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대는 시골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상경, 서울에서 자랐으며 17세때 혼 담이 있었으나 수정(守貞)을 결심하였고, 부모의 혼인강요를 뿌리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 아 혼담을 중지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를 겪은 다음 부모는 냉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간 궁녀생활 을 하였다. 대궐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 궁궐을 나와 홀로 살면서 기도와 교우들을 위한 봉사에 노력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때 체포되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화관을 쓰 게 되었다.
김유리대는 시골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상경, 서울에서 자랐으며
17세때 혼 담이 있었으나 수정(守貞)을 결심하였고,
부모의 혼인강요를 뿌리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 아 혼담을 중지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를 겪은 다음 부모는 냉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간 궁녀생활 을 하였다. 대궐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 궁궐을 나와 홀로 살면서 기도와 교우들을 위한 봉사에 노력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때 체포되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화관을 쓰 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를 겪은 다음 부모는 냉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간 궁녀생활 을 하였다.
대궐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 궁궐을 나와 홀로 살면서
기도와 교우들을 위한 봉사에 노력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때 체포되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화관을 쓰 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