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째 가톨릭 신자 집안 출신인 박영식 총장은 “두세 살 무렵 ‘신부가 되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한 것이 사제가 된 이유”라고 말한다. 신동연 기자 |
가톨릭 최고 권위의 교황청 성서위원
올해 개교 154주년을 맞은 가톨릭대학교의 제5대 총장으로 1월부터 일하고 있는 박영식(55) 신부가 바로 그런 권위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교황청 성서위원에 임명됐다. 교황청 성서위원 20명은 성서에 대한 가장 전문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수재 중 수재’들이다.
박 총장은 영어·독일어·라틴어·아람어 등 12개 언어에 능통하며 1985년부터 61권의 저서와 역서를 냈다. “여러 가지 책을 동시에 구상한 덕에 한 해 동안에도 몇 권씩 낼 수 있었다”는 게 박 신부가 말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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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사제 서품을 받은 박 총장은 압구정동교회 보좌신부, 김수환 추기경 비서를 거친 후 87년 교황청 성서대학에 입학해 성사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 총장을 8일 부천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총장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문화적 다양성의 시대에 가톨릭 교회가 지향하는 보편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보편성을 획일성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는데요.
“가톨릭(Catholic)은 그 단어의 뜻대로 보편성, 포괄성, 포용성, 넓은 마음을 지향합니다. 다문화적 환경 속의 국제화 과정에서도 가톨릭적 세계관은 빛을 발합니다. 국제화는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너와 내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관습·가치·언어·습관 등 각종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가톨릭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획일성이 불가피한 것은 아닙니까.
“62~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인, 문화의 차이에 대한 성찰이 깊어졌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론’은 세례 받지 않은 경우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논의를 전개합니다. 외진 숲 속, 외딴 섬에서 정말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알 기회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불가피한 이유로 세례를 받지 못했더라도 하느님의 창조 질서대로 살아가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식의 지평이 열렸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무엇이 구원입니까.
“보다 근원적인 구원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악이나 잘못에 빠진 상태에서 끄집어 내는 것은 아주 좁은 의미의 구원입니다. 야훼는 구원이신데 이집트 종살이에서 빼내 주신 것은 구원 사업의 일부일 뿐입니다. 히브리인들을 종살이에서 빼내서 이집트 국경에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신(神)에 대한 관념도 진화하거나 강조점이 달라집니까.
“그리스도교의 경우 구약 시대 히브리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이 아니라 함께 사는 구원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아버지·자매는 ‘함께 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입니다. 나이가 들면 ‘어버이가 나와 내 형제 낳으셨구나’하는 ‘창조 개념’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면서 비로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늘 하느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도 야훼, 함께 있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고 하느님이 자신들 외에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게 아니라 이집트나 바빌론의 압제에서 구원받는 것, 지옥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즉 무엇인가로부터 구원받는 게 보다 절실하고 피부에 닿는 구원 같습니다.
“그것은 성서신학적으로 보면 잘못된 인식입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성서적 개념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곧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어디에서부터’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서가’ 더 중요합니다. 출발지가 아니라 종착지가 중요합니다. 종착지는 약속의 땅, 하느님과 함께 사는 땅입니다.”
-그런 구원의 개념에서 보면 예수가 빠진 게 아닙니까. 구원의 역사에서 예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하느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일러 준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에게도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빼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가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구원받는 그 현장에 말씀이신 예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문서화된 것이 율법 혹은 오경으로 이해되는 토라입니다. 신약에선 말씀이 사람이 돼 우리 가운데로 오십니다. 인격화된 말씀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는 인격화된 하느님 말씀
-예수의 등장으로 구원이 뭔가 달라지거나 뭔가 뚜렷하게 됩니까.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 사는 거겠죠.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이 말씀으로 또 율법으로 인간 가까이 계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하느님이 이제는 사람이 돼 인간과 함께 사십니다. 그렇게 된 다음엔 우리의 삶에서 예수를 절대로 배제할 수 없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해야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모여 있는 곳에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하는 생명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집트에서 이스라엘까지 가는 데 얼마 안 걸립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에 가는 데 40년이 걸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그렇게 손쉬운 것일까요. 우리의 온 인격을 투입해 철저히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요. 구약에서 보면 고통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하느님에게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임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하느님이 참 좋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원수가 아니라 형제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눈을 뜨는 그 순간 그들은 할렐루야, ‘너희는 모두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여라’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나 행복은 아무런 어려움도 고통 없이 얻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생각한다면 고통이 없는 예수를 원할 수 없습니다.”
-영성(靈性)과 지성(知性)은 어떻게 다르며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합니까.
“영성은 살게 하는 것, 생명을 주는 것, 뜻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성은 어원이 ‘여러 가지를 읽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지성은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정보와 정보,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 사이에 뭐가 있는지 따집니다. 영성이 통합적이며 무조건적이라면, 지성은 분석적이며 조건적입니다. 나누고 분리하는 지성과 포용하고 종합하는 영성이 함께해야 합니다.”
-공부나 외국어를 잘하고 글을 빨리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금 노력하고 많은 결과를 기대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공부는 성실하게 해야 하는 것이며 한 번 익혔다고 다 끝난 게 아니라 성실하게 반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