의 행동이 우상 신격화의 의사를 표시한 까닭이다.
그러면 성인에게나 성물에 대한 가톨릭 신자의 경의 표시 행위는 어떠한가.
성인의 성상이나 성물 앞에서의 그들의 경의 표시 행동은 하느님께 흠숭례를 드리는
행위와 비슷하나, 그는 결코 우상이나 성물을 하느님으로 알고 경배한 것은 아니다.
어찌 가톨릭 신자들을 우상 숭배자라 할 수 있겠는가"
(Encyclopedie, Edit, d’Yverdun, tom, I, art. Adorer).
몇 년 전 교육계의 은인인 모씨(某氏)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제막이 되자 그의 웅자(雄姿)가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 관중은 본능적으로 모두 모자를 벗었습니다.
한 신사가 옆에 있던 개신교 신자에게 농담으로
"여보게, 모자는 왜 벗나"하였습니다.
"저 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벗었네."
"그러나 그는 여기 있지 않고 저기 보이는 것은 그의 동상 뿐이 아닌가."
"물론 그렇지만 나의 행위는 본인에 대한 경의 표시일세."
동상 앞에서의 탈모 행위는 나무라지 않으면서 성모 마리아나 성 베드로 상 앞에서
모자를 벗는 것을 보면 그것을 우상숭배행위라고 비난하는 이가 많으니,
이는 또 무슨 까닭인지....
다윗과 솔로몬은 야훼의 궤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하였습니까.
"오베디돔의 집에 하느님의 궤를 모셔 두었기 때문에... 다윗 왕은 너무나도 기뻐
하느님의 궤를 오베데놈의 집에서 자기 도성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
다윗은 살진 황소를 잡아 바쳤다" (2사무 6,12-13)
"솔로몬 왕은 자기에게 모여 온 이스라엘 회중을 이끌고, 궤 앞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과 소를 제물로 잡아 바쳤다."(2역대 5,6)
그러나 계약의 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와
계약이 새겨진 석판들이 들어 있었습니다"(히브리 9,4)
물론 그들의 행동만을 보면 우상 숭배 처럼 어떤 특정 물건에 공경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과 그 밖의 제사장들이 그 물체가 표상하는 하느님께 경배하지 않고
그 특정 물체에 경배, 즉 우상 숭배를 하였다고 단언한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주 예수의 성상 앞에서의 경배 행위를 우상 숭배 행위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 참으로 기괴한 일입니다.
787년에 개최된 제2니체아 공의회에서도 트리덴티노 공의회와 같이 성상 성화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감도를 받은 우리 교부들의 지도와 가톨릭 교회의 우리는
(성령이 이 안에 기묘히 계심을 아노니) 성전(城傳)을 따라 상본(성화)...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본과 흠 없으신 하느님의 모친과 공경하올 천사들과
성인 성녀들의 상본을, 성당이나... 가정에 적당하게 모심은 확실히 거룩하고
좋은 일임을 선언하는 바다...,성화 성상의 공경은 그 표상하는 원존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바로 그로써 표상하는 이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열교인을 따라 달리 생각하거나, 달리 가르쳐 교회의 성전을
경천(輕賤)히 여기거나, 새 교리를 주창하거나 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존중히
여기는 복음 성서, 십자가, 상본, 순교자의 유해 등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성직자인 경우에는 파면당할 것이요, 수도자나 평신도인 경우에는
통공(通功)에서 제외되리라...."
그 밖에 초대 교회에 명성이 쟁쟁하던 테르툴리아노, 성 바실리오,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제노, 성 그레고리오 니싸,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바울리노 놀라노 등 석학들의 이에 대한 증언은 생략합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성상 성화가 우리에게 주는 이로움에 대하여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성화는 하느님의 성전을 성전답게 장식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2. 성화는 문맹에게 도움을 주는 해설 자료가 된다.
3. 집안에 성화를 모시는 것은 곧 감명 깊은 무언의 신앙 고백이다.
4. 성화는 그 대상에게 우리의 심정을 집중심켜 그에 대한 애모의 정을 더욱 열절케 한다.
5. 성인의 성상은 우리를 자극하여 그의 덕행과 위업을 본받게 한다.
1. 성화는 하느님의 성전을 성전답게 장식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성당은 하느님의 성소(聖所)입니다.
요한 사도가 묵시록에(21,2) 아름답게 서술했듯이, 하늘나라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표상인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성전을 거룹 천사의 성상과 그밖의 표상물로 장식하였습니다.
천사상은 금을 입히고 성전 안팎의 바닥도 금을 입혔습니다.(1열왕 6,28-29 참조)
주님의 궤를 모셨던 솔로몬의 성전을 이토록 성대하게 꾸밈이 마땅하다면
주께서 친히 와 계신 하느님의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얼마나 더
마땅한 행위이겠습니까.
