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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103위 성인중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이형( 라우렌시오)성인에 대해서 아시면....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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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수근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06 조회수407 추천수0 신고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
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 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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