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축일 9월 5일 세례명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작은 사람들의
총탄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인도의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글... -
바티칸 대성전 광장 30만명 모여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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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시티=외신종합] 마더 데레사가 복자품에 오르던 1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광장에는 30만의 인파가 운집, ''빈자들의 어머니'' ''살아 있는 성녀'' 데레사 수녀의 시복을 축하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데레사 수녀 시복식을 자신의 교황직 25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행사로 거행함으로써데레사 수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드러냈다. 데레사 수녀의 시복 선언문을 낭독한 교황은 마더 데레사가 선종한 9월5일을 데레사 수녀 축일로 기념할 것을 선포했다. 그 순간 베드로 대광장에 모여든 30만여명의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로써 교황은 교황직 25년 동안 복자 1319위를 탄생시켰다.
시복선언문 낭독 후 인도 전통 무용과 음악 공연이 이어지고, 시복시성식에서 복자나 성인의 유해 일부를 봉헌하는 관례에 따라 사리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마더 데레사의 혈액을 제단에 봉헌했다. 이 유해는 20일부터 라테라노 대성전에 보관됐다.
교황은 인도 봄베이교구장 이반 디아스 추기경을 비롯해 측근들이 대독한 강론을 통해 "개인적으로 항상 나와 같은 편에 있다고 느꼈던 ''이 용감한 여인''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데레사 수녀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표상이었으며, 사랑과 봉사의 여정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로써 마더 데레사는 선종 6년 만에 복자품에 올랐다. 시복시성 절차가 추진되기 위해서는 보통 사후 5년이 지나야 가능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관례를 깨고 데레사 수녀의 사후 15개월만에 시복시성 청원을 받아들였다.
이날 행사장에는 사랑의 선교회 총장 니르말라 수녀를 비롯해 수도자 500여명과 벨기에·요르단 왕족들, 알바니아·마케도니아·코소보 대통령, 마더 데레사의 출생지 알바니아에서 온 정교회와 무슬림 종교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또 사랑의 선교회가 운영하는 쉼터에서 보호를 받는 가난한 이들 3000여명이 참석해 ''빈자들의 어머니''로 알려졌던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더욱 의미있게 했다.
이날 교황은 성체분배를 직접했으며, 15일부터 계속된 기념행사로 지쳐보였지만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2시간에 걸친 시복미사를 주재했다.
데레사 수녀는 1910년 9월26일 당시 유고 연방 영토였던 마케도니아의 스코피예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 로레토 수녀원에 입회한 데레사 수녀는 이듬해 1929년 인도 캘커타로 가서 로레타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중 1946년 새로운 부름심을 받고,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데레사 수녀는 거리의 사람들과 장애인,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받았다. 1997년 9월5일 캘커타에서 87세를 일기로 선종하기 전까지 평생을 빈자들을 위해 헌신한 데레사 수녀는 임종을 앞둔 순간에도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대해달라''며 값비싼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데레사 수녀가 창설한 사랑의 선교회의 4500여명의 수도자들은 전세계 곳곳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학교 운영, 병원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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