성당 장식이 잘 된 것을 볼 때 이 곳에 주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될 것이요,
또 그것이 주께 대한 지극한 정성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솔로몬 왕의 영화의 극치도 백합 한 송이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인류가 살고 있는 대자연도 그만큼 화려하거늘, 하물며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당은
더욱 아름다움의 정화를 다하여 아름답게 장식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세상에서 사실 때 지극한 효성으로 대하셨던 성모 마리아와 여러 사도들과
모든 성인들의 초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소(至聖所)를 아름답고 거룩하게
장식함이 어찌 경건하고 지당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자손이 그 조상의 초상을 집안에 모시고 대대로 그 유적을 추모하듯이,
온 세상의 가톨릭 교회 자손들도 그들의 인자하신 어머니 마리아와
역대 성인의 초상을 주임의 성전 안에 모시고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길이 기념합니다.
2. 성화는 문맹에게 도움을 주는 해설 자료가 된다.
국가와 종교 단체가 교육 사업에 힘쓰지만 아직도 인류의 많은 수가 문맹입니다.
학자들이 독서로 얻는 지식을 문맹인들은 그림으로 해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종교 성화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교 교리를 몰라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할 문맹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영국의 사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처음 에델버트 왕 앞에서 복음을 강론할 때
은 십자가 한 개와 주 예수의 성화 한 장을 앞에 놓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눈으로 보는 성상과 성화가 귀로 듣는 설교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왕에게
주었습니다.
동양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도 성상과 성화로 많은 인도인을 참된
종교로 개종시켰으며, 드 스메 신부도 같은 방법으로 록키 산속의 야만인들을
개종시켰습니다.
3. 집안에 성화를 모시는 것은 곧 감명 깊은 무언의 신앙 고백이다.
실내 장식으로 주인의 기품과 성격을 알 수 있듯이, 실내에 십자가가 모셔져
있으면 예수께 대한 주인의 신앙을 알 수 있으며, 또 이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의 대외적 용기의 표시도 됩니다.
4. 성화는 그 대상에게 우리의 심정을 집중심켜 그에 대한 애모의 정을
더욱 열절케 한다.
무릇 그림보다 더 직감적 영향을 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수난을 고통스러워하시는 성모의 성화를 보고
감동하지 않는 마음이 어디 있으며, 십자가의 길 성화는 얼마나 많은
열애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묵도로 걷는 노부인의 애통해 하는 표정을 보십시오.
주 예수의 뒤를 따라 골고타 산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의 모습은
마치 파노라마와도 같이 추억과 애모의 엇갈림으로 그 마음에 불멸한 인상을 줍니다.
주님의 수난에 대한 아무리 열렬한 설교라고 열애와 통회를 자아내는 데는
말 없는 한 개의 십자고상을 도저히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5. 성인의 성상은 우리를 자극하여 그의 덕행과 위업을 본받게 한다.
성상을 모시도록 장려하는 교회의 근본 취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상을 모시는 목적은 물론 그 표상하는 성인 공경에 둔 것이지만,
그의 거룩한 일생을 본받으려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산 위에서 너에게 보여준 모양대로 만들어라"(출애 25,20)라고 하셨듯이,
경건한 인간이 되게 하는 데는 성인의 모범을
들어 이를 따르게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실내에 걸린 위인의 초상이 소년의 마음을 자극하여 그를 본받게 하듯이,
자나깨나 늘 보는 성인의 초상은 청소년에게 무언의 감명을 부어 간절히
그를 본 받도록 격려하여 줍니다.
얼마동안 각종의 부정한 그림과 조각 등이 널리 퍼져 청소년을 타락의 구렁에
몰아 넣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독니에 물려 그렇게 타락하였습니다.
해독을 주기 위하여 사탄도 이렇게 사람의 시각을 통하여 교묘히 자극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손을 성화(聖化)하기 위하여 성상과 성화로 경건하게
그들의 시각을 자극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악마들이 인간의 눈을 멸망의 기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어찌하여 이 눈을 성화의 도구로 쓰지 않으려 합니까.
화가의 붓과 조각가의 끌은 결코 악마적 비루한 작품 제작에 악용되지 말고,
마땅히 인류의 윤리 생활 고양을 위한 종교의 사용 기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그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시각을 통하여 밖으로부터의 무수한 인상을 받아들입니다.
무수한 인상은 그 대상의 성질에 따라 도덕에 유익한 것도, 해로운 것도 있습니다.
성당에나 가정에 성화를 모심으로써 받는 영적 이익은 실로 큰 것입니다.
성화를 보면 곧 의인을 대하고 있는 분위기가 되어 우리 마음을 정화 향상시킵니다.
최근에는 개신교도 성상을 모시는 의의를 차츰 깨닫는 듯 합니다.
이를 우상숭배라고 혹평하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는 듯도 합니다.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다는 것처럼 스테인드글라스에 성화를
그려 넣기도합니다.
2천년 동안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상과 성화로 영적 성장을 가져 왔습니다.
개신교에서도 구원의 표지를 우리 가톨릭교회와 같이 공경할 뿐 아니라,
마침내 우리와 하나가 되어, 동일 제대 앞에서 하느님을 흠숭하게 될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아예 십자가조차도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 형제들이 성화와 성상에 대한
이해를 깨닫고,다른 개신교도들과 함께 성모님과 성인들을 공경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바랍니다.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의 ’The Faith of Our Fathers(교부들의 신앙)’에서
일부 발췌 편